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1)


미국에선 D. L. Moody와 근본주의 자들의 역할로 1920년대 초반 까지도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1883년 부터 1887년 까지 ‘나이아가라 예언 사경회’를 열어 보수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향해 다음의 근본주의 5대 교리를 선포하였다.

1) 성서무오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4) 기적의 역사성

5) 육체적 부활과 재림

1910년부터 1915년 까지 ‘The Fundamentals’라는 소책자 운동을 통하여 근본주의 신학 5대 교리를 변증하는 홍보하면서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4년의 PCUSA의 Auburn 선언은 ‘성서무오설은 해로운 교리’라고 결정하고, 1925년 테네시에서 열린 스콥스 재판(원숭이 재판)에서 창조론이 진화론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며, 1929년 PCUSA 교단 목사들을 양성하였던 프린스턴 신학교도 좌경화 되어 그레이샴 메이천을 중심으로 보수진영의 교수들이 프린스턴 신학과 분리하여 Philadelphia에 Westminster 신학교를 세웠다. 결국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근본주의 진영의 2세대들이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1,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생긴 빈곤, 고아, 구제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 교회가 참여할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칼 멕킨타이어와 헤롤드 오켕가를 중심으로 미국 복음주의 협회(NAE)를 1940년대 초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은사 지속론’을 주장하는 오순절 교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분열되었다. 오순절주의를 반대하는 칼 멕킨타이어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미국 근본주의 협회를 만들었고, 오순절주의를 수용한 헤롤드 오켕가와 칼 헨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복음주의 협회(NAE)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1947년에 구 프린스턴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목표로 LA에 Fuller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헤롤드 오켕가, 빌리 그래함, 그리고 칼 헨리 등 복음주의 group들은 자기들과 칼 멕킨타이어, 밥 죤스 등 근본주의 무리들과 구분하기 위해 자기들을 신 복음주의자(Neo-Evangelicals)들로 불렀으며, 나중에는 그냥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신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의 신학은 본래 부터 D. L. Moody가 조직한 ‘Student Volunteer Movements’에서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 즉 북장로교(PCUSA)의 언더우드와 감리교(UMC)의 아펜셀러에 의해 19세기 말에 형성되었으므로 신앙의 색채는 보수적이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1920년대까지는 보수적이었고 복음적이었지만, 부흥운동을 환영하기 시작했고 목회자 수급정책에 있어서 감리교, 침례교와 유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격한 Calvin주의를 탈피하였고 타 교파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가졌고, 세대주의 종말관을 그대로 수용했다.

1930년대 들어 김재준 목사,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이 좌경화된 1929년 이후 프린스턴 신학에서 수학한 한경직을 비롯한 여러 목사들에 의해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도입되었다. 이에 대해 맞서 싸운 분이 구 프린스턴 신학에서 수학하신 박형룡 박사님이었다. 박형룡 박사에 의해 한국 장로교 신학이 upgrade 되었고, 한국 보수신학의 초석이 세워졌고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와 침례교회에도 보수신앙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는 자유주의의 영향, 신사참배 문제, 그리고 WCC가입 문제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1970년에 한국 신학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서 1940년대에 일어났던 신복음주의가 한국에는 1970년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1973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부흥집회, 1974년에 있었던 ‘엑스플로74’등 여의도 대형집회 들을 통해서 ‘영접교리’가 특히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sensation을 일으키면서 ‘알미니안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의 기성교회에서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십자가의 복음과 단상에서 구원을 초청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강단 앞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접하였다.
 

'엑스플로 74'의 실제 모습


1970년대 신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대학 campus를 중심으로 한 대학 선교 단체들, CCC, UBF, 네비게이토 등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대중집회, 또 한편으로는 대학생 선교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1970년대 한국에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신 복음주의 자들이 소개한 복음의 내용이 전통적으로 장로교가 강세인 한국 교회에 충격적 이었다. 영접, 회심, 구원의 확신 등이 생소 했고, 십자가 복음 설교가 비교적 약했던 한국교회에 ‘영접과 구원의 확신’을 강조함으로 내가 예수를 영접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미니우스주의와 일치하는 신학노선이었다. 그러므로 대학의 선교단체 출신들은 십자가 복음이 약한 기성교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제자훈련의 바람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 여의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대형집회를 통해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하면서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자리 잡았다. 특히 조용기 목사는 3박자 축복과 은사 집회를 통해 전무후무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고 기복신앙과 번영의 신학의 원조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제외하고는 대형교회가 그다지 popular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할 것은 미국의 신복음주의는 ‘은사지속론’을 수용했으므로 그의 영향에 편승해서 순복음교회의 신비주의와 번영 신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민들에게 호응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1970년대 미국의 신복음주의가 한국에 가져온 알미니안이란 무엇인가? 알미니안은 야코부스 알미니우스(1560-1609)와 그를 따르는 학자들의 신학이며 또한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의 신학이기도 하고, 항론서의 주요 요지이기도 하다. 알미니우스는 네덜란드 아우드 바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알미니우스가 4살 되었을 때 칼빈은 소천했다. 그는 제네바로 유학 가서 칼빈의 직속 제자인 베자를 만나 정통 칼빈주의를 수학했다. 카톨릭 신학자요 법률가인 디르크 쿠른 헤르트가 칼빈의 이중예정을 공격할 때, 베자가 알미니우스에게 칼빈의 예정론을 변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알미니우스가 쿠른헤르트를 논박하기 위해 연구중 쿠른헤르트의 사상에 넘어가 전향하여 칼빈주의의 주요 논적이 되었다.

그는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칼빈주의에 대항하는 항론서를 제출했다. 알미니우스와 칼빈의 또 다른 제자인 프란시스 고마루스가 논쟁을 하던 중 1609년 알미니우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1610년 알미니우스 추종자들이 항론서를 네덜란드 의회에 제출하고 1611년 칼빈주의자들이 반항론서를 의회에 제출함으로써 신학 논쟁에서 정치 쟁점으로 발전하였고, 칼빈파와 알미니우스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결국 반항론파(칼빈파)가 전쟁에서 승리했고 항론파(알미니우스파)를 이끌었던 올덴바르네펠트는 처형되었다.

승리한 반항론파(칼빈파)들이 도르트에서 총회(1618-1619)를 개최했다. 도르트 총회는 세계 공의회 수준의 보편적 참여로 이루어 졌으며 항론파는 위축되고, 반항론파는 압도하는 상황에서 총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5개항의 항론서(알미니안)에 맞서는 신조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칼빈주의의 TULIP 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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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장로는 Nevada주의 Las Vegas에 거주하며, 갈보리장로교회(협동장로)에 출석한다. 직업은 치과의사이고, 라스베가스의 '김리훈 보철치과'의 원장이다. 남가주대학(USC), 캘리포니아대학(UCLA, 치의학박사), 미시간대학(U of M, 보철전문의 석사)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미주 총신(M.Div)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