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요한 교수
서요한 교수

청교도와 웨민고백서 등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 요즘은 서요한 교수의 <청교도 유산>을 정리하고 있다. 다음은 필자가 서요한 교수의 책 185-195 페이지를 중심으로 웨민고백서 탄생 전후 배경을 요약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서요한 교수가 말하지 않는 부분은 이미 필자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첨가하여 보충하였다.


정치적-종교적 상황

이 당시 영국의 4개의 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웨일즈와 아일랜드는 헨리 8세 시절에 이미 잉글랜드에 복속되어 한 왕을 섬기는 연합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1603년 잉글랜드의 자식이 없이 죽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임으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임스 1세로 개명한 후 두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게 복속되지는 않았으나 한 왕을 섬기는 연합국가 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의 한 왕이 영국 전체를 통치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1643년 6월 12일, 잉글랜드 의회가 영국 교회(연합국가가 된 4개 나라의 교회)에 건전하고 성경적인 교리를 정착시키기 위해 신앙과 성경에 관한 학식이 풍부한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하도록 결정했다. 첫 모임은 그 해 7월 1일에 가지도록 예정되었다. 이러한 논의가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국왕 찰스 1세와 영국 국교회 세력에 대항하는 종교개혁 교회들의 힘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다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국교회의 신앙고백 ‘39개 신조’(the Thirty-Nine Articles)과 대립되는(대항하는) 종교개혁 교회들의 일치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자 함이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국왕과 국교회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국왕 찰스 1세는 10일 후 국왕의 권위를 행사하여 반대의사를 표현했고, 그 모임을 가지지 못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의회를 지지했고, 의회의 소집에 응하였다. 결국 그해 7월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예배당에서 121명의 청교도 성직자, 30명의 평신도 정치인들(상원과 하원)이 모였다.

이때 모인 웨민총회의 회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사람들은 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들이었고, 잉들랜드 분리회중파 청교도들의 숫자는 12명이었고, 그리고 소수의 침례파 청교도들도 있었다. 그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 만들어진 39개 조를 수정하여 유럽에서 탄생한 종교개혁 교회의 신앙에 합당한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조롭게 앞부분의 15개항을 만들었으나, 이미 종교개혁으로 성공을 이루어 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도움을 받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의회의 권고로 회의를 멈추었다.
 

엄숙 동맹과 언약

1643년 8월 7일, 잉글랜드 의회의 대표들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 참석하였다. 목적은 이미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웨민총회의 신앙고백서 작성 작업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내전 상황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한 의회파가 스코틀랜드의 군대의 도움을 요청하였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데, 서 교수의 책의 이 부분에서는 그 내용이 기술되지 않았다.)

이때 양국의 결속을 위해 ‘엄숙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맺어졌다. 당시 이 계약의 중심 내용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장 알렉산더 헨더슨에 의해 작성되었고, 8월 17일에 비준되었다.(스코트랜드 의회나 관련 기관에서 먼저 합법적으로 비준되었다는 뜻). 1643년 9월 15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에서 보낸 8명(목회자 5명, 평신도 3명)이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웨민총회에 참석했다. 이때 잉글랜드 의회, 웨민총회의 회원들도 스코틀랜드에서 작성되고 먼저 비준된 엄숙동맹과 언약의 내용에 동의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엄숙동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교리와 권징을 위해 양국이 협력한다.
2)건전한 교리에 위배되는 교황제도, 고위 성직자 제도를 철폐한다.
3)의회의 권리와 왕의 권위를 인정한다.
4)왕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들 제거한다.
5)두 왕국 사이의 평화와 연합 보존한다.
6)계약을 작성할 때 의도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상호간에 협력한다.

보다시피 그 계약 속에는 당시의 국왕을 인정하고(죽이지 않고), 의회의 권리도 인정한다는 내용이 매우 강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건전한 교리에 위배되는 것들을 철폐한다는 등의 내용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먼저 발달하고 장착된 종교개혁 교회(장로교회)를 잉글랜드에도 이식하는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역사는 그들이 합의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회중파 청교도였던 올리버 크롬웰이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부각되었고, 그는 결국 국왕 찰스 1세를 단두대에 올려 처형해 버리고 만다. 그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여 군사적으로 장악해 버렸고, 잉글랜드 의회 내에서 장로파 인물들을 모두 추방해 버렸다. 그때부터 잉글랜드에서 장로교회 세력은 약화되고 회중파 청교도들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웨민고백서 완성 및 승인

