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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조나단 에드워즈 컨퍼런스에 많이 참석하기시 바랍니다.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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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04  1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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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착하고 선한 교회지도자였습니다. 에드워즈처럼 자기의 종교와 자기의 신 앞에서 진실하고 착하고 정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미국의 종교의 분야뿐 아니라 철학과 다양한 분야에 큰 족적과 영향을 남긴 위대한 인간의 표상이었습니다.

미국은 1600년대부터 영국과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에 의해 빠르게 성장한 국가이므로 반 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처럼 오랜 역사와 다양한 사상가들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학문과 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미국인을 더 부각시키고 환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미국의 그런 배경으로 인해 더 탁월한 지성의 거장으로 부각된 면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교회사 최고의 거장으로, 칼빈과 어거스틴을 능가하는 개혁신학의 최고의 석학으로 포장된 것은 미국의 그런 배경보다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에드워즈처럼 천재적 지성의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철학, 과학, 생물학, 신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는 천부적인 지성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동시에 관상기도 유형의 신비주의, 이상한 성령의 장난을 일으키는 위험한 종교성도 보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결코 단순한 인물이 아니고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를 가진 천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드워즈가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이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영향에 필적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전통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었고 바울이 전파한 종교이지만, 현대의 기독교는 에드워즈가 만들고 로이드 존스가 전파한 종교라고도 말합니다. 그 정도로 에드워즈의 영향은 크고 막강합니다.

금년에도 한국에서 에드워즈 신학 세미나가 열린다고 합니다. 에드워즈의 장단점이 바르게 전파되는지 여러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에드워드 숭배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에 의해 바울의 정통 신학은 약화되고, 에드워즈의 자의적인 신비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는 한국 교회를 미치도록 열광하게 만들었고, 또한 아무도 느끼지 못하게 한국 교회가 신비주의, 열광주의로 가는 길을 연 사람입니다.  

쥐약은 99%  맛있는 쌀밥에 단 1%의 작은 분량의 독으로 만듭니다. 그 99%의 쌀밥을 먹는 쥐는 온전하게 살지 못합니다. 에드워즈에게도 99% 최상급 지식들과 교훈들이 넘칩니다. 동시에 사탄이 교회를 성경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에 충분한 1%의 독이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경건하고 성경적인 신앙인의 표상이라는 그 동안의 이미지는 철저하게 조작된 속임수입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적으로 경건한 사람이라기보다, 매우 영성적인 사람이었고, 아주 신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성'은 성경 외에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없다는 칼빈의 개혁신학으로 설명할 수없는 직통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성향입니다. 특별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일반계시로만 하나님을 연구하는 신학이 하나님을 물질의 반대의 개념으로 상정하면서 사용한 말이 영성인데, 신비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체험되는 하나님 현상은 분명히 있으나, 성경과 개혁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열광주의 또는 이단적인 요소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에드워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지 않는 에드워즈 컨퍼런스는 그 동안 에드워즈를 통해 자신의 명성과 성공을 누리면서 진리와 복음을 교묘하게 압박하는데 사용된 미혹된 사람들의 축제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1. 에드워즈의 묵상 신비주의

에드워즈는 묵상은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건전한 묵상이 아니었습니다. 에드워즈의 묵상은 말씀을 보내어 우리의 영혼과 삶을 지료하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신비적 묵상(이단적 영성)이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성령이 말씀과 결합되어 일하지 않고, 말씀과 분리되어 자기 단독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순간 귀신으로 판정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인 성령이 자기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보혜사 ...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6:13).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성령 그가 ...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겠기'때문 이라고(요 14:26)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요 12:50)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요 12 :49, 14:10), 우리도 복음과는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강요, 4.8.13)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고 체험하게 하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 아니고, 성령이 증거하고 설명하시는 복음 설교자의 말씀에 의해 지배된다고 칼빈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현상들을 경험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자서전에서 발견되는 다음의 내용들을 보십시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 (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166)

