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종 목사의 열정목회 이야기 1

고광종 목사/인천성산교회 담임
고광종 목사/인천성산교회 담임

나는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란 말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가난으로 인해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학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학교 갈 시간에 밖에서 밭을 매야 했고, 들에서는 풀을 베야 했으며, 산에 가서는 나무를 해야만 했다.

8남매 중 7째로 태어나 가난의 최전방에서 쌀밥 한번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 말 그대로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그 후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가셨다. 먹고 의지할 곳 없던 그 시절, 그런 환경 탓일까? 위로는 형들에게 얻어터지고, 매일 같이 집안일과 청소는 고사리 손인 내차지였다.

우연히 송진을 구하게 되면, 입속에 넣고 질릴 때까지 씹어 껌 대신 위안을 삼고, 아버지가 신던 커다란 검정고무신을 짚으로 감아 신고 엉거주춤 걸어 다녔던 시절, 정말 하나님이 없는 웅덩이에 빠져 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며, 하나님은 시편 40편 2절의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주시며, 만세 전부터 환경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시려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두고 계셨음을 안다.

학창시절의 기억이 더 이상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교복 입은 아이들만 보아도 내 가슴은 설레고, 곧잘 그들의 모습 속에 함께 있는 나를 그려보며 웃음 짓곤 한다. 1974년 4월 나는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생활하고 있는 둘째 형님의 손에 이끌려 상경하게 되었다. 빡빡머리에 검정고무신 차림의 15살 어린 소년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형님은 식당에 데려갔고, 먹고 싶은 것 시키라는 말에 가장 맛있어 보이는 메뉴였던 “백반”을 시켰다. 백반이 흰밥에 반찬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시절 밥상 위에 놓여진 음식들을 보고 엄청나게 후회했지만, 그 맛은 달고도 좋았다.

가난한 시골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서울에 왔지만, 나에게는 이렇다할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다. 그러니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형 눈 붙이는 것에서부터 공사판 잡부, 핀 공장 노동자, 가구 공장 인부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나는 ‘열심이 특심’인지라, 무조건 열심히 했다. 열심히 일한만큼 내 작업복의 주름도 하나 둘씩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구겨진 작업복 차림으로 가구 칠을 하던 중이었다. 내 옆으로 정장을 갖추어 입고 지나가는 부장님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고, 그에 비하여 구겨지고 구멍난 옷차림의 내 모습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나도 양복 차림으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원서를 내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이 전부인 내게 그런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후 장래에 대한 생각과 학업에 대한 욕구로 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의 삶이 전부였던 내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런 나를 알아 본 큰 누나는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고, 결국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학업과 직장일로 지쳐가던 나는 교회에 다니며 많은 힘을 얻었고, 삶이 힘들어서 지칠수록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급함 또한 더욱 간절하게 되었다.

스물 네살 청년이던 나는 공예배, 철야예배, 새벽기도 할 것 없이 빠지지 않고 나갔다. 그래도 갈급함이 해소되지 않아 아는 전도사님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납니까?”라고 물었다. 전도사님은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일주일동안 금식해보라고 권유하셨다.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일주일 아니 한달 금식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내 영혼은 목말라 있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다시 전도사님께 찾아가 물었더니, 또 금식을 권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열심히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기도원에 다시 들어가 기도하기를 3일째 되던 날, 방언을 받게 되었다.

“우라라라 바라사바 우루루루...”

내 입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방언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성령을 받았느니, 하나님을 만났느니,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귀가 닳고 머리가 아프도록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나의 내적 갈급함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장로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로교에 와보니 사람들의 신앙이 너무 차분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기도 때도 숨 쉬지 않는 듯 묵상기도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당시 방언을 받아 뜨거운 나의 열정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방언을 안 받으면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며 학생부, 청년부, 어른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장로교 청년부 활동 초창기, 신학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던 평신도 시절부터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전했으며, 중직자 자녀 20여 명을 기도원에 데리고 가서 방언을 터트리게 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성가대와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사로도 활동하며, 교회 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을 생각하면, 사람의 인연이란, 아니 하나님의 계획이란 참으로 인간의 힘으로 예견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1987년 3월의 어느 날, 청년부와의 교제를 생각하며 성경책을 열고 묵상하던 중, 책상아래에 떨어져 있던 일간지 1면을 보게 되었다. 커다란 사진과 함께 “이대생과 붕어빵 장수의 결혼”이란 타이틀로 대서특필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를 읽으며 속으로 ‘참 별 일이야, 저 여자도 참, 정신없는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하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주일 아침이었다. 오전 10시 주일학교 예배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서 있는데, 교육관문이 열리면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눈부신 광채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 실루엣이 형상으로 나타나는 순간, 주변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입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의 자매가 눈에 들어 왔다. 순간 천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심장은 백 미터를 12초에 돌파하고 숨을 고를 때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 자매가 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여자, 박정은.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였고, 먼발치서 보고만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전도사님의 손에 이끌려 이 교회에 나온 지 석 달 째, ‘기회는 잡으라고 있지 않은가?’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생각만 맴돌 뿐, 그녀 앞에만 서면 심장은 빠르게 요동쳤으며, 내 이성과 감정은 따로 놀았다. 그러면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검정고시와 공장을 돌아다니며 고된 일만 해온 내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학생에 CCC 출신의 그 여자와 나란히 설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내 신세가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후 비교의식과 열등감으로 괴로워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와서 차 한 잔 하게, 교회에 들르라’는 것이었다. “저 지금 몸이 몹시 피곤해서 다음에 들르겠습니다.”하는데, 전화기 속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왠지 모르게 그 자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써 교회를 향해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몸을 이끌고 달리고 있었다. 교회의 문을 여는 순간, 내 생각은 현실로 나타났다.

