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훈 장로(미국 라스베가스 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남자를 먼저 창조 하셨고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고전11:3; 고전 11:7-9; 엡5:23). 예수님이 자기의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자는 질그릇 같이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엡 5:21-25).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할 때 (관계 속에서 신실할 때) 가정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고, 그 질서의 결과는 화평이다. 그리하여 고전 14:32-33을 보면, 예언하는 자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써 스스로 절제하며 질서있게 예언해야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뒤에 나오는 고린도 전서 14:34-35의 말씀, 즉 교회에서의 여자의 태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령한 은사들 즉 방언이나 예언은 중구난방 식으로 하지 말고 질서 있게 하라는 뜻으로 고전 14:33은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는 교회에서의 여자의 태도에 대한 구절(고전 14:34-35)이 없으면 고전 14장은 매끄럽게 끝났다고 함으로써 이 구절은 후대에 어느 사람이 삽입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 그리고 사도바울의 복음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고전 11:5을 언급함으로써 “여자도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갈 3:28을 언급하면서 복음 안에서는 인종차별, 신분차별, 남녀차별 없음을 선포하면서 교회에서의 여자의 안수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필자는 김세윤 교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물론 고전 11:5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여자 교인들도 예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공적인 집회 시간에도 예언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도나 예언을 하려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하였다.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남자라는 눈에 보이는 머리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순복의 표시로 수건을 써야만 했다.

고린도 교회 당시에 여인들이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기도나 예언을 하였지만, 그것이 지금의 공적 설교인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만약 고전 14:34-35의 구절이 없다면, 필자도 김세윤 교수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구절을 씀으로 여자의 공적인 집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셨듯이(빌 2:6-8) 여자들은 집에서나(엡 5:22) 교회에서나(딤전 2:11-12) 남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의 질서를 위한 것이지(딤전 2:11-15)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 이시니라(고전 14:33)”의 말씀은 창조의 질서적인 면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질서가 생기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가 shalom이기 때문이다.

고전 14:34의 “모든 성도의 교회”는 1세기 당시의 고린도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모든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당시의 교회의 원리가 지금 현시대의 교회의 원리에 적용이 안 된다는 말인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부정하는 자들이 아닌가? 고전 11:5의 말씀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 예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하는 사용의 규칙을 말한 뒤에(고전 14:26-33), 구약말씀(창 3:16)까지 인용함으로써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을 보라! 얼마나 논리적인지. 고전 11:5을 말하고 고전 14:26-33을 말한 뒤에 고전 14:34-35을 말하고 있다. 즉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여자들이 예언하는 자들이 있었고 예언을 하려면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였고(고전 11:5), 예언을 하려면 질서있게 하라고 하였고(고전 14:26-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만약 고전 14:34-35의 말씀이 고전 11:5 보다 순서적으로 먼저 쓰였다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또한 딤전 2:11-15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여자의 가르치는 것(강도권)과 남자를 다스리는 것(치리권)을 금하고 있는데, 그것은 창조의 질서와 여자 타락의 순서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전 14:34-35의 말씀과 딤전 2:11-15의 말씀을 종합하여 보면 교회에서의 여자의 강도권(목사)과 치리권(장로), 즉 교회에서의 여자 안수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선악과 명령을 아담이 어긴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법이다. 이를 위해 우리 믿음(개혁신앙)의 조상들은 얼마나 고전분투 하였는가! 우리가 현시대에 깊이 숙고할 문제이다.

그러면 감세윤 교수가 강조하는 갈 3:28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세윤 교수는 갈 3:28을 언급하면서 복음 안에서 인종, 남녀, 신분 차이가 없어졌음으로 여자안수는 가능하다고 하였다. 물론 복음으로 인해 노비와 여자의 인권이 향상 되었으며 그로인해 노예제도가 철폐되었고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어 오늘날 남녀평등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갈3:28의 말씀은 남녀평등이라는 내용 보다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인종, 남녀, 신분 차별 없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Amplified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 남녀, 신분이 구원의 관점에서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물론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남녀노소 상관없이 속죄(칭의)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즉 선택받은 사람만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에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무조건적으로 선택 하시는 것이지 (unconditional election), 그 사람의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분을 보고 선택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김세윤 교수는 “남자만 안수 받는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는데 왜 여자는 안수를 받지 못하는 것인가?”하고 반문을 제기 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보아라. 열두 제자들 다 남자였다. 사도행전 6:6을 보면 일곱 집사(다 남자들 이었다)를 세운 뒤에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사도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도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았다(딤전 4:14)고 하였다. 성경 어디에도 여자가 안수 받은 적은 한 사례도 없는 것을 볼 때에 여자 안수는 현대교회가 성숙한 모습으로 가는 것(김세윤 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타락의 길로 들어가는 입문(여성 안수를 인정해 주니 동성애와 중성애까지 인정해 주는 상황에 이름)이요, 성경의 계시성과 절대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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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장로는 Nevada주의 Las Vegas에 거주하며, 갈보리장로교회(협동장로)에 출석한다. 직업은 치과의사이고, 라스베가스의 '김리훈 보철치과'의 원장이다. 남가주대학(USC), 캘리포니아대학(UCLA, 치의학박사), 미시간대학(U of M, 보철전문의 석사)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미주 총신(M.Div)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