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장을 보면 요셉 한 사람으로 시작된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민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출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민 1세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이 모두 죽은 후에(1:6), 애굽에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제국을 다스리면서 점점 자국민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이민자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고조하게 된다(1:10).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건축 공사 등에 동원되고, 급기야 사회적인 학대를 받기에 이르렀다(1:11-12).

설상가상으로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반 이스라엘 정책이 세워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인구증가가 너무 빨라 위기의식을 느낀 이집트의 정치꾼들이 급기야 사내아이는 모두 죽이고 여자아이만은 살려둔다는 남살여생(男殺女生)정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1:16)해산을 도울 때에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살려둔다.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법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가 계속 부강할 수 있을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에 사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도 한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 나라의 국운은 쇠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반 이민, 살인적 출생정책을 이집트 당국은 세운 뒤 애굽의 왕은 그 일에 종사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 여차 없이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 히브리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어기며 생명을 걸면서까지 남자아이들을 살려내는 수고를 하였다. (출1:17) 히브리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린지라.

당시 제국을 호령하던 애굽 왕의 준엄한 명령이긴 하지만, 비록 이민 온 나그네 약자의 입장에 서있는 산파들이라 할지라도, 여인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아니 그것을 넘어서 생명을 말살하려는 악의적인 정책에 과감히 NO라고 말할 줄 아는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생명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진정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 문제로 한창 미국이 시끄러운 즈음에 치킨 햄버거를 주로 파는 햄버거 체인 칙필레가 미국의 동성애자들로부터 공격받았다고 한다. 칙필레는 주일날 문을 닫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기업경영을 철학으로 표명하고 있는 햄버거 체인점이다. 그래서 칙필레는 동성애자들의 주된 공격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고인이 된 칙필레 회장은 한 언론과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결혼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합이며, 우리는 그 원칙을 바꿀 위치에 있지 않다.” 칙필레 회장의 이 발언이 있자마자 전미동성애자 연합은 바로 이어 성명서를 발표하고는 칙필레를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기업으로 낙인 찍고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또한 친 동성애자 진영의 보스턴 시장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칙필레처럼 시민(동성애자)의 인권을 차별하는 기업은 우리 보스톤 땅에 결코 들어올 수 없다(실제 칙필레는 보스톤에 입점하지 못하고 있다)고 압력을 가하였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기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고객이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기업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위기 사안일 것이다. 하지만 협박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칙필레 회장의 믿음은 그 옛날 히브리 여인들의 믿음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한다. 비록 애굽 왕의 명령이라 해도 히브리 여인들은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녀들은 알았기에, 그리고 한 생명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주적인 섭리임을 그녀들은 알았기에 애굽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산파들은…. (1:17).

세상이 점점 요지경 속(앞으로는 더하겠지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물론 성경은 종말에 일어날 사회적인 타락을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며 주의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딤후 3:1-5). 이러한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애굽 왕이 신적인 위치와 동급으로 인식되어 살고 있던 수 천년 전의 폭압적인 그 시대에도 왕의 명령을 믿음으로 NO라고 기꺼이 거절하였던 히브리 산파들의 믿음이 오늘 더욱 그리워 진다. 그녀들도 지켜야 할 직장, 돌봐야 할 자녀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여러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믿음, 믿음, 믿음…

너무 자주 보고, 듣고, 말하고 노래하는 이 단어가 요즘 들어서 점점 더 그 무게감이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같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믿음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단어가 아닌가? 이 세상뿐인가? 아니면 영원한 나라인가? 이 땅의 권력과 세력을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왕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만을 걱정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나라는 과연 어디 있는가 묻고 싶다.

조금 더 언급하자면 히브리서 11장(35-38)은 이런 추상적인 믿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애굽에 있던 당시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다. (1:21)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이 일이 있은 후 애굽 왕의 정보력은 이런 히브리 산파들의 반역적 행동을 발견하고는 결국 왕 앞에 그들을 세워 추궁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애굽 왕은 남자 아이들을 살려두며 자신의 명령을 어긴 그 산파들을 불러서 직접 취조하며 이렇게 묻는다. (1:18)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왕의 질책에 히브리산파들의 대답이 걸작이다: “(1:19)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이 대답을 미루어보면 아마 애굽 왕이 내린 명령 즉 출생 시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법안은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기 직전 어머니의 태 안에서 질식사를 하게 만들거나 죽이도록 명령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즉 아이가 출산한 후에 죽인다는 것은 법안을 입안한 당사자들에게도 너무 끔찍한 법안이라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내부적으로 조용히 그렇게 전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히브리산파들은 자신들이 이미 도착하기 전에 아이들이 출산이 되어 왕의 명령대로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답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애굽 왕도 산파들의 이런 대답을 듣고서는 그녀들을 벌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산파들이 이런 위기를 모면한 것은 그들의 지혜나 기지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 은혜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열국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의 명령을 더 중시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더욱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부어주신 그 동일한 은혜를 오늘 나는 경험하고 싶다.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빛은 존재한다. 어둠이 깊을 수록 새벽은 더욱 밝게 다가올 것이다. 어두움이 더욱 짙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할 것이다.

수 천년 전 이집트 제국의 잔인하고도 살인적인 출산 정책, 생명 말살 정책, 차별적이고도 폭력적인 이 정책은 오늘 21세기 세계 최강의 자유로운(?) 미국에 사는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공공연한 낙태지지, 동성 결혼, 동성애자의 인권확대, 공공장소에서의 기도 및 전도 금지로 대변되는 반기독교적인 핍박정책은 하등 다를 게 없다. 아마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이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보여주고 있다.

(1:17)“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1:20)“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1:21)“하나님이 그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과감히 NO라고 말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비록 배우지 못하고 연약한 여인들이라도 그들의 믿음에 반하는 것은 과감히 No라고 말했던 히브리 여인들을 따라…

혹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 시대, 진리가 아닌 것에 No라고 말하며 진리에 대해서는 과감히Yes라고 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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