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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F 절대적 맹신 NO! 성경과 칼빈의 신학으로 늘 회귀 YES!성공회에 대항한 청교도 종파들의 일치를 위한 절충 문서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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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4  0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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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주의는 중세 천주교의 대표적인 신학 방법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중세 천주교의 유명한 신학자들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방법으로 신학을 전개하는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개혁신학을 이어받은 개혁파 신학자들에게도 스콜라주의가 들어왔다. 칼빈의 후학들이 중세 천주교의 스콜라주의를 따라 개혁신학을 진행시키던 방법을 ‘개혁파 스콜라주의’(Reformed Scholasticism)라고 한다.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의 최고의 사례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 교리이다. 성경은 간단하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믿음이 우리의 죄 사함이고 ‘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정통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이 우리의 의라고 가르쳤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 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책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강요, 3.11.4)

 

   

한국의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이 우리의 의라고 가르친다.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이것이 정통 개혁신학의 칭의신학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이것이 성경적 진리이다. 칼빈이나 서철원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하심의 중요성을 물랐거나 강조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 못지 않게 예수님의 순종하심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죄 용서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의의 전가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성행한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예수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과 칭의를 사변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죄 사함을, 그리고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의 자격(의)을 주었다고 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으로 자신들의 사변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를 주었다고 하므로 구약의 율법이 기독교 내에서 다시 비정상적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을 지켜 의를 얻었으므로, 우리도 율법준수 잘 함을 목표하는 신앙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능동순종 교리를 고집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킨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으므로, 기독교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능동순종 교리를 만든 회중파 청교도 사상을 정통 개혁신학이라고 여기는 청교도 목사들이 그리해야 한다고 더 외치고 있다. 회중파 청교도 사상을 정통 개혁신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프롱크 교수의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코르닐리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68)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떻게 회개가 일어납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고, 우리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입니다.” (프롱크, 264)

필자는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부터는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 즉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했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후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주받은 갈라디아 이단의 가르침을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프롱크가 하는 말들을 종교개혁자 칼빈이 와서 보면 뭐라고 할까? 칼빈은 복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주 거칠게 말하였다. 『기독교강요』를 보면, 복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 사나운 개’, ‘저 미친개’ 등의 거친 표현들을 종종 사용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했다. 필자는 믿음이 좋은 저런 위대한 사람들도 때로 욕설과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칼빈이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또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었다는 주장 하나만 해도 칼빈에게는 속에서 열불이 날 일이다. 그것이 모자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옮겨진 성도들에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레발 떠는 거짓 선생들의 냄새나는 입에서 나오는 저런 소리를 용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아마 칼빈은 분노하여 거의 미칠 것이다.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이 율법과 칭의에 대해 무엇이라 가르치는지 살펴보자.

“거짓 사도들은 썩은 복음을 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율법과 뒤섞음으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는 자들이 율법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복음에 의한 칭의를 받는다고 하는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3조)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1566년 쯔빙글리의 제자 볼링거에 의해 작성되었다. 볼링거는 쯔빙글리의 후임자였으나, 1549년에는 칼빈과 함께 ‘취리히 일치 신조’를 만드는 등, 칼빈으로부터 종교개혁 신학을 많이 배운 사람이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볼링거에 의해 작성되었으나, 칼빈의 종교개혁의 정통신학을 대변하는 매우 탁월한 신앙고백서로 평가되고 있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은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내용을 대표하는 문서로 인정되어 네덜란드어, 영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터키어, 그리고 아랍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스코틀랜드(1566년), 헝가리(1567년), 프랑스(1571년), 폴란드(1578년)에서도 공식문서로 채용되었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도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80년 후에 작성된 '웨민고백서'(WCF, 1646년)와 함께 개혁신학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신앙고백서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율법과 칭의에 대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다시 살펴보자.

“거짓 사도들은 썩은 복음을 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율법과 뒤섞음으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는 자들이 율법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복음에 의한 칭의를 받는다고 하는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3조)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를 얻었다는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칼빈의 신학에서 이탈한 칼빈의 제자 베자에게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신학을 배운 영국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영향이 스위스에서 작성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는 전혀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80년 후, 영국 국교회에 대항하고 있던 다양한 청교도 종파들의 일치를 위해 작성된 웨민고백서 8장 5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또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WCF, 8-5)

