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교수, 악(惡)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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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교수, 악(惡)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고뇌
  • 조덕영
  • 승인 2019.10.02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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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속의 악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을 허락하신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주로 철학의 관점에서 신정론(神正論) 문제를 처음 다루었으나 악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의 부분은 주로 섭리론(攝理論)에서 나타났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은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천지와 모든 피조물들을 붙드시며 잎사귀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과 식수, 건강과 병, 풍부와 가난 등 모든 것들을 우연이 아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여 악도 창조주의 섭리 속에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본 악

어거스틴은 악한 사건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유를 잘못 오용한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도 주권을 사용하시며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것들로부터 선한 것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 어거스틴이 보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악은 결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악도 결국 이상스러운 괴물이 아니라 비존재(non esse)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이해하였다.

악은 어떤 독자적 실체성(reality)이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하나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악에 대한 책임을 결코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다. 악은 허용하도록 놔두신 것일 뿐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는 없다고 본다. 악은 단지 선을 상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악은 더 큰 선(善)을 위한 창조의 한 부분이다.

문제는 악에 대한 이 같은 입장은 도덕적 악에 대해서는 일부 설명이 가능하나 자연적 악에 대해서는 논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악은 실재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핍의 원인에 속한다. 결국 이 같은 악의 근본 원인은 자유의지를 잘못 오용한 인간의 책임 안에서 생겨난다. 이 같은 도덕적 악에 대한 설명은 자연의 물리적 악에 대한 설명에 근본적 난제를 제공한다.

존 힉(John Hick)은 자신의 책 『악과 사랑의 하나님』(Evil and the God of Love)에서 어거스틴적인 것과 구분하여 악을 영혼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과정으로 간주한 이레네우스(Irenaeus)적인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레네우스적 관점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을 모두 창조 단계의 과정으로 보게 된다.
 

루터의 십자가 신정론

신학은 철학자들의 물음에 주로 ‘십자가’의 신정론으로 나아간다. 루터는 늘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세상적 사변의 한계를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 인식을 드러낸다. 루터는 사탄 속에서도 일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악과 고난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유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가면(Verba Dei)으로 풀이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고유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낯선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루터의 논증에도 딜레마가 있다. 마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처럼 “결국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닌 가”라는 고민이다.
 

섭리 속에서 악의 문제를 본 칼빈

어거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었을 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것,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참 자유를 가지는 것은 모두 반드시 섭리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최고의 축복이다. 칼빈에게 있어 섭리론은 예정론과 동일한 실천적 목적을 가지는 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성급한 확신을 벗겨내고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수백 가지의 위험을 확신과 용기로 대처하게 한다.

모든 피조물을 변함없이 붙드시고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동일한 비를 내리시며(마 5:45)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판의 백합화를 돌보시며(마 6:26-30)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신 분(마 10:30)께서 하물며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칼빈의 견해는 어거스틴보다 자연적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 조금 진전된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악의 근원에 대한 신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몰트만이 본 악의 문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 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뇌인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내며,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한다.

하지만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문제는 몰트만에게 있어서도 난제였다. 

몰트만적 견해는 신정론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과 죽음조차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악은 당연히 사라진다. 어찌 보면 악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더라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것을 미루어 놓으면 해결될 듯 보이던 것이 지옥의 영벌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칼 바르트의 신정론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정론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치명적 결함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위에 모든 것을 의지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볼 때 모든 사건이 모두 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스토아적 개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 의지로 보았다.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 사건을 통할 때 악의 문제조차 해결의 근원을 찾게 된다. 그렇게 해서 바르트는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사악한 신’의 선포자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실존적 피조물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기 마련이다. 바르트는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하였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문제로 제한하려는 관점을 저지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답게 섭리론을 재정립하면서 악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보편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다운 새로운 접근인 동시에 악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초월적 해석의 프레임에 자신의 생각을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을 가지게 한다.
 

나가면서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해석적 고뇌는 오늘날 세상이 보여주는 온갖 혼란과 모순 속에서, 그와 더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주와 생명과 믿음의 절묘한 삼중창 안에서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모든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만만치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케 만든다. 하지만 낙심은 금물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비장한 심정으로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했다. 각각의 자기 짐은 당당하게 져야한다(갈 6:5).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다(갈 6:9).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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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n 2019-10-22 16:03:10
정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 수 없다라는 갸륵한(?) 생각때문에 타락 후 선택이 개혁신학 안에서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과 무관한 일로 간주하고, 악마를 하나님의 종으로 보지 않는다면 악마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 아닐까요.
단지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가 맞냐 아니냐의 논쟁을 이끌어 간다면 답이 나올 수 없는데도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갖혀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다른 오류는 죄의 결과는 고난이라는 주장입니다. 고난은 교육과 단련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런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적 관점의 선악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풀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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