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에서 웨민고백서는 성경과 기독교강요의 권위에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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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에서 웨민고백서는 성경과 기독교강요의 권위에 미치지 못한다
  • 정이철
  • 승인 2019.10.03 03: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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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합동, 합신, 고신의 신앙은 정치 제도의 측면에서는 장로교회이고 신학적으로는 개혁신학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로교 목회자들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최고의 권의를 가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오직 성경'이다. 그러면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성경 다음으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종교개혁 완성자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라고 답해야 한다.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성경 다음으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다른 신학 작품들이라고 한다.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 곧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신학 전개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 물론 고대교회의 교리를 기본진리로 받아서 시작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서철원 박사, 신학서론, 131)

그런데 요즘 분위기를 보면 <기독교강요>보다 웨민고백서가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에서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기독교강요>나 웨민고백서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진 보조적인 자료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이 둘이 서로 상충되는 것을 말하고 있을 때에는 가장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강요>를 우선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는 개혁신학의 바탕을 마련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신학의 전체가 기술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웨민고백서를 귀하게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웨민고백서의 대부분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믿고 수용한다. 단지 지극히 일부 내용이 성경과 다르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가르침과 다르므로 서서히 공론화하여 후세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 보자는 취지이다. 본인이 웨민고백서의 성경과 다르고 <기독교강요>와 다른 가르침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은 단지 다음의 내용이다.

웨민고백 19-1>
God gave Adam a law as a covenant of works. He required Adam and all his descendants to obey this law, individually, completely, perpetually, and in precise accordance with its provisions. God promised life for keeping it and threatened death for disobeying it, and he gave man the power and ability to keep it.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위언약으로서의 한 법을 지키라 명하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완전하게, 영원하게 그리고 그 규정대로 정확하게 준수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그대로 지키는 경우에는 영생을 약속하였고 그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죽일 것이라고 위협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대로 지킬 수 있는 능력과 힘도 주셨다.)

웨민고백 19-2>
After the fall this law continued to be a perfect rule of righteousness and was given, as such, by God on Mount Sinai in the Ten Commandments, written on two tablets.

(타락이 발생한 후에도 그 법은 여전히 완전한 의의 표준으로 작용했고, 그리고 그 법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혹시 웨민고백서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먼저 영생을 주시고 난 후 영생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법규에 대해 하나님과 아담 상호간의 약속이 있었다고 하면 문제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 영생이 없는 상태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되는 법규를 지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약속이 있었다는 웨민고백서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아담의 원죄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 6:7)

웨민고백서의 내용처럼 원죄를 설명하면 아담의 죄를 반역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설명되지 못한다. 칼빈처럼 하나님이 아담을 영생하는 자기 백성으로 지으셨고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든 능력들과 은사들을 선물하여 지상의 피조물들의 하나님(하나님 대리자)되게 하셨으나, 아담은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았으므로 영생을 박탈당하고 영원한 사망에 처해졌다고 해석해야 성경이 바르게 해석된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4.14.12)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2.1)

그러나 웨민고백서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법규가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 이었고, 아담의 타락 후에도 그 법규가 인간의 의로움의 표준이었고, 그것이 훗날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기록되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After the fall this law continued to be a perfect rule of righteousness and was given, as such, by God on Mount Sinai in the Ten Commandments, written on two tablets. 타락이 발생한 후에도 그 법은 여전히 완전한 의의 표준으로 작용했고, 그리고 그 법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웨민고백 19-2)

웨민고백서의 이 주장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성경은 아담이 타락할 때, 즉 최초의 인간의 범죄가 일어날 때 불의함과 의로움을 판단하는 법규는 존재하지 않았고, 율법과 법규는 모세 시대에 도입되었다고 말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요 1:17)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7:19)

성경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영생 얻게 만드는 법규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의와 영생에 이른다고 말한다. 구약의 노아, 아브라함 등의 중요한 인물들은 웨민고백서 19장이 말하는 의의 기준이 되는 무슨 율법을 지켜 구원 얻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 영생에 이르렀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신약에서 사도 바울도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처음부터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무관하였고, 훗날 도입된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데 아무 작용도 못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의 이 말씀이 태초부터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율법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사도 바울이 말한 ‘마음에 새긴 율법’이 문자가 없던 태초에 아담이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만드는 율법과 함께 창조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있고, 양심을 따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처럼 이방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하는 율법이 새겨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를 도입하는 특별계시가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 되므로 성경의 더 큰 가르침에 완전히 반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 2:14)

