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조직신학은 성경계시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통일 종합하는 신학적 작업으로 여긴다. 그러나 교의신학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할 때 교회의 교리들의 안내를 따라 작업을 한다. 이 교리들은 고대교회의 기본 교리들이다. 그러나 체계화 작업을 할 때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credo)을 참조하고 조명을 받는다.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은 고대교회의 교리들을 수납함과 동시에 구원 얻는 길에 특히 강조를 두었다. 이 신앙고백들은 고대교회의 교리들과 같은 구속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여도 교리적 성격을 갖는다. 루터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았다. 개혁교회는 칭의교리를 근본교리로 받지만 성경의 권위를 더 중시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고대교회의 교리들은 보편교회의 승인을 얻었으므로 교리로서의 확실성을 지닌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근본진리를 뜻한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진리를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교회가 신앙고백 형식으로 표현한 명제이다. 성경에서 유래하고 성경에 근거한 근본진리를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교회 존립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교리이다. 그러므로 공교회가 교리를 교회 존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확정하였다. 교회의 복음이해가 교리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리는 교회의 생명의 표현이므로 교회는 교리를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 모든 교회가 교리 이해로 들어가야 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즉 교리는 처음 그 교리를 생산한 교회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대교회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가 교회될 수 있다.

교의신학자는 교리에 의거하여 신학한다. 교회의 교리에 의거해서 신학하지 않고 당대의 주된 사상을 의지하여 신학하면 교회의 신학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이기를 그치게 하는 문화의 변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이 교회의 신학이 되려면 교회의 교리에 부착해야 한다. 교리에 부착하여 신학하는 것은 교리가 진술하는 내용대로 신학하는 것을 말한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고 성경에 근거하여 공식화되었으므로 신적권위를 갖는다. 교리의 공식화는 교회가 하였지만 성경에 근거하고 도출되었다. 성경계시의 내용 곧 구원진리를 공식화한 것이므로 교리는 성경적인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교리의 지도를 따라 신학하고 임의로 교리를 해석하면 안 된다.

교회사는 성경 해석사이다. 그것은 바로 교리 해석의 역사였다. 교의신학자는 교리를 해석하는 일을 하는데 자의적인 해석을 하면 안 된다. 종교개혁은 18세기 이래 시대정신을 따라 성경을 해석해 왔는데 교리도 마찬가지로 시대정신을 따라 해석하였다. 시대정신을 따라 해석하는 것은 교리의 변형이고 무효화이다. 교의신학자와 성경학자들은 교리를 순종해야 하고 그 가르침대로 신학해야 한다. 교리 해석은 교리의 바른 이해의 작업이며, 시대정신에 맞추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될 수 없다.

교의신학자는 교리가 초대 그리스도교가 나타내는 구속종교의 순수한 원형에 상응하는지를 살피는 일을 한다. 즉 교리의 성경적 성경 곧 사도적 성경의 확증이 중요하다. 사도적 확증은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확실하게 근거하고 있는지와 그 가르침대로 표현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교리를 검증할 수 있는 근거는 교리 구성에 사도적 가르침과는 다른 성경 외적 요소들이 들어있는지를 살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리공식화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살피는 것은 교리를 성경에 근거하여 검증하는 것이다. 그 검증은 교리를 확증하는 것이고 새롭게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므로 한 개인의 일이 아니고 전 교회의 일이다. 성령의 인도와 조명에 의해 교회가 구원진리를 이해하여 교리를 확정하였으므로 계시진리의 이해가 깊어짐으로 교리의 수정과 확장이 가능하다. 교리의 수정 혹은 확장은 교리의 변형이 아니고 그 교리에 들어 있는 내용을 성경대로 밝히는 것을 말한다.

각 교리는 일정한 견지에서 구속종교로서 그리스도교를 전체로 표현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론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전체를 대변한다. 또 그리스도론 교리도 구원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전부 드러낸다. 이신칭의 교리는 구원 획득의 방식에 있어서 어떤 교회가 은혜의 종교인지를 드러낸다. 즉 신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교회여야 바른 그리스도교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신학할 때에 교리와 표준에 의거해서 신학한다. 처음부터 새롭게 신학을 시작하지 않는다. 교리가 신학함에 있어서 원규범인 성경 옆에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으로 역사한다. 이 규범에 비추어 성경의 진리들을 신앙 내용으로 구성한다. 이 구성은 성경 권위에 근거하였으므로 교리가 권위적 특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도 교의신학이 성경신학과 구분된다.

