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 비판(2)

글을 시작하며

옥성호는 <야고보를 찾아서>의 ‘들어가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진 논리에 따른 해석이다. 따라서 더 근거 있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난다면 나는 얼마든지 기쁘게 내 모자람을 인정할 것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내일이 아니라 오늘 깨닫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기 때문이다.”(pp. 11-12)

필자는 위의 말이 <야고보를 찾아서>에 대한 옥성호의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기를 바란다. 따라서 필자는 옥성호의 진심어린 말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야고보를 찾아서>의 비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전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그러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질이 더욱 정밀해지리라 믿는다.

옥성호는 자신의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해 성경말씀을 주저 없이 왜곡한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5:17-18)

옥성호는 위 본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체포된 원인이 ‘시기심’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가 누구를 시기하는 것만으로 체포하지는 않는다. 설사 그런 내적인 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이다.”(p.16)

필자가 [야고보를 찾아서] 비판(1)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서도 옥성호는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5:17-18)의 누가의 기록에 대해, 객관적인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추측해 버린다. 그러고 나서 근거 없는 자신의 추측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가 누구를 시기하는 것만으로 체포하지는 않는다.”라는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자신의 논리를 사실에 근거한 명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물론 ‘누가 누구를 시기하는 것만으로 체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만고불변의 정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치사한 독재자들이 언제 정의대로 체포하고 정의대로 재판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지금도.

초대교회 당시 유대 땅에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들의 시기심이면, 무슨 건수를 만들어서 라도 얼마든지 아무런 힘도 빽(background)도 없는 사도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또 죽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공룡의 권력을 가졌던, 그것도 부패의 정점에 있었던 안나스와 가야바 시대의 산헤드린 공회가 저지른 불의한 짓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들이 하는 짓을 놓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가 누구를 시기하는 것만으로 체포하지는 않는다”는 옥성호의 이상한 명제는 갓난아이의 꿈에서도 가당치 않는 일이다.

물론 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다른 이들이 수긍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서 체포하면 했지, 막무가내 식의 시기심만으로 자신의 미운 놈들을 체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5:17에서 누가가 그들의 시기심을 지적한 것은 사도들을 체포한 그들의 진짜 속내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체포했을 때에도 이방인이었던 빌라도가 손쉽게 눈치 챌 정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들의 진짜 속내는 시기심이었다(막15:10/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럼에도 이들은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장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기소하고 재판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길 때에는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게 하기(신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위해 정치범으로 포장했지만 말이다.

동일하게 지금 사도들을 체포하기 위한 그들의 합리적인 이유는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를 어겼다는 것이다. 이들이 사도들을 체포하기 전의 상황을 기록한 행5:12-17(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을 보라. 사정이 이런대도 어떻게 유대 당국자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옥성호는 이것을 외면한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일념만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누가 누구를 시기하는 것만으로 체포하지는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누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시기심으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둔 사건을 기록한 행5:17-18(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을 보면, 대제사장이 사두개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인적으로 한 짓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어나서”로 번역된 헬라어 “VAnasta.j”(아나스타스)가 3인칭 단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들을 시기하고 체포하여 옥에 가둔 주체는 대제사장이며,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의 동조자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이전에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도록 경고했음(행4:18)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괘씸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표적이 나타나고(행4:16),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고(행4:17), 그래서 믿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큰 무리가 되는 것(행5:14)을 보고 이들은 종교적인 위기감과 시기심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자신의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두개인들을 동원하여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둠으로써, 사도들을 더욱 겁박하여 자신의 시기심의 원인(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지 않고, 하찮은 촌놈들인 사도들에게 환호하는 것)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제사장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옥에 갇힌 사도들이 천사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당연히 겁을 먹고 멀리 도망갔어야 할 사도들이 도망가기는커녕 자신의 심장부인 성전 뜰에서 금지시켰던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파 대제사장과 유대 당국자들은 아마도 천사들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탈출 불가능한 옥에서 탈출한 사도들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을 것이다. 더구나 옥에서 탈출한 사도들은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겁도 없이 자신들의 안방인 성전에서 그들이 엄하게 금지한 예수 전함을 보고, 틀림없이 이들은 위험하고 건방진 사도들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행5:27) 사도들을 합법적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성호는 여기서 또 “그런데도 당장 엄벌에 처할만한 이렇다 할 잘못이 없었던지”라고 근거 없는 추측을 하면서 마치 이것 때문에 “재판은 길어지고 예상치 못한 설전이 벌어진”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한다. 여기서 옥성호가 “그런데도 당장 엄벌에 처할만한 이렇다 할 잘못이 없었던지”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독자들에게 연막을 치는 까닭은, 나중에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신으로 선포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의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신으로 선포했다면 유일신에 목을 걸고 있는 유대교의 심장인 산헤드린 공회가 하나님을 모독한 사도들을 재판하는데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았을 것이며, 또 가차 없이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사형을 집행했을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 위함이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옥성호의 말대로 재판을 질질 끌지 않았다. 잡혀온 사도들이 대제사장의 심문에 답변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즉시 사도들을 사형시키려고 했다(33절/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그렇다면 이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자마자 왜 사도들을 당장 죽이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옥성호의 주장과는 달리,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선포해 왔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서 주범이었던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했다. 이렇게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했다는 증거는 사도행전에도 차고 넘친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설교에서 욜2: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의 ‘여호와’를 행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에서 ‘주’로 바꾸어 인용하고, 그 ‘주’(ku,rioj/퀴리오스: 당시 유대인들에게 ‘주’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었다)가 예수이심을 선포한다. 베드로는 또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선포함으로써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체포했고, 지체하지 않고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행5:33/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들을 원수들의 손에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때 갑자기 가말리엘이 불쑥 끼어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5:35-40)

