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죄인의 가장 중요한 신앙 요소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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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죄인의 가장 중요한 신앙 요소는 감사
  • 정이철
  • 승인 2014.11.2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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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감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벌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여야 할 우리 죄인들을 죽이시지 않으셨고, 다시 회복하여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자녀의 특권, 땅의 모든 복과 영생을 주시면서 마음껏 행복하게 살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바라시는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고와 판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하는 존재로 지어져야 자발적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프러그램되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사악한 반역행위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선악과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즐거워하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아담의 교만과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주신 영생과 모든 복을 박탈해야만 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죽여야만 했습니다.

과연 아담이 에덴에서 산지 얼마나 되어서 선악과를 먹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권위있는 신학자들의 연구와 추정에 의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산 기간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첫 번째 안식일이 지나고, 두 번째 안식일이 오기 전에 아담의 타락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견해입니다. 이제 시작하자마자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그 사태를 가장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반역한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고, 그 반역죄를 물어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자녀로 삼으시면 됩니다. 그것이 쉽고, 빠르고, 간단하고,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결코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비합리적인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을 자녀로 지으신 하나님의 아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담을 죽이지 않고 다시 죄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그것을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죄의 종되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죄인을 , 죄에서 씻어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세상 역사를 얼른 보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잘 살펴보면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은혜가 역사의 물줄기의 중심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으나 당장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담 대신에 피를 흘리고 죽는 짐승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그의 허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택하신 일부를 다시 죄에서 씻어 건져내시려고 하나님이 스스로 아담의 죄를 무효로 만드는 위대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에게 처음부터 계시되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의 시작이고 과정입니다.

지금 이미 여러 나라들에서 사형제도가 사라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사형제도가 존재하기는 하나 이미 실질적으로 사형제도는 사라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 사형수를 처형하라는 서류에 서명하는 대통령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사형판결의 의미는 그냥 감옥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형수들을 공개적으로 처형됩니다. 여러 명의 사형수들의 눈을 가려놓고 군인들이 권총을 사형수들의 머리에 대고 쏘아서 처형하는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사형수는 장마당이라고 하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됩니다. 그런 나라들의 사형수들은 자기에게 살 길이 있다고 조금도 소망을 품지 못합니다. 반드시 처형당하여 죽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게 집행이 유예되었다는 소식은 들린다면,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더 나아가 죄에서 씻음 받아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릴 때, 그 사형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형수가 된 아담은 틀림없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죄로 인해 영생과 만복이 넘치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는 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범한 죄로 인해 저주를 받고, 세상에서 늙고, 병들고, 가시와 엉겅퀴로부터 고난을 당하며 살게되었을지라도, 사형집행이 유예되고, 반역한 죄에서 씻음 받아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길이 열렸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것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입니다. 아담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한 짐승이 대신죽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주셨습니다. 장차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될 완전한 구원의 날을 계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려면 긴 역사와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날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동물을 죽여 그 피로 속죄를 구사는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아담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감히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반역하였던 나를 용서하시고, 죽이지 않으시고, 장차 죄에서 씻음 받아 다시 영원한 구원을 누릴 은혜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순진무구한 짐승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죄 씻음의 은혜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죄인이 처벌받지 않도록 이 짐승의 피로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신앙이었습니다. 만일 아담에게 이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계십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의 그 마음과 자세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살길을 마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영생을 회복하는 은혜까지 준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아담과 구약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짐승의 피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씻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 차이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죄 씻음, 구원, 자녀로의 회복의 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학이고, 사상이고, 교리입니다. 이것이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 만들어 낸 세상의 모든 사상과 철학은 이 진리를 부정합니다. 특히 인간을 가장 고상한 존재로 이야기하는 휴머니즘 사상은 더욱 더 이 사실을 부정합니다. 인간을 과도하게 예찬합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하게 태어나고 다만 환경으로 인해 악하지고, 죄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육과 계몽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과 계몽을 많이 해도 인간은 항상 더럽고 추한 죄인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고, 그 어떤 교육과 계몽으로 인간의 행위와 사상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사형집행에서 유예되고, 장치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될 날을 기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타락한 아담의 신앙의 중심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하게 사형에서 해방되고 다시 완전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복귀된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영원한 감사입니다. 감사, 감사, 감사 .... 영원한 감사가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디서나 일관되게 감사를 강조합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감사가 우러나오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감사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가장 기본적인 신앙으로 정착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여겨질 수 있는 ‘다른복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죄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에 대한 감사만이 성경의 복음에 대한 구원받은 인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무엇을 더 달라고 정성을 다해 기도로 떼쓰고, 적극적인 언어와 사고로 추진하여 더 얻어내고, 그래서 얻으면 기뻐하면서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 ... 하면서 더 감사한다고 떠드는 것이 기독교일까요?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포도원에 소출이 없어도 영원히 죽어야 할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어떤 성도가 암 선고를 받아서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드럽게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운명 속에서 암 걸리지 않고 편히 살다 죽으면 감사할 것입니까?”라고 도전해 줄 필요도 있습니다. 부도를 만나도, 실연을 당해도, 암을 만나도, 사고를 만나도 ...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감사의 신앙을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부도나지 않고, 암 걸리지 않고, 사고 당하지 않고 사형수의 신분 속에서 살다가 죽음과 더불어서 영원한 흑암과 지옥의 형별에 떨어져봐야, 지금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지 깨닫고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무슨 상황을 만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감사는 상황을 따르거나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감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상황을 초월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이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 위한 훈련과 연습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정이철 목사, 2014년 추수감사주일 설교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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