한국 장로교 뿌리는 영.미 청교도 아니고 스코틀랜드 언약도(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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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 뿌리는 영.미 청교도 아니고 스코틀랜드 언약도(장로교)
  • 정이철
  • 승인 2019.12.1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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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
정이철 목사

오늘 날 한국 장로교회는 자신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인지 혼동하고 있다. 16세기 영국(잉글랜드)의 청교도와 17세기 신대륙(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세운 회중교회를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잉글랜드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세운 회중교회의 신학과 스크틀랜드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신학이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정치와 제도가 다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심지어 장로교회가 신앙의 표준으로 여기고 있는 '웨민고백서'가 전체 영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죄, 구원론(행위언약)에서부터 장로교회와 신앙의 길을 달리했던 회중파 청교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신학을 절충하여 웨민고백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웨민고백서 작성에 참여한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지도자 12명 가운데 필자가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토마스 굿윈
토마스 왓슨
토마스 맨톤
예레미야 바로우
윌리암 브리지
필립 나이
시드락 심슨 외 5명

웨민고백서는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터전이고 방패인데, 동시에 웨민고백서 속에는 장로교 신앙을 위협하는 심각한 내용도 들어있다. 7장과 19장에 기술되어 있는 회중파 청교도의 핵심 신학인 원죄와 구원론(행위언약)에 관한 내용이다. 그것으로 인해 장로교의 기독교 신앙 이해에 중대한 왜곡이 일어났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한국 장로교가 목사 안수식, 장로 임직식 등에서 웨민고백서의 전체 내용을 그대로 믿고 준수하겠다고 서약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제고해야 할 때가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PCA)는 이미 법령을 개정하여 목사 안수시 웨민고백의 일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목사 후보생에게 준다고 한다. 이 사실에 대해 곧 기사를 작성할 예정이다. 

한국 장로교 신앙의 뿌리는 언약도(Covernanters)라 불리웠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잉글랜드와 신대륙의 회중파(회중교회)를 한국 장로교의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사고는 이제 교정되어야 한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장로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왜 그러한지 누구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 보자.

1) 스코틀랜드 장로교 역사는 메리 여왕 때 핍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여 칼빈에게서 신학을 배운 존 낙스(John Knox, 1513-1572)와 함께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제도를 철폐하고 종교개혁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신앙고백서 작성을 결정했다. 이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존 낙스였고, 그 외에 다섯 명이 함께 4일 동안 수고하였다. 공교롭게도 수고했던 여섯 명의 이름들 속에 ‘존’(John)이라는 이름이 공통적으로 들어있었다. 그래서 교회 역사는 이들을 ‘Six John’이라고 부른다.

2) 1567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로교 제도를 승인했고, 전국 교회를 다스리는 ‘총회’, 여러 지역의 교회를 관할하는 ‘대회’, 그 아래의 지역의 교회들을 관한하는 ‘노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각 개 교회에 ‘당회’가 구성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정치 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3) 다시 상황은 반전되었다. 1581년, 의회가 다시 천주교의 주교제도를 복원하고 목회자들이 주교들의 관할을 받아야 한다는 ‘검은 법령’(Black Acts)를 포고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큰 어려움을 맞았다.

4) 또 다시 상황이 변했다. 1592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검은 법령’을 폐기하고 ‘황금 법령’(Golden Acts)를 포고하여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왕실로부터 독립된 교회가 되게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교회(장로교회)가 다시 복원되어짐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당시의 나이 어린 국왕 제임스 6세가 주도한 일이 아니고 그를 보좌하는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신하들이 주도하였다. 훗날 제임스 6세는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식과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는 정책을 펼쳤다. 

5)1618년,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압박하여 퍼스에서 총회를 열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사적인 성례 집행 가능하도록, 성례시 참여자가 무릎을 꿇토록, 그리고 국교회 주교가 집행하는 의식에 무조건 동의할 것 등을 기술하는 ‘퍼스 5개 신조’를 강제로 채택하게 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압살하여 잉글랜드 국교회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이었다. 