로마서의 바로 앞 구절을 보면, 바울이 말한 ‘마음에 새긴 율법’이란 선과 악에 관한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코 순종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만드는 법규가 아담과 후손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생을 가지지 못했던 아담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마음에 새겨진 법규, 즉 영원한 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율법이 태초부터 존재했고, 아담은 그것을 지킬 능력을 받았음에도 지키지 않아 저주받았고, 그 법규가 훗날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모습으로 기록되었다는 웨민고백 19-2의 가르침은 성경과 무관한 주장이다. 성경과 무관한 주장이면서 동시에 장로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성경 다음으로 높은 권위를 행사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와도 부딪힌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 (기독교강요, 1.7.1.)

영생도 없이 창조된 아담을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고 영생을 가지게 만드는 율법이 태초부터 아담과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상은 칼빈의 신학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칼빈도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요 7:19)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17절에서 말한 것 같이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400년 후에 도입되었다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 ...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기독교강요, 2.7.2.)

칼빈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 의의 기준이 되는 율법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나중에 왔다고 가르쳤다.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기독교강요, 3.11.3)

칼빈에게서 태초에 아담이 영생 얻기 위해 지켰어야 할 완전한 의의 기준으로서의 법규(율법) 개념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칼빈은 이와 같이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의를 일치시키지 않고 대신에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의 의를 연결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기독교강요>에서 볼 수 없는 행위언약 개념은 어떻게 웨민고백서에 부당하게 삽입되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함께 웨민고백서 작업을 했던 회중파 청교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른 요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행위언약 개념은 회중파 청교도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가 처음으로 작성하여 도입했다.

다음의 퍼킨스의 행위언약에 대한 말을 보면 웨민고백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조건 하에서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한 인간과의 계약이다. 이 언약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약속과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약속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이행하면 당신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맹세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약속은 그가 하나님께 충성을 서약하고 그들 사이의 조건을 이행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 The Works, vol 1, 32.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47)

행위언약은 완전 순종을 조건으로 만들어진 언약이고, 이 조건은 윤리법으로 표현된다. 윤리법은 인간에게 그의 본질과 행동에서 완전한 순종을 명령하는 하나님 말씀의 부분이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금한다 ... 율법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법과 그리고 순종과 결합되어 있는 조건이다. 그 조건은 율법을 완성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고,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다십계명은 율법의 축소판이요 행위언약이다.”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 The Works, vol 1, 32.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48)

한국의 장로교 목회자들은 웨민고백서의 내용의 토씨 하나도 의심치 말고 그대로 믿고 계승해야 한다는 큰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이단사역하는 사람들은 장로교 목사가 웨민고백서의 내용과 한 글자라도 다르게 말하면 눈을 부라리고 이단 시비를 만들려고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목사 안수받을 때 웨민고백서의 내용을 믿고 지키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웨민고백서를 중시하고 그 앞에서 선서하게 한 우리의 선배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의도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너무 방대하니 분량이 짧은 웨민고백을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웨민고백서의 내용 중에 미진한 부분을 성경과 <기독교강요>에 비추어서 다시 점검하여 후세의 장로교회가 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만드는 일을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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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 2019-10-04 16:05:52
바울도 칼빈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이 학문적으로만 신학을 논하고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설명하니까 기독교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강요를 다시 깊이 연구하여 앞으로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장로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요셉 2019-10-04 00:07:06
God promised life for keeping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하기로 약속 ) 하셨다고 번역 하는게...? 한국의 번역본 들은 (생명을 약속하셨으며)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life for keeping 영원한 삶 ,영생 으로 번역 될수 있나요?

김리훈 2019-10-03 22:51:02
너무 좋은 글 입니다. 저도 5 년전에 기독교 강요를 다 읽어 보았는데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장로교 교인들 중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 본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것입니다. 바라건대 그 책을 쉽게 번역하여 보급했으면 좋겠습니다. 장로교인 이라면 ‘기독교 강요’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장로교회의 정치적인 면을 무시하고 회중교회의 정치를 따라감으로 노회나 총회를 무시하고 각 지역 교회 중심으로 나아가다 보니 교회가 목사의 소유물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 결과 교회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장로교회 라면 그 교회의 소유까지 노회나 총회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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