 “해마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종 숲 속이나 조용한 곳을 혼자서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168)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177)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180-81)

아직까지 이와 같이 에드워즈가 묵상하면서 하나님, 삼위일체, 성자의 영광을 체험하고, 수시로 하나님과 대화하였던 신비적인 행태를 성경과 개혁신학에 의거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는 용기있고 지혜로운 신학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거나, 책을 저술하는 많은 분들이 오히려 에드워즈의 그런 모습을 어거스틴과 칼빈을 능가하는 교회사 최고의 영적거장의 모습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영적거장들의 씨가 말라 버렸답니까? 개혁신학의 초석을 마련한 칼빈이 언제 기도, 묵상 등으로 하나님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영적거장의 모습이라고 가르쳤습니까? 그 동안 우리는 미혹의 영의 역사로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우둔해졌습니다. 이제라도 에드워즈를 통해 전파된 신비주의 성향이 칼빈 신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에드워즈의 회심준비론

에드워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교회에 다니고, 율법을 지키고,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회에 나오고, 특히 구제에 힘쓰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회심시켜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중생이 일어나기 전까지 죄인이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일점의 인식이나 행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성경과 개혁신학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53:2,3)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천국, 지옥에 대해 아무런 지각도 가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의 운명을 인식하거나, 영혼을 위한 선행을 행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에드워즈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에드워즈의 회심준비론을 따라 죄와 저주를 깨닫고, 겸비해지고, 그리고 성령의 회심의 체험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에드워즈의 기록을 통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 ...(중략)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지극히 분노하고 계시다는 생각, 그의 진노가 그들에게 엄청나게 두려워보이며 ...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참아 주시지 않고 당장 끊어 버리시고 ... 무서운 구덩이로 던져 버리실 커다란 위험을 인식한다."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366)

청교도 준비론에서 죄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과정 이후에는 겸비해지는 단계가 온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그들이 신뢰하곤 하던 모든 것들의 헛됨을 보게 되어 드이어 그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 (중략) 종종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어떤 성구가 그들 마음에 부딪혀와 그들의 마음이 고요해지고 조용해져서 정의로우시고 주권적인 하나님께 굴복하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완전히 맥이 빠지고 때로는 목숨조차 거의 끊겨진 것처럼 보인다." (양낙홍, 366-67)

이런 모습이 에드워즈의 부흥 사역을 통해 나타났던 신비적이고 광적인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데, 왜 사람의 육체의 기력이 빠져서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할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천상의 하나님 보좌의 계시를 접하였을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죄악된 피조물로서는 조금도 감당할 수 없는 창조주의 위엄을 경험하거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접하였으므로 나타났던 현상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하여 사람의 몸의 기력이 빠지고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지는 모습은 신사도 집회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매우 불건전한 모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성령 안에서의 안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에드워즈와 회중파 청교도들은 회심의 과정 끝에서 매우 신비적이고 감각적인 성령의 회심체험이 일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실상은 매우 불건전한 신비체험이거나, 유사종교들의 접신 체험과 거의 다르지 않았습다. 신사도 집회에서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현상을 '신적인 빛', '빛이 비치는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회중파 청도들은 이 체험을 그들의 회심준비론의 절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에드워즈가 회심준비 과정의 끝에서 벌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빛이 나타났다. 영광스러운 구속자(?)가 그의 경이롭고 충족한 은혜와 함께 그들에게 제시되었다. 종종 성경의 어떤 달콤한 초청의 말씀 속에서 말이다. 때로, 그 빛은 갑자기 나타났으나 때로는 더 점진적으로 나타나 사랑과 찬양, 기쁨과 자기 비하로 영혼을 채웠다. 그들의 마음은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구속주를 사모하게 되었으며, 그 분 앞에서 재 속에 눕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양낙홍, 367)