6)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찰스 1세는 아버지보다 더 강하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핍박했다. 선친 때 작성된 ‘퍼스 5개 신조’를 스코틀랜드 전국 교회들에 비치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강요했다. 찰스 1세는 자신이 교회의 머리이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왕권신수설' 신봉자(Divine Right)였다.

7)1637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배 규범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1637년 7월 2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자일스 성당의 예배에서 국교회의 예배 규범을 낭독되자, 제니 게디스(Jenn Geddes)라는 여성이 본노하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 이 사건이 찰스 1세의 스코트랜드 장로교회 핍박 정책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들의 저항의 단초가 되었다.

8)163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찰스 1세의 잉글랜드 국교회 강요 정책에 굴복하지 않고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 탄생한 장로교회를 지키겠다고 천명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는 그 일을 ‘국민언약운동’(National Covenant)이라고 부른다. 이후 이 일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상징하는 큰 사건이 것이 되었고, 이후 스코클랜드 장로교는 장로교라는 명창보다 ‘언약도’(covenanters)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여러 계층의 국민들 약 30만 명이 '국민언약운동'에 참여하여 문서에 서명했다.

1638년,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잉글랜드 국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1618년에 찰스 1세에 의해 폐쇄되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다시 개최하였다. 그리고 강요되었던 ‘퍼스 5개 신조’를 철폐한다고 선언했고,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강제로 세운 국교회의 주교들을 모두 해임하고 추방했다.

9)1639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들의 '국민언약운동' 반란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역사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이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강제로 세운 국교회 주교들을 추방하여 일어난 전쟁이므로 이 전쟁을 ‘주교전쟁’이라고 한다. 곧 협상이 진행되었고 1642년까지 잠시 평화가 유지되었다.

10)1642년, 찰스 1세가 일으킨 주교전쟁의 여파로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리우는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내전은 국왕과 국교회를 지지하는 의회 내의 '왕당파'와 국왕과 국교회를 반대하고 청교도를 지지하는 의회의 내의 사람들 '의회파'간의 싸움이었다. 스크틀랜드 언약도들은 잉글랜드 국왕과 국교회를 대적하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 의회파와 동맹하였다. 이때 양측은 장차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자고 약속하는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 9월)을 체결했다. 이것의 결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가 탄생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 군대는 잉글랜드 의회파 군대를 도와 국왕 찰스의 1세의 군대를 무찔렀고, 1644년 마스톤 무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내전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646년, 회중파 청교도 신자 크롬웰이 잉글랜드 의회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웨일즈에도 장로교회를 전파한다고 약속한 엄숙동맹과 언약을 파기했다. 하나의 장로교회를 전파하기 위해 서로의 신학을 절충하여 만들어 낸 웨민고백서의 처음의 목적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11)1649년, 국왕 찰스 1세는 크롬웰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 전에 스코트랜드 언약도들이 찰스 1세가 장로교회 제도를 수용한다면 죽이지 않고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잉글랜드 회중파와 스코틀랜드 언약도들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전쟁의 천재 크롬웰이 군대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1651부터 크롬웰이 죽은 1658년까지 스코트랜드에서 장로교는 다시 사라졌고 감독체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단두대에서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지지하였다. 1651년, 국외에서 찰스 2세가 스코트랜드 왕으로 취임하자 크롬웰과 잉글랜드 군대는 방관하지 않고 다시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쳤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는 사라졌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함께 잉글랜드 국교회를 대적했다는 측면에서 같은 청교도로 분류될 수 있으나, 국교회가 약화된 후부터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사상을 가진 정치인 크롬웰의 군대의 큰 핍박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청교도가 아닌 언약도-장로교로 분류될 수 있다.

12)1658년, 크롬웰이 죽은 후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왕이 된 찰스 2세는 처음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인정할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곧 1640-48년 사이에 의회가 승인한 종교개혁과 관련된 모든 법령들을 폐기했고, 1638년의 스크틀랜드의 장로교 수호운동 ‘국민언약운동’과 1743년의 영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자는 취지에서 체결된 ‘엄숙동맹’이 불법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스크틀랜드의 장로교회와 잉글랜드의 회중교회 가 동시에 영국에서 설 자리를 잃었음을 의미했다.

