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성경에 관심이 많은 30살의 청년입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목사님의 글을 보고 성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이렇게 메일을 적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목사님의 '자동성화론' 반박에 대한 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화를 더 깊이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결단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인격과 행위를 더 지배하셔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면 성화는 더 깊어집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성화를 추구하면 수박껍질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을 얻고 유지하면, 우리의 속사람은 더욱 더 깊이 변하므로 더 깊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직 믿음과 성령의 은혜을 강조한다고 ‘자동성화론’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말하는 진리의 사람을 함부로 자동성화론자라고 말하는 분들은 이 글을 잘 이해하여 다시는 성화에 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망령된 말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칭의도 오로지 하나님의 일이고 성화도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의 공로가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간혹 우리의 열심과 공로가 될 수도 있지 않나요? ​하나님이 다 작정하시고 예정했는데 우리가 왜 기도해야만 하는지 이 부분에서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 '성령이 충만해지면' 우리 내면이 자연스레 성화되어, 육신적 일에 대해 경멸을 느껴 사회적 책임까지도 다하게 되는 것이 맞는지요? 바쁘시지만 혹시 답변해주실 수 있으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보내주신 질문에 대해서 감드립니다. 주신 말씀을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본질적으로 성화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저의 주장에 기꺼이 동의하신다는 것, 또 하나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저의 주장에 동의하시지만, 그 속에도 인간의 노력, 즉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행위가 사람의 노력이고 공로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군요. 하나씩 다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성화와 성령의 사역에 대해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의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오로지 구원받은 사람이 힘써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특히 천주교가 말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를 범하면 칭의도 박탈되고 구원도 박탈된다고 하였습니다. 천주교의 칭의-구원 신학은 도덕적 칭의론, 행위구원론, 성화구원 사상입니다. 가장 중시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결단입니다. 천주교의 신학을 지배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 기회가 왔을 때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여 예수를 믿어 구원을 시작시키고, 이후 인간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성화를 진전시킴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교개혁 신학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택하심의 은혜 안에서 예수 믿게하시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음이 그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연합을 이루어 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이 행한 일로 간주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서 죄가 사하여 집니다. 죄가 사하여 짐이 곧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실제적 사건이 아니고 '법정적 사건', 즉 '법정적 칭의'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이 죄의 책임에서 사면되었다고 선언하심이 다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실질적으로 거룩해지지 않았을지라도 예수 믿음으로 인하여 법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영구하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사함과 하나님의 의가 별도로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계명 순종으로부터,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쓸모없는 사변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흠 없으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과 피로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완전하게 배상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서 죄에 대한 책임의 떠나가는 것이 곧 죄인에게 영생의 자격과 권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직 죄 없으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칭의를 얻는 방법에 관해서 종교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회복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가르치는 칭의는 자격없는 죄인이 오직 예수 믿음으로 얻는 법정적 칭의이지, 죄인이 실제로 율법의 선행을 몸에 익혀서 얻는 실질적 칭의가 아닙니다. 종교개혁 칭의 신학은 매우 성경적이고 훌륭합니다.

그러나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여전히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고 결단하고 각오하여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도 구원받은 자는 죽을 때가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만 강조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고, 성화는 사람이 스스로 싸워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아주 강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와 싸워서 만들어 가는 성화는 진정한 성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화는 죄인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약화됨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삶의 변화입니다. 속사람이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시작하니 그 사람의 삶에서도 선한 행실이 나타나는 것이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성화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성화를 강조해야 합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결단하여 만들어 내는 성화는 오래 가지도 못하고, 다른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승려들의 육신의 선행이 기독교 목회자들의 육신의 선행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화는 죄의 지배에서 해방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성화가 아닙니다.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성화, 즉 복음의 능력으로부터 시작되는 성화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권세가 그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때문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그 사람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이유는 믿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그리스도와 그 사람이 영적으로 연합됨으로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에 대해서는 잘 가르쳤으나, 성화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많이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개혁신학 한다고 자랑하는 많은 어설픈 목회자들이 여전히 천주교의 성화 사상을 정설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성화 신학으로부터 종교개혁 교회들이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합니다. 어중간하게 개혁주의 한다는 많은 목회자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말하면 무지한 그 사람들은 자동성화론이라고 비방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잠기는 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선포되는 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이것을 중시하지 않고 사람이 노력하고 결단하여 만들어내는 성화는 진정한 성화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변화는 잠시이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죄인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납니다.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가 우리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화를 위해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접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성화를 위한 인간의 의지에 대해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시하고 기도하는 것이 결국 사람의 행위이고, 또한 성화를 위한 인간의 공로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고의 인격이신 성령의 역사하심과 사람의 인격 사이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인격적이신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멸시하고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쾌락을 위해 죄를 범하려는 마음을 용납하여 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발목을 분지르시어 못 가도록 막으시지는 않습니다. 누가 죄를 지으려고 차에 시동을 걸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엔진이 폭발하거나 네 바퀴가 모두 못에 찔려서 주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고도의 인격적 존재로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자신도 지고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고 또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이 허용하고 용납함으로 이루어지고, 회개도 우리의 인격의 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범하기 싫은 죄를 비인격적으로 저지르고, 하기 싫은 회개를 비인격적으로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인격이 즐거이 가담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도 못합니다. 죄를 짖는 일이나, 죄를 물리치는 일이나, 회개하는 일 모두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더 성화되어지지 위해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말씀대로 변화되고 살아가기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리하도록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인격이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더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고 오직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면,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한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1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거룩한 소원과 욕구를 주시는데도 인간이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거부하여 성경읽기와 기도를 멀리하여 실행하지 않으면, 결국 지고의 인격이신 성령은 우리에게 역사하시기를 멈추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격적인 역사하심이 그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간혹 우리의 열심과 공로가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질문자)

질문하신 내용은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소욕과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순종)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 사이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사람의 의지와 결단을 더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안주의로 기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 안에 자리하는 새로운 거룩한 의지와 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이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의지와 지성과 인격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거듭난 자들에게는 더 깊은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공급받고 기도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식이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사를 따라 행하는 것이 사람의 공로일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성경적으로 성화되어가는 사람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바람직한 책임성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에도 지극히 동의합니다. 저도 요즘 이 문제를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많은 분들(자칭 청교도 개혁주의자들 등)이 극단적인 우파 성향을 보이면서 건전한 신앙과 신앙인격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이전의 인간의 보편 상식에도 맞지 않는 행실을 보입니다. 과연 그들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면, 그렇게 역사와 사회에 대해 비상식적이고, 그렇게 심각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성화는 죄인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80년대 광주에 북한 군이 침투하여 사회폭동을 야기했으므로, 그때 죽은 사람들과 그 유족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까요? 과연 예수님이 장기간 군사정권의 지배로 신음하였던 이 나라에 또 다시 군인들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등장하였던 80년대의 상황을 지지하셨을까요? 성령의 성화는 그 사람의 역사의식, 교회관, 정치적 성향 등에서도 건전한 상식과 판단을 가지게 만듭니다. 

좋은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귀한 질문 주시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 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