나를 보고 ‘몸은 괜찮냐?’고 물으시는 전도사님의 걱정은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어느덧 그 자매의 앞에 앉아 있었고, 좌우 살필 것도 없이 사모하고 있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사람 앞에 설 때 용기가 없던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남자다운 용기를 내서 고백했음에 만족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일초, 이초 ... 초침이 지나가는 소리가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 가득했고,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를 5분 ...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광종 형제님, 무슨 이야기인 줄 알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로 인해 어색한 관계가 되지 않길 바래요. 앞으로 청년부 일원으로 잘 지내요.”

결국 둘의 관계는 단순히 청년부 형제, 자매로 머물러야 했지만 청년부 지체로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실 나는 성경말씀을 나누고 전할 때 이외에는 부끄러움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청년부 활동을 할 때도 내 마음속에 이미 그녀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내 행동은 더욱 작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음식을 먹으러 갈 때도 산행을 할 때도, 선뜻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기도원에 가야해서 못 간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녀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었고, 산행 당일이면 제일 먼저 약속장소에 가 있게 되곤 했다. 그녀에게 직접 말을 건넬 용기는 없었지만, 강가에 흐르는 돌을 주워 시를 적어 주면서 간접적으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콩나물 구경은 평생 해보지도 못했으면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청소와 설거지를 하며, 그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다보니 그녀와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전화 통화도 하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에 감동받고 은혜 받은 부분들을 서로 나누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해 갔다.
 

그렇게 3년쯤 지난 연말 무렵, 청년들이 모여서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집인 시내 쪽에서는 새벽 시간에 교회까지 오는 버스가 없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위험하니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청년부 활동을 통해 워낙 친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쉽게 승낙을 했다. 그 때부터 새벽 예배를 통한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새벽 예배 가고 오는 길에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 일생을 드리겠다는 생각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목회자로서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지금 당장은 나의 가치가 그녀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훗날을 내다본다면 평생을 같이 할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그 때 마침 그녀는 결혼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쁨을 가진 사람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여러 기회를 통해 세상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도 만나긴 했지만, 인생을 맡길 정도로 호감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는 말도 했다. 새벽기도를 통한 데이트를 하면서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단순히 교회 청년이 아닌, 한 사람의 남자 고/광/종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읽은 후, 나는 “앞으로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겠다. 평생을 함께 하나님 일을 하며 지내자”는 말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는 “기도해 보겠다”고 대답했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나에게는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 마음을 전했다는 것과 그녀가 나에 대한 생각과 기도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할 수 없이 기쁘게 했다.

그리고 수일 후, 그녀에게서 일생을 함께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나를 기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결심을 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결혼이 눈앞의 현실로 닥쳐왔던 것이다.

사실 나는 집을 어떻게 준비하며, 예식은 어떻게 치를 것인지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결혼준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녀에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어느덧 입장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내 사람은 내가 책임지는 성격인 그녀는 자신은 준비가 다 되어있으니 결혼하자고 이끌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고 1때 “한 평생 하나님 앞에 살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벽기도 주간에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상황과 그녀의 기도제목을 함께 보여주셨고, 그로 인해 내가 바로 자신의 배필이라고 확신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했다고는 해도 이를 실현하는 것이 생각만큼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보다 더 열정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나는 고등학교 검정고시 출신의 가구공장 노동자였고, 그녀는 이대 출신의 선생님이었으며, 게다가 어머니는 권사인 크리스천 집안이었다. 그러한 환경적 요소는 나와 그녀의 결혼에 일차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반대 속에 나에 대한 구설수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주말에 더 바쁜데도 불구하고 “예배 때문에 주말과 주일에 결근할 뿐 아니라, 새벽 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며 [직장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었고, ‘일 년에 두세 번씩 틈만 나면 보따리 챙겨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 기도를 하니’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오히려 내 신앙을 공격하는 이들도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격렬한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랑과 신뢰와 이끄심 덕분에 삼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세 달 간의 연애 후 결혼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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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종 목사는 인천성산교회(예장 합동)의 담임목사(1996년~현재)이다. 건강한 성경적 신학에 기초한 목회를 매우 중시한다. 특히 신자들에게 성경적 구원론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일에 점심으로 힘쓰는 목회자이다. 또한 교회의 복음을 허무는 여러 이단들에 대해 앞장서 대처하는 목회자이다.
총신대학교 대학원, 총신 목회 대학원,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총신대 강사,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인천상담소장,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협회(세이연)위원, 유사종교피해방지대책 범국민연대 상임위원이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 <두 가지 신앙>, <목회자를 향한 양의 신앙고백>, <시편 23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