웨민고백서 작성은 1643년 9월 15일부터 시작되어 1646년 12월 4일에 완성되었다. 엄숙동맹의 결과로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파송한 대표 8명이 잉글랜드의 웨민총회에 참석한 때부터 웨민고백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엄숙동맹에서 합의된 것, 즉 영국 4개의 나라에 하나의 건전한 개혁교회를 세운다는 목표를 위해 웨민고백서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웨민총회에 참석한 각 나라의 각 종파들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열띠게 토론하였다. 가장 공정하게 논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스크틀랜드에서 보낸 총대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숫자는 작았으나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회원들은 토마스 굿윈, 토마스 왓슨, 토마스 맨톤, 예레미야 바로우, 윌리암 브리지, 필립 나이, 시드락 심슨 등의 잉글랜드 독립회중파 청교도들이었다. 잉글랜드 독립회중파들의 신학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들의 조상 윌리엄 퍼킨스로부터 시작되어 회중파뿐 아니라 서서히 영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 사상이었다. 웨민고백서 19장에 기술되어 있는 비성경적인 행위언약 사상은 회중파 대표들에 의해 주장되어 삽입된 것이다.
 

서요한 교수의 작품 '청교도 유산'
서요한 교수의 작품 '청교도 유산'

 

웨민고백서 채택

1647년 2월, 잉글랜드 의회가 웨민고백서 승인했다.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도 웨민고백서를 교단의 신앙고배서로 채택하였다. 그 이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칼빈에게서 종교개혁 신학을 배운 존 낙스와 다른 4명이 4일 동안 수고하여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Scottish Confession, 1560년)를 사용하였다. 1647년에 새로이 웨민고백서를 채택한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웨민고백서를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정통 장로교회의 뿌리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도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의 그릇된 원죄 개념과 구원론이 내포된 ‘행위언약’ 사상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서요한 교수나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서요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전반적으로 웨민고백서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초했다고만 평가했다.

"물론 개혁자 존 칼빈의 사상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이미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이 완성되어 개혁을 원하는 국가들의 산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해로 잠시 제네바에 머물렀던 개혁자들은 칼빈의 개혁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고 자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실현하였다. 결국 칼빈의 개혁사상은 그의 동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 혼돈으로 치닫던 교회 개혁의 기수가 되었다."(서요한, 청교도 유산, 204-205)

"총회는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언약신학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증표로 간주되었다. 고백서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논하는데,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보통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으로 부른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가지 언약으로 간주한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것이다."(서요한, 청교도 유산, 209-210)


올리버 크롬웰의 웨민고백서 거부

올리버 크롬웰은 웨민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거부했다. 잉글랜드 의회의 상황은 복잡했다. 종교적으로 장로교 인물들이 많았고, 정치적(군사적)으로는 회중파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우세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이 군사적으로 실권을 장악한 후 장로파들을 다 추방시켜 버렸다. 그 원인은 찰스 1세에 처리 문제였다. 스코틀랜스 장로교파들은 처음부터 국왕을 인정하자는 입장이었고, 엄숙동맹을 통해서 그것을 주장하고 명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크롬웰-회중파 청교도는 어차피 연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크롬웰은 찰스 1세를 단두대로 보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웨민고백서를 만든 취지와 정신을 사라지고 말았다. 크롬웰이 살아있는 동안 잉글랜드에서 회중파 교회가 급성장했고, 반대로 장로교회와 웨민고백서는 그 만큼 빛을 바랬다. 크롬웰이 사망(1658년)하고 공화정이 무너졌고 해외에서 귀국하여 국왕이 된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를 복구하였다. 1685년, 의회는 카톨릭 지향 정책을 일삼는 찰스 2세를 폐위하고 찰스 1세의 다른 아들(제임스 2세)을 왕으로 세웠다. 그도 부친의 길을 따라 친 로마 가톨릭 노선을 표방하자, 의회는 다시 ‘명예혁명’(1688년)을 통해 그를 폐위하고 네덜란드에 있던 윌리암과 메리 부부를 왕으로 세웠다.

명예혁명으로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는 ‘권리장전’을 포고했고, 장로교가 승인되었다. 다시 웨민고백서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웨민고백서를 처음 만들 때 이미 삽인되어 버린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의 그릇된 원죄 - 행위언약 사상이 의문시되지 않고 계속 존속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부분에 대해 정식으로 대담하게 의문을 제기한 학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웨민고백서에 삽입된 행위언약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한국의 신학자는 서철원 박사이다.
 

"행위언약은 위의 언약체결 논의에서 살폈듯이 잘못 설정된 언약개념이다. 처음 창조 시 아담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셔서 계명을 지키면 영생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전적으로 어긋난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시사는 없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과 그 준수 강조를 행위언약으로 바꾼 것이다."(서철원 박사, 인간론, 16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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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