종교개혁의 신경들 외에 개신교회는 니카야(325)-큰스탄티노폴리스(381) 신경과 칼케톤 신경(451)을 표준으로 받는다. 니카야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의 표준으로 받고 칼케톤 신경은 그리스도론 교리의 표준으로 받는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에게서 출래뿐만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출래하심 곧 아버지와 아들에게서의 출래를 받는다. 아다나시오스 신경과 톨레도 공의회에 의해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심을 바른 신학으로 받는다.

종교개혁교회는 니카야 신경부터 7대 에쿠메니칼 공회의의 결정을 신경으로 받는다. 그러나 제 2 니카야 공회의는 성상숭배를 결정하여 성경에 모순되므로 787 니카야 공회의의 결정은 거부한다. 또 사도신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받는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공의회에서 공식화된 것이 아니므로 에큐메니칼 신경으로서의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신경은 공의회가 결정한 신경이 아니므로 서방교회만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교리에 기초하여 서 있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의 선언처럼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이 가톨릭 신앙 곧 삼위일체 교리를 신실하고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세계의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또 교회의 설립과 인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그 내적 존재에 있어서는 세 위격으로 계신다.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의 관계로서 하나의 유일한 실체가 세 위격으로 계시는데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다.

이렇게 계심은 섭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계신다. 세 위격은 각각 한 동일 실체를 자신 안에 전부를 가지고 실체에 관한 한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각 위격은 전 실체를 가지지만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위격과 실체는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고, 위격들도 상호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고, 위격들도 상호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는 언제나 한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세 위격은 한 동일 실체이고 그 동일 실체는 분할불가하다. 그리하여 한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고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도 유래하지 않으시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만 출생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 이 삼위일체에 선후나 대소가 없고 세 위격은 자신에게 동등하고 영원하다. 삼위일체는 영광과 권능과 의지가 하나이고 동일하다.

두 번째 근본 교리는 그리스도론 교리 곧 하나님의 성육신 교리이다.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인 아들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성육신하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시다. 사람이 되실 때 성령으로 성육신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그가 참 사람이 되실 때 성령으로 성육신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가 참 사람이 되심에 있어서 심에 있어서 합리적 영혼과 육체를 취하사 한 그리스도 독생하신 아들이 되시되, 두 본성에 한 인격으로 계시지만 두 본성은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한 인격을 이루시사 한 아들과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이다. 이 교리는 신약의 구원을 바르게 제시하므로 그리스도교를 신약의 그리스도교가 되게 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해야 구원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믿기만 하므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의를 획득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 곧 생존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 구원 얻음은 신약과 구약에 의해 다 배제된다.

사람은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가하고 부당한 일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다 이루셨으므로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선행과 율법 준수로 구원에 이를 수가 전혀 없다. 이 진리를 부착하면 확실한 구원에 이르므로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는 교리이다.

종교개혁 칭의교리도 그리스도교를 은혜의 종교와 자력종교로 결정하는 표준으로 역사한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면 완전한 구원에 이르고, 인간의 공로가 가입하면 완전한 구원종교이기보다는 율법주의 종교에 귀결되고 만다.

우리는 이 표준에 의하여 신학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되는 여부는 그리스도의 신성 인정 여부에 의존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이 되지 못하고 자연주의 종교로 전락한다. 18세기 이후 특히 칸트 이후의 신학은 삼위일체 교리의 부정과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의 부정으로 재구성되어졌다. 20세기의 신학들도 다 두 근본 교리의 부정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문화적 변종이다.

그러므로 교리가 신학함에 있어서 규범으로 역사한다. 교리가 신학을 그리스도교 신학이 되게 결정하거나 배척하는 표준이다. 교리의 지도를 따라 신학하면 그 신학은 바른 그리스도교 신학이 되고 교리를 벗어나면 자연종교의 종교론이 된다.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92-98)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