오순절 운동에서는 인간이 금식하고 회개하고 기도로 준비하면 제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가 온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망하면서 회심을 준비하고 사모하라는 에드워즈와 회중파 청교들의 가르침과 오순절 운동가들의 가르침이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결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애드워가 말하는 신비한 회심체험에 거짓 방언만 추가된다면, 오순절 운동의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성령의 사역으로 죽은 영혼이 중생할 때, 저렇게 신비적이고 감각적인 느낌과 감정들이 동반된다는 가르침을 성경에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에드워즈가 그것을 가르친다고 순순히 순종하면서 실제로 저런 현상을 체험했던 뉴잉글랜드의 그 사람들이 과연 불신 상태에서 진정으로 구원을 얻었던 성경적 신자들이었을까요? 이상한 영에 사로잡힌 광신자들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에드워즈 때문에 일어난 기독교의 변형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사탄이 그의 부흥을 통해 베포한 영혼의 쥐약의 독성분은 1%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 에드워즈의 성화 신비주의

에드워즈의 성화론을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성령으로 지져버리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성화가 칭의의 근거는 전혀 아니지만, 칭의를 얻는 순간부터 일평생 지속합니다. 그러나 결코 완전성화에 이르거나, 신비적인 속성적 성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미 예수 믿어 칭의를 얻은 신자에게 성령이 들어와서 기절시키고, 드러눕히고, 몸이 마비시키고, 환상을 보게하고, 황홀경에 빠지는 신비체험을 성화의 최고 경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체험을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같은 내용인데 다른 용어로 포장되는 수많은 사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령의 '신적인 빛'은 아주사 거짓 부흥을 통하여 출현한 오순절 운동의 성령세례 현상입니다. 다른 점은 아직 그 징조로 주장되어던 거짓 방언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는 에드워즈의 가르침의 전형이 나타난 것입니다.
 

4. 에드워즈의 성령의 기름부음

에드워즈는 일평생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였습니다. 에드워즈에게 부흥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란 무엇입니까?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기름부음'이 성령의 별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고 죄 용서 받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영구히 내주하시는 것을 칼빈은 '기름부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한 사람에게 기름부음은 두 번, 세 번 임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과 함께 단회적으로 영속적으로 임합니다. 성경의 말씀, 칼빈, 서철원 등의 믿을 만한 개혁신학자들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시도 때도 없이 기름부음을 추구하였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더 구하지 않는 목사들을 완악한 자들이라고 비평하고 불평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부흥의 때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언제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날 성령의 기름부음을 늘 강조하고 사모하는 빈야드-신사도 파들의 집회의 실상이 어떠합니까? 결국 그들의 영성에 중독되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성령이 임합니다. 이상한 성령에 들려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눕고, 몸이 마비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놀랍게도 에드워즈의 부흥집회에서 동일한 현상이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같은 이론을 따라 역사하는 이상한 성령, 즉 거짓 영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찬송하며 더불어 자기의 이름을 선전하고, 지식적 쾌감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런 무서운 사실들을 전혀 모르는 소경들이니다. 신사도주의를 거부한다면서 에드워드를 좋아하는 것, 에드워드를 칭송하면서 신사도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칭송하면 아주사 부흥운동, 신사도주의를 동일하게 칭송해야 정상입니다.
 

맺는 말

대체 왜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이상한 성령'에 들리는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근본적으로 에드워즈를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한 신학의 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칼빈의 정통 개혁신학을 배우고 계승하지 않은 영국의 ‘회중파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와서 결성한 회중교회의 신학 노선을 살펴야 합니다.

장로파 청교도와 신학의 출발점이 달랐던 회중파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칼빈의 신학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칼빈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신학에서 벗어난 데오도르 베자와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하여 칼빈주의를 배우고 발전시켰으나, 사실상 칼빈의 신학에서 벗어났습니다. 교회론, 칭의론, 성령론 등에서 칼빈과 많은 차이점들을 보였습니다. 베자가 칼빈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려고 노력했겠지만, 그 이후에는 칼빈 사상에서 멀어진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에드워즈의 저작들 속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인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개혁신학에서 성경과 공교회의 교리들 다음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드워즈가 살았던 1,700년대에 신학작업을 하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정한 칼빈주의 신학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회중파 청교도들은 칼빈에게서 멀리 벗어나버렸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는 반-알미니안이 자기 표지였습니다.