여기의 ‘완전한 순종’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고, ‘자신을 드린 희생제사’가 그리스도의 수동순종을 의미한다고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주장한다. 필자는 처음에 말도 안된다고 여겼으나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칼빈의 신학에서 벗어난 칼빈의 제자,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능동적, 수동적 순종 개념을 가르쳤고, 회중파 청교도의 초기 조상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과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가 그에게 신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회중파 청교도의 조상 퍼킨스은 웨민고백서가 작성되기 40년 전에 죽었고, 에임스는 10여년 전에 죽었다. 이들이 웨민고백서 작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이들이 남긴 책들과 다양한 형태의 영향이 회중파 청교도들에게 계속 확장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사상이 회중파 청교도 후배들을 통해 웨민고백서에 반영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청교도 운동에 관한 탁월한 전문연구자인 김홍만 교수는 자신의 소논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특징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WCF 10장에서 18장까지의 서술들은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청교도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윌리엄 퍼킨스의 황금사슬 (1592)로부터이다. 퍼킨스가 구원의 서정 방식을 택한 이유는 예정을 설명하려는 변증적 목적이 있었다. 인간의 행위 혹은 협력이 구원의 요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퍼킨스의 구원의 서정 방식은 치밀하게 조직적이기 보다는 구원의 원인적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며, 그 내용은 은혜의 실행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윌리엄 에임스 (William Ames)로 이어졌다. 따라서 WCF의 구원의 서정 방식의 서술은 퍼킨스와 에임스의 저작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김홍만 교수)

김홍만 교수는 웨민고백서의 내용 속에 회중파 청교도의 조상 퍼킨슨과 에임스의 영향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어디 김홍만 교수가 말한 이 내용 뿐이겠는가? 80년 전, 아직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이 오염되지 않았을 때 작성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의 율법과 칭의에 대한 내용을 다시 보자.

“거짓 사도들은 썩은 복음을 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율법과 뒤섞음으로 마치 그리스도께서 율법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는 자들이 율법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복음에 의한 칭의를 받는다고 하는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3조)

여기에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의를 얻었다는 헛소리가 감히 끼어들어갈 틈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율법이 칭의를 얻는 수단이라는 사상을 ‘거짓 사도들의 썩은 복음’이라고 정죄하고 있다. 율법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떠드는 고약한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런데 약 10년 후, 1580년대 무렵부터 칼빈의 신학을 변질시킨 베자에게서 능동적-수동적 순종 등의 사상을 배운 퍼킨슨과 에임스를 중심으로 회중파 청교도가 발전되면서 율법주의 칭의, 율법 중심의 회심준비론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1646년에 웨민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웨민고백서는 스코틀랜드의 언약도(장로파 청교도), 잉글랜드의 장로파 청교도, 잉글랜드의 회중파 청교도, 잉글랜드의 침례파 청교도 등의 다양한 종파들이 종교개혁 교회들의 일치하여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계승하는 청교도 세력과 칼빈의 원래의 신학과 다른 내용의 칼빈주의를 붙드는 세력들이 함께 영국 국교회에 대항하기 위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김홍만 교수는 자신의 소논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특징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총회는 1163번의 회의를 통해서 진행되었는데,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들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정확성과 분명성을 위해 상당한 시간의 논쟁을 거쳤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에서 작성된 WCF는 개혁신학 안에서 공동으로 합의될 수 있는 문서이다. 즉, WCF는 공동의 일치 혹은 합의를 위해서 절충된 문서이다.” (김홍만 교수)

그러나 각각 특색이 다른 청교도 종파들이 웨민고백서를 계속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12년 후, 회중파 청교도는 자신들만의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1658)을 별도로 채택하여 웨민고백서와 실질적으로 결별하였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사보이 선언은 능동적 순종 교리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율법 전체를 향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죽음을 통한 수동적 순종을 그들의 모든 행위와 유일한 의로서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사보이 선언, 11장)

1608년, 원래 영국 국교회에 속한 회중파 청교도였던 존 스미스(John Smyth, 1570~1612)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침례교 청교도 운동의 조상이 되었다. 1689년에 작성된 침례교신앙고백서에도 능동적, 수동적 순종 교리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뿌리가 회중파 청교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체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전가하시고, 죽음을 통해 수동적 순종을 전가하신다" (침례교 신앙고백서, 11장 1항)
 

맺는 말

그 동안 우리는 웨민고백서를 오직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 종교개혁 교회의 개혁신학의 산물이라고 오해하였다. 필자도 그렇게만 알고 웨민고백서의 모든 내용을 절대적으로 우상시하며 맹신하였다. 필자의 주장은 웨민고백서를 전적으로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웨민고백서가 칼빈의 신학을 순수하게 계승하는 장로파 청교도의 신앙만을 표현한 문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널리 알리자는 것이다.

영국의 다양한 청교도 종파들의 일치를 위해 조금씩 성향이 다른 신학들을 절충해야만 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웨민고백서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제 아무리 위대하고 지존한 웨민고백서라도 결코 성경과 같을 수는 없다. 웨민고백서도 성경과 개혁신학의 기초가 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등의 가르침에 비추어 비교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기초는 언제나 칼빈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는 개혁신학을 전개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 즉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신학 전개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 물론 고대교회의 교리를 기본 진리로 받아서 신학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131)

 

--- 참고 자료 ---

김홍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특징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

사보이 선언(1658)

침례교 신앙고백(1689)

서요한,『청교도 유산』(그리심, 2016).

존 칼빈,『기독교강요』(한국문화사).