13)1662년, 찰스 1세는 ‘통일령’(the Acts of Uniformity)을 선포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목사들과 잉글랜드의 회중파 목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추방된 목사들이 다른 곳에서 예배를 인도하자 그 모임도 불법이라고 천명하는 법령을 발표법령을막중한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 모임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비밀집회자들’이라고 불렀고, 군인들을 보내어 체포하였다. 체포되는 목사들은 처형되었고, 국교회에 속한 지교회에 3주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많은 벌금을 부과하였다.

14)1688년, 명예혁명으로 등극한 윌리암은 스크틀랜드에서 감독교회를 폐지하고 장로교회를 승인했다(1690년). 이그러자 1662년의 통일령으로 추방된 생존 목회자들이 다시 교회로 복귀하였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수호하려고 1638년의 ‘국민언약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언약도들의 투쟁은 50년 동안 지속되었고, 명예혁명으로인해 승리로 귀결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언약도들의 투쟁의 역사 속에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가한 박해와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과 그의 군대가 가했던 핍박으로 인해 언약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함께 베여있다. 전체 영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자고 ‘엄숙동맹’을 맺었고, 그것을 위한 신앙고백서도(웨민고백, 1647)함께 만들었으나, 회중파는 그것을 파기하였고 무력으로 장로교를 압살하였다. 회중파 청교도는 함께 만들어 낸 웨민고백서를 버렸고 자신들만의 ‘사보이 신앙고백’(Savoy Declaration, 1658)을 별도로 만들었으며, 그 속에다 자신들의 그릇된 원죄 사상과 구원론(능동순종)을 버젓하게 기술하였다.

사실 정통 장로교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역사를 매우 심각하고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 장로교회는 진정한 장로교회의 뿌리였던 언약도들을 압살한 회중파 청교도들의 그릇된 신앙과 신학을 더욱 사랑한다. 더 나아가 스스로 회중파 청교도의 후예라고 자랑하면서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신학을 선전하는데 열심을 쏟고 있다.


신대륙에서 하나가 된 장로교와 회중교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1620년부터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민이 시작되었다. 1636년에 회중파 신학을 가르치는 하바드 대학이 메사추세츠 영국 식민지에 설립되었고, 1701년에 회중파 신학을 위해 설립된 예일대학이 코넥티컷 영국 신민지에서 시작되었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앙을 중심으로 미국의 종교가 형성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들이 신대륙 이민은 17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707년,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탄생했으나, 신학교도 없었고, 장로교 목사도 없어 하바드, 예일에서 회중파 신학을 한 목사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이때부터 신대륙(미국)에서는 장로교와 회중교의 신학이 같다고 여겨졌다. 신학은 동일하고 단지 교회 정치제도가 다를 뿐이라는 거대한 착각과 오해가 자리잡았다. 이전 영국에서 회중파가 장로파를 군대로 압박했다는 것은 잊혀졌고, 신대륙에서의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1635년,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 ‘통나무 대학’( Log College)이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온 장로교 목사 윌리엄 테넌트에 펜실바니아에 세워졌다. 이 학교에서 소수의 장로교 목사를 배출했었는데, 그들이 회중파 ‘청교도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1740-42년)에 합류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장로교 신학과 회중교회 신학에 차이가 없고 단지 교회의 정치제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당시의 인식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에 대한 치열한 이단성 논쟁이 일어났고, 에드워즈 측이 하바드 대학과 예일대학으로부터 소외되어 소수로 전락했다. 통나무 대학 출신들과 예일에서 회중파 신학을 하고 장로교 목사가 된 조나단 디킨즈 등이 함께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1746년)을 설립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프린스턴 대학에 자유주의가 침입했을 때 갈라져 나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년, 필라델피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비성경적인 원죄 사상과 구원론(행위언약)이 기술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이름이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학교의 학교의 명칭이 되었다는 사실, 이것 자체가 장로교회가 회중파 신학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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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에 대해 2019-12-16 13:31:4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스코틀랜드 교회(1647년) 미국 장로교회(1729년) - 교리의 표준으로 사용.
미국 북동부 회중교회(1748년) - 교회정치조항만 바꿔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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