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殿)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성품, 즉 거룩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알만하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을 그만큼 깊이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전혀 모르는 분을 사모하고 앙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호한 개념이나 사색과 논리적인 추론 때문에 얻어진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고 깨달아 알았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비춰주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묵상하고, 사색하고, 추론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아는 자식은 그가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시편22편 10절)”라는 고백을 비롯한 시편 곳곳에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다윗이 일상 가운데서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이요, 그 앎을 자신의 삶의 기초로 삶고 흔들림이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후4:8절-9절)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춰주셨기” 때문입니다(고후4:6절). 현실에 굴복하는 것은 현실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힘이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현실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현실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 가운데서도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선택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절대 권력자인 느브갓네살의 명령을 따라서 사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두 눈 질끈 감고 삼 년만 보내면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 망할 것 같지 않은 바벨론 제국.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유다 나라의 멸망.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 모든 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 가운데서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포로로 함께 끌려간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느브갓네살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방이 우겨 쌈을 당한 것과 같은 바벨론 제국의 억압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그 현실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복음이요, 믿음의 절대적인 기초였습니다(이사야 52:7절). 통치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고, 상대화시키시는 하나님. 그들은 그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시편 25편 12절).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기에 “뜻을 정하여”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

훗날 다니엘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다니엘 11:32절).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 모든 현실 속에서 용맹을 발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묵묵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그들은 세상의 헛된 욕망과 야망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알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절)라는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게 될 것입니다. 읽고, 듣고, 배우고, 익힌 말씀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게 사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알려고 노력할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모하고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심령 속에서부터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殿)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편 84편 10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셨다면 그 같으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엎드림이 의무와 책임이기 이전에 특권이요 감격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대신할 수 없으며,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행전4:19절-20절).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시편 27:4절, 공동번역). 다윗의 이 기도가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품고 살아야 할 유일한 기도 제목이요 소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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