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32:4, 공동)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출 32:5, 공동)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출 32:6, 공동)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세상에는 항상 미혹과 거짓 복음이 넘친다. 주께서는 친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세상에 많은 이단들이 있다고 했고, 바울도 수 없이 거짓 형제, 거짓 선생, 다른 복음에 대해 거론하고 중히 다루었다. 거짓 선지자, 거짓 복음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의 근원은 마귀이다. 모든 이단들과 거짓 선생들의 아버지는 마귀이다. 마귀는 아담이 타락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 이후 마귀에 의해 직접 조성된 거짓 복음들과 종교들이 수 없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만드시는 공동체 안에서도 여지없이 거짓 선지자들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의 어전회의 장소에 사탄이 직접 나타났다. 이후 욥에게 벌어진 모든 고통은 사탄이 한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을 사탄에게 허락한 분은 하나님이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복음과 이단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허용하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이 마귀의 미혹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찾을 수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2)

거짓 복음에 미혹되게 허용하시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사람을 입지 못한 버려진 영혼들이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땅에서 먼저 내리시는 형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무서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가지는 거짓 복음, 거짓 선지자, 거짓 형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결코 노골적인 배교, 즉 하나님 배반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한 자들은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는 노선을 표방하지 않았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도 그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복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 점에 세상 사기꾼들과 다른 점이다. 세상 사기범들은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리하지만, 영적인 사기꾼들은 자신이 사기꾼임을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그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2) 그들은 자기 하나님을 위한 열성이 특별하다.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선포한 후 즐거운 축제를 벌이자고 하였다.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종교성과 열성으로 말하자면, 정상적인 신자들이 그들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다. 거짓 복음에 물들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거짓 복음을 향한 엄청난 헌신과 열심이다. 그것이 그들의 특징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저주이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금송아지를 자기 하나님으로 선포한 후 그 앞에서 경배하고 헌신하면서 즐거워하는 그들의 이 모습을 보라! 사람의 정상적인 감정으로는 이리하지 못한다. 거짓 복음 속에는 미치도록 힘을 내어 거짓 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놀라운 성분이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허용하시는 가장 무서운 저주와 심판은 바로 이것이다. 그대로 거짓에 미쳐서 살다가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저주이다.

이러한 미혹이 불교인들의 세계에서 일어났는가? 남묘호랭개쿄인들의 세계에서 일어났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신앙공동체 속에서 일어났다. 이때에만 잠시 그랬었는가? 아니다.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미혹이 교회 안에서 나타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께서 재림하시고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까지 마귀의 거짓 선지자들은 여전히 활동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500년이 지났다. 500년이면 이미 떼가 많이 쌓이고 먼지도 많이 쌓였을 시간이다. 다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필요성이 매우 고조되었을 시간이다. 실제로 그렇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거짓 은사를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구원에 대해 성경과 다른 신앙을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 중의 하나가 최고의 엘리트 종교개혁 신학이라고 스스로 가장하면서 자리잡은 청교도 신학이다. 아무도 비판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견고한 성 바벨론’이 되어 버렸다. 1) 원죄에 대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고, 2) 구원에 대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고, 3)복음전도에 대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고, 4) 칭의에 대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고, 5)성령에 대해 다르게 가르친다. 그러나 아무도 문제라고 말하지 못한다.

청교도신학이 자리 잡던 시대에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의 일부 내용 속에도 그들의 거짓 신학의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앙문서이다.”

오히려 이렇게 높이고 섬기는 것을 정상으로만 여긴다.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거짓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라고 선포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속에 좋은 내용이 99%일지라도 성경과 다른 내용이 단 1%라도 있으면, 여지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목사될 때 그 앞에서 다 지키고 믿고 따르겠다고 손들고 맹세했으니, 그럴 것이면 장로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완악하고 미련한 언사인가? 교황과 천주교에 충성하겠다고 서약한 루터가 95개조항을 걸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악하고 못된 일이었는가? 신앙고백서가 성경인가? 사람이 작성한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권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는 것이가? 신앙고백서는 말 그대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해하고 믿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 내용이 좋으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문서로 채택한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새로운 시대의 교회 환경에 적합하지 않는 내용이나, 더 발전되어진 성경 연구에 비추어 볼 때 틀리거나 미진한 점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적절한 과정을 통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고백서들은 공교회의 교리들과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회의를 통해 교회에 수납된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creed)와는 다르다. 신조는 권위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모든 교회들에 대해서는 강제적이다. 신조의 내용을 수용하지 않고 이의를 달면 즉시로 큰 문제이고 기독교 신앙의 건전성을 의심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새로운 시대의 교회의 상황에 맞게 고칠 수 있다는 면에서 가변성의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교회에게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며 강제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의 일부 내용이 성경과 다르다는 의견을 성경에 기초하여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특히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서들은 언제든지 성경의 절대권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 비추어 미진하거나 틀린 내용이 보이면 언제나 수정에 대해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 교회의 신앙의 초석을 다진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칼빈의 다른 신학 저술들의 내용과 충돌되는 내용이 있으면, 먼저 칼빈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신앙고백서들은 언제든지 성경의 권위와 공교회가 수립한 교리들과 보편교회가 세계적 종교회의를 통해 수납한 신조들의 감독받아야 한다.

멋도 모르고 신앙고백서 절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제이다. 그 열심 때문에 자신과 남들이 큰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앙고백서에 들어있는 명백한 비성경적인 내용을 보지도 못하고, 보아도 바르게 말도 못하면서 늘 신앙고백서에 대한 사랑과 섬김과 높임과 숭배에 미쳐서 살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했던 자들의 그 행위와 뭐가 다른가?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모세는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거짓 하나님 숭배로 인해 진노하신 하나님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인간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특별한 장소를 건축하여 그 이름을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랬더니 참 하나님의 은혜를 앙모하는 참 하나님 백성들이 그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어느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신앙의 공동체 속에는 항상 거짓 복음과 미혹이 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청교도처럼 최고의 신학의 옷을 입고 들어와 아무도 도전하지 못할 정통으로 군림하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하나님 섬김의 도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어 참 하나님 백성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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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