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 이해는 구원서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루터의 이해에 의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왜 먼저 율법을 선포해야 하는가? 율법의 역할에 대한 루터의 제시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의롭게 하려고 하실 때, 먼저 그를 정죄하신다. 그가 세우려는 자를 허신다. 그가 낫게 하시려는 자를 깨뜨리시고, 살리시려는 자를 먼저 죽이신다. 하나님을 이것을 하실 때 사람을 통회로 몰아넣으시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죄를 알아 겸손하게 하시고 떨게 만드신다.

그리하여 죄인들을 지옥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얼굴이 수치로 가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당황함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주를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본래적인 자기의 일을 하시기 위해 생소한 일을 하신다. 이것이 심장의 참된 회개선포로 사람을 절망과 지옥으로 몰아넣은 다음 복음이 선포되어 예수를 믿게 한다고 하여 믿음의 시작에 율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전도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 선포함으로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였다. 베드로도 유대인들에게 선포할 때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포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복음선포에 앞서 율법의 정죄를 선포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이해하였다. 복음의 도입을 위한 준비과정이 율법의 수여이다. 율법으로 구원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율법이 도입되었다. 율법은 본래 지킬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고 율법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 구원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이후에는 율법이 구원의 길에서 전적을 배제되었다. 처음부터 복음만 선포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루터의 전통에 선 사람들은 계시가 율법과 복음으로 나타났으므로 이 둘을 늘 함께 상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진로를 계시하고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복음선포 전에 율법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강생 사역과 구속사역 후에는 율법이 구원의 길에 개입하지 않는다. 구원이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구원을 말함에 율법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 율법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가 구원을 성취하셨으므로 율법을 말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범죄하므로 율법은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죗값을 갚으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수하셨다. 계명을 범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피로 갚으셨으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다. 그리고 피로써 이루신 죄용서 곧 의를 믿음으로 받았다. 따라서 율법준수의 요구가 믿는 자에게서 다 성취되었다. 율법이 계명을 범한 죗값을 다 받았으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요구할 것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율법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역사한다. 본래 율법은 언약 백성들의 생활규범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활규범이고 구원의 길은 전혀 아니다.

통상 율법을 의식법, 형벌법, 도덕법으로 나눈다. 그리고 도덕법은 삼중용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정치적 용법으로서 큰 죄들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역사한다. 둘째는 교육적 용법으로서 사람들로 죄 인식에 이르게 한다. 셋째는 교훈적 용법으로서 믿는 자들의 생활규범이 된다. 이 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으로 작용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다 성취되어 그 기능을 다하였다. 따라서 율법은 구원의 방식으로서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도덕법은 강화되어 생활의 규범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역사한다. 율법은 구원의 길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규범으로 역사한다.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19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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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