서철원,『교의신학전집』(쿰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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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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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n 2019-04-25 08:07:50

    '언약의 역사적 발전사 고찰'이라는 글을 네이버나 다음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데,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박사님의 불링거에 대한 비판은 불링거가 언약의 성격을 편무적이 아닌 조건적, 쌍무적으로 이해했다는 주장이 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불링거와 칼빈은 언약의 통일성과 영원성을 주장했고, 언약사상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을 칼빈이나 불링거가 지지했을 거라고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불링거가 후대 언약 신학자들과는 다르다는 주장http://www.cprf.co.uk/articles/covenant6.htm#.XMDmi9hS-Ul)
    "하나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불링거는 말한다. "그리스도 자체가 유산 inheritance이다" (BE 110). ... “그러나 불링거의 ‘조건들’은 언약에 들어가기 위한 기초나,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맥코이나 베이커의 논문과는 반대로 조건 언약으로 불리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으며 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된다.” (칼빈 신앙교육서 14장)

    성경의 언약을 둘로 나누는 것이 잘못이지 않나 싶습니다. 칼빈때까지 언약은 한 언약으로 이해되었으나 우르시누스가 두 언약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은혜언약 하나로 봐야 합니다. 언약에 대한 견해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언약을 두 개로 나누는 오류는 절대로 피해야 할 듯 합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개념에대해 2019-04-24 13:18:07

      정이철 목사님. 서철원 박사님께서는 볼링거의 언약사상이 바르지 못하며 볼링거의 언약사상이 WCF 7장에 도입되었고 행위언약으로 표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행위언약은 능동적 순종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언약사상과 볼링거의 언약사상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4-24 07:53:27

        이번 논쟁으로 깨달은 것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여태껏 언약이라는 것을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잘못된 언약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를 폄하하는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인공은 절대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칼빈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은 둘 다 너무 중요합니다.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잘못된 결과입니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아담을 미화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보다는 아담의 상태로 영생을 얻기를 더 원하는 듯 합니다.
        행위언약, 능동/수동적 순종을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거짓 사도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 시대에 눈을 뜨게 하셔서 가르쳐 주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이 자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교단에서 인정하지 않아도, 핍박을 받아도, 성경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성도의 삶이 아닐까요.
        저도 이제껏 웨민이 최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불링거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이 바른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저는 단지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제자로, 유기를 인정하기 싫어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요. 실은 칼빈의 좋은 친구였다는 것, 칼빈처럼 가족과 친구들을 잃고서도 오직 바른 복음을 알리려는 그리스도인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빈과 불링거가 준 유산으로 신학을 더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신학은 구원을 설명하기에 급급했고, 이상한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더 연구하고, 이론들을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단단한 음식이 아닐까요. 아직도 우유를 먹고 있냐고 바울이 묻는 듯 합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제 2장
        교회 공의회들이 결정하여 선포한 교령들, 교리들 및 교회법 역시 성경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에 관한 논쟁이나 신앙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다만 교부들의 의견이나 공의회의 결정사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관습에 의해서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많은 수나 오랫동안 기득권으로 인정된 진리에 의해서도 결코 우리는 종교와 신앙문제를 쉽게 결정해 버릴 수 없다. 판정자는 누구인가? 판정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성경에 의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나를 선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사람들의 판단들에 동의한다. 사실 예레미야와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장들의 회집을 맹렬히 정죄하면서 부지런히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조상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저들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신고 | 수정 | 삭제

        • 우동사리 2019-04-24 04:34:59

          능동적순종을 처음 접한것은 몇개월전 모 신학대 교수의 칭의론을 듣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마음에 간직해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청교도 개혁주의 교회의 웨민교육때 듣고, 고신측 목사의 설교에서 듣고, 대신측 목사의 강론에서 들었습니다. 전부 개혁주를 이름 걸고 있던 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것에 뒤로밀려 오염되는데 그들은 이 시대의 교회가 어쩌구 저쩌구하며 다른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석박사를 따고 성경을 빠삭하게 알아도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핵심이자 종교개혁의 꽃인 이 칭의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해보면 두렵습니다.

          왜냐면 저들은 성령으로 진리를 아는게 아니라 성경을 학습하여 아는것이란 결과에 도달되기 때문입니다. 신적 비밀인 진리를 밝히 아는것은 유일무이 성령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 학습된 지식은 사변 밖에 나올게 없고 그것은 성경 말씀이 진리의 성령으로 인도로 수용된게 아니라 강력한 지적 동의에 의한 신념의 산물이란 생각만 듭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성령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공감할 것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절대 이 칭의를 혼동 할 수가 없다는것을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사람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의 신자도 모르는 시골의 무지한 할머니깨서도 다른건 몰라도 이 칭의만은 정확하게 흔들리지않고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누가 진리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겠습니까? 저들의 관심이 정말 하나님 나라와 한 영혼을 위한것에 있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진리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 할 수있는지..

          한 동안 이 거짓복음 때문에 정말 고뇌했습니다. 둘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제대로 알거나 내가 진리를 모르거나이기 때문이고 나는 도저히 저것을 진리로 받을 수가 없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 꺼리낌 없이 진리로 받고 믿고 홀가분하게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 이 거짓복음을 더욱 치밀하게 연구하시고 집요하게 목소리내시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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