여기서 옥성호가 사도들의 편을 들고 있는 가말리엘의 말을 소개하는 이유는, 가말리엘의 말을 사도들이 결코 예수를 하나님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기 위함이며, 예수는 가말리엘의 말 속에 등장하는 드다와 유다와 다르지 않게 정치적인 선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죽은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런 목적 때문에 옥성호는 독자들이 가말리엘의 말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미 앞에서 또 다른 거짓 작업을 했다. 이 거짓 작업은 필자가 [야고보를 찾아서] 비판(1)에서 지적했듯이 가말리엘이 실명이므로 가말리엘의 말이 진실이라는 옥성호의 어이없는 추측성 결론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옥성호의 어이없는 억지 추측 한 가지를 더 보고 지나가자.
 

옥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행전의 저자의 중요 저술 목적 중 하나가 바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는 아예 바울을 가장 저명한 바리새파 지도자 가말리엘의 제자로 만든 것이 아닐까? 바울이 진짜로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면 자신을 그냥 ‘바리새인’이라고만 소개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건 마치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그냥 ‘미국에서 공부했어요’라고만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p. 21/각주 7)

위의 옥성호의 주장은 억지치고는 너무 유치하기까지 하다. 당시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바울을 아는 자라면 일반적으로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특히 바울이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소개하는 상황은 예를 들면 행23: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에서처럼 그것이 자신의 어떤 진술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말리엘의 제자이면서도 그것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은 바울의 겸손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요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말끝마다 ‘나는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보다, 단순히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격적이지 않는가? 혹시 이것이 옥성호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필자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왜 산헤드린 공회는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사도들을 놓아주었을까?

옥성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을 어긴 자에게 자체적으로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는 실로 막강한 권력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교의 분명한 규율을 어겼다면 산헤드린의 판결에 의해 당장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장 엄벌에 처할 만한 이렇다할만한 잘못이 없었던지 재판은 길어지고 예상치 못한 설전이 벌어졌다”(pp.15-16)

위의 옥성호의 진술은 당시 유대 땅의 상황을 잘 모르는 무지한 추측에 불과하다. 예수님 당시를 보라! 옥성호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공생애 초반에 죽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가 그들에게 걸림돌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섣불리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가 만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저항하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계산 때문에 예수의 참람죄에 대한 심판을 계속 유보했던 것이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 유일신론에 도전하는 참람죄는 사형의 결정적인 사유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런 사유는 자신들이 유리할 때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만약 그들이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면, 그들은 결코 유일신론을 고집하며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 보다 자신의 안녕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고 누구나 인정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는 등의 책망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에 관한 한 바리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서기관들은 어땠을까? 물론 이들도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5-7)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건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도구였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고백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은 사실상 없었다. 옥성호에 주장이 옳다면, 위 본문의 서기관들은 죄 사함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저지른 신성모독의 죄를 선언하고 돌로 쳐 죽이려는 시늉 정도는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의사를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위험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의 진짜 관심은 하나님이 모독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한 자신들의 피해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천인공노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에게 정말로 유일하신 하나님이 있었다면,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스데반처럼 외쳤을 것이다.