에드워즈의 대각성이 일어나자, 신대륙의 회중교회들은 대각성을 이단시하고 반대하는 ‘옛빛파’와 찬성하는 ‘새빛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사후 그의 제자들과 아들을 새빛파로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먼저 수용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빙크는 에드워즈의 대각성을 반대한 ‘옛빛파’를 비교적 칼빈의 신학을 가깝게 계승한 ‘장로파 청교도’로, 대각성을 찬성한 ‘새빛파’를 회중파 청교도의 후예들로 구분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신앙고백 ‘39개조’에 대항하여 함께 ‘웨민고백서’(WCF, 1646년)를 작성했지만, 장로파 청교도와 회중파 청교도는 처음부터 신학의 DNA가 달랐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이 간과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청교도가 칼빈의 신학을 따르고, 모든 청교도가 개혁주의인 것처럼 오해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에서 신비주의와 열광주의 성향이 많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2019 에드워즈 컨퍼런스에 많이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심각한 사실들이 논의되고 설명되는지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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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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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주의 2019-05-06 11:40:57

    에드워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기존의 영웅시하는 에드워즈 연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기야 우리 나라는 원래 살았을 때에는 조금 쓴 소리하다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좋은 말만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도 에드워즈에 대해 객관적인 연구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 그럴 조심이 안 보이니 안타깝습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5-04 19:13:03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어떤지 공부해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나, 최근에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The New Calvinist (신칼빈주의자) 라고 부르며 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따른다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ew_Calvinism
      저는 이 복음연합이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올해 한국에서 첫 컴퍼런스를 연다고 합니다. https://tgckorea.org/bbs/board.php?bo_table=tgck
      복음 연합 지도자들의 컴퍼런스 영상을 봤었는데, 칼빈의 TULIP을 말하면서도 변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통 칼빈주의자면 딱히 new 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게다가 존 파이퍼는 이상한 이론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 모든 목회자들이 에드워즈 같기를 바란다고도 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트렌드를 보더라도 에드워즈 신학에 무언가 정통 개혁주의가 아닌 것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신비주의적 성격의 모든 경험을 무시해야 하는가는 많은 의견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경험(또는 신학)이 교과서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분별력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신학에서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신학도 완벽하지 않기에 각자의 받은 지혜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돕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 똑같은 지혜를 주시지 않았으나 결국 같이 하나님의 지식을 바르게 세우도록 서로 도와야 합니다. 에드워즈가 천국에 갔는가 아닌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의 신학 속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이 각광을 받고 부풀려져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교회는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점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세우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이 잘못된 이론을 낳기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한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지금 괜찮아 보이는 이론이니까 후대의 성도들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교리를 바탕으로 필요한 비판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른믿음 기사들은 그런 생각의 장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한 비판으로 기분이 상하신 분들도 있으시겠으나 결국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입니다. 꾸준하게 성경과 교리를 배우고, 비판적 눈을 기르는 것은 모든 교인이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개념에 대해 2019-05-04 13:11:44

        평생 장로교인이지만 성경말씀을 최종 권위로 믿기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DNA가 다르다면 에드워즈를 보는 잣대로 어거스틴 역시 동일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거스틴 역시 기독교 신학 틀을 만든 사람으로 치부할 정도로 존중받고 있지만
        알고 보면 평생동정녀와 마리아숭배의 마당을 제공한 인물이 아닙니까. 심지어 천주교 '보속'의 원리를 세우고 연옥설을 천주교에 정착시킨 인물입니다.


        칼빈이 이런 것을 걸러냈지만 에드워즈처럼 신학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을 다른 DNA를 가진 인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에드워즈를 다른 DNA를 가진 신학자로 보면서 어거스틴을 칼빈처럼 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는 신학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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