이렇게 옥성호의 주장과는 다르게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위한 도구로서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산헤드린 공회도 다르지 않았다. 산헤드린 공회가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사도들을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놓아준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는 가말리엘이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옥성호는 그의 책 p.19에서 누가가 가말리엘을 언급하면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 묘사에 대해 문맥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에게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게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든다”고 하면서 은근히 누가의 정직성을 흠집을 내어 사도행전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가말리엘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누가가 소개한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누가 그렇게 가말리엘을 소개한 것은 나중에 산헤드린 공회가 가말리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말리엘의 말을 거절하면 백성들의 저항이 있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가말리엘이 언급한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9절)의 말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만약 이들이 가말리엘의 말을 듣지 않고, 사도들을 죽였다가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오해받는다면, 자심들의 의에 돌이킬 수 없는 흠이 생길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가말리엘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 사회가 다 위선적인 경건으로 덧칠해져 있었을지라도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가말리엘만큼은 독야청청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목을 걸고 경건하게 살았을까? 가말리엘이 말한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5:39)는 그의 진심일까? 아니다. 그도 다른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게 겉으로만 유일하신 하나님이 있었을 뿐이며, 그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만약 가말리엘이 정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에 목을 거는 경건한 자였다면, 과거 예수님이 가바야에게, 그리고 빌라도에게 불의한 재판을 받고 있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행5:39에서 했던 말을 그들에게도 똑같이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때에 가말리엘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였을까? 그것은 그때에는 자신이 나서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살리려고 했을까?

가말리엘은 행5:33-39에서 왜 사도들을 구하려고 했을까? 옥성호는 “사도행전이 기록되던 당시 유대교를 주도하던 세력은 바리새인이었다(p.22)”고 진술한다.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전 가말리엘이 살아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의 편을 들었을 당시에는 사두개인들의 세력이 훨씬 우세했으며, 그래서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는 성전은 물론이고 재판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도 사두개인들이 숫자적으로도 8:2 또는 적어도 7:3 정도로 우세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이었던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살리려고 했던 이유였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을 견제하는 데 사도들이 너무나도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부활 교리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양보할 수 없는 첨예한 신학적인 문제였다. 아래 행23:5-6을 보라.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행23:6-7)

이렇게 ‘부활’ 문제는 그들 사이에서 목숨을 걸만큼 첨예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살리려고 한 동기는 분명해진다. 가말리엘이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살리려고 했던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충분한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마치며

옥성호는 가말리엘이 유다와 드다의 반란 사건을 예로 이야기한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어이없는 억측을 한다.

“~가말리엘은 바로 이런(필자 설명: 정치적인 반란을 일으킨)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의 연장선상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그들이 잡혀온 진짜 이유는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처럼 로마제국에 항거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예수를 여전히 메시아라고 전파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메시아는 사도행전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려는 영적인 메시아가 아닌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을까?”(pp. 30-31)

가말리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할 때, 드다와 유다의 반란 사건을 예로 사용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사라진 운동이었기 때문에 매우 적절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피지배 민족이었던 유대 사회에서 일어난 민중 반란의 사건들은 당연히 정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어쩌면 피지배 민족으로 살았던 그 시대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만이 유일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지배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을 만큼 당시의 유대 사회가 정치적으로 매우 절박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옥성호가 가말리엘이 정치적인 반란이었던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예로 사용한 것을 근거로, 예수도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억측이다. 그것은 마치 가말리엘이 현재 손에 들고 있지 않는 공을 산헤드린 공회원들에 설명하려고, ‘공은 사과처럼, 그리고 배처럼 둥글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옥성호는 큰 소리로 ‘공은 사과나 배처럼 과일이 틀림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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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