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회중-청교도 운동에 대한 연구를 보물찾기처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를 뒤지다가 보게 된 한두 줄의 짧은 정보를 통해 중요한 단서를 얻어 계속 관련된 자료를 찾아 내면서 윤곽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article들과 책들이 많고, 얻어진 정보들이 어느 정도 쌓이면 글로 정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강요>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부활을 설명하는 마지막 25장만 읽으면, 3권이 끝납니다. 지난 며칠 동안 3권 21, 22, 23, 24장을 읽었습니다. 칼빈이 ‘예정’와 ‘유기’에 대해서 진술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바르게 읽으면, 영원한 예정과 유기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예정 교리를 매우 싫어하고, 특히 유기라는 말에 대해서는 넌더리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은 깊은 바다 속을 탐험하고, 달에도 갔다 오고, 전기 문명으로 밤의 어둠을 정복하였고, 태평양의 하늘을 새보다 더 빨리 넘어가는 시대를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정복하고 뜻대로 다스리게 되었는데,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곳이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죽음 이후의 천국과 지옥입니다. 여기까지 정복하거나 다스릴 수 있는 인간의 방법은 다음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 그냥 부정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어디에 있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 
“천국이 어디에 있냐?” 
“지옥이 어디에 있냐?”

머리통이 아기 주먹보다 적어 생각이 무척 짧은 꿩은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그냥 머리를 통째로 작은 구멍에 쳐박고 다 해결되었다고 스스로 정리한다고 합니다. 꿩의 머리보다 조금 더 큰 머리를 가진 인간이 비슷한 방법으로 죽음과 영혼의 세계를 꿩처럼 정복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혼, 하나님, 천국, 지옥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의 문제라고 정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영역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무능력을 정직하게 고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슬그머니 그 영역까지도 인간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지?”

이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은혜라고 고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이제 거만해진 인간은 그렇게 신앙하면 체면이 구겨지는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시대정신을 신봉합니다. 시대정신은 항상 성경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모든 선생들과 설교자들은 시대의 아들들입니다. 이미 그 자신에게 시대의 철학과 정신이 자리하고 있고, 그의 믿음과 성경 해석에 그것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글과 설교와 강의를 통해 전파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 신학교, 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태중의 연약한 아기 살해, WCC, 동성애, 다원주의, 천주교와의 연합, 신비적 영성운동(관상, 방언기도, 음성듣기) 등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앙 관점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의 신학과 관점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분들은 이미 성경의 원초적 가르침과 명령을 외면하고, 시대정신에 의해 조합된 신학과 성경해석 방식을 수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태중의 연약한 아기살해, WCC, 동성애, 다원주의, 천주교와의 연합, 신비적 영성운동(관상, 방언기도, 음성듣기) 등을 수용하거나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주의”

이제는 그런 신앙을 복음주의(evangelicalism, evangelism은 복음전도, Evangelicals은 복음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복음주의라는 말은 원래 중세의 로마 교회와 교황을 향하여 목숨 걸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루터의 신앙노선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개혁신학"

그러면 개혁신학은 무엇일까요?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안에서도 칼빈의 종교사상을 중심으로 발전된 신학입니다.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초하여 탄생된 밸직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민고백서 등으로 표현되어 종교개혁 교회에 정착된 신앙을 ‘정통신앙’(orthodoxy)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기존의 이름있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면 '정통 교회'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그렇게 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정통교회들이 발전시킨 신학을 뜻합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복음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문턱이 점차 낮아졌습니다. 종교개혁 신앙을 철저하게 추구하였는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웨슬리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도 복음주의의 큰 멤버가 되었습니다. 방언기도하고, 성령세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매우 무속적인 오순절 교회들도 복음주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간을 허무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관대해지는 경향이 복음주의 교회들에게서 빨리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미국의 교회들이 격동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성경대로의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필라델피아에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대정신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대로 믿는 외로운 길을 고집하자, 시대정신과 친하게 노는 교인들과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들을 ‘근본주의’라고 비하하였습니다.

올바른 믿음의 길로 가는 그 교회 속의 어떤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근본주의 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 섬기는 길을 싫어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미국 켈리포니아에 있는 플러신학교를 중심으로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신복음주의라는 깃발을 흔들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더니, 슬그머니 '신'자를 빼바리고 그냥 '복음주의'라는 기존의 용어를 자신들의 이름표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 노선이 '복음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주의 속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변은 성경 속에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의 말씀과 그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상대적 계시의 말씀이 함께 있으니, 우리 시대에 맞도록 재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는 성경관의 등장이었습니다. 여성안수 제도는 바로 그 이론을 타고 신속하게 도입되었습니다.

유명한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가 앞장서서 로마교회와 연합을 이루어 냈습니다. 로마 교회와도 친교하기를 시작하니, 자연히 WCC, 다원주의, 관상기도 등이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한 가족이된 오순절 교회들의 방언기도, 성령체험 등의 신비영성 운동이 복음주의 속에 널리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복음주의 신학의 메카 플러신학교가 발전시킨 대표 상품 ‘교회성장학’을 따라가는 성장주의 목회, 시대정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열린 예배, 예배 고객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설교, 예배 고객을 욕구를 충족시키는 교회 노래방 등이 만연하였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구원론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이 영생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의 멘털리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 선택, 결정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하기에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 세련되어졌고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가르치고 믿을지라고, 사람 중심의 예정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그 사람이 자기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할 것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가르침이 환영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인간의 생사화복에 아무것도 관여하지 못하는, 인간이 결정하는 대로 맞추어 반응하며 복과 구원을 베푸는 단순하고 무능한 분으로 강등였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비밀하고 광대하시고 심원하신 뜻 안에서 지렁이와 같은 죄인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노아를 보십시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악하고 타락하였으나 그 한 사람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8,9)

그 한 사람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며, 거대한 방주를 준비시켰습니다. 때가 이르자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 한 사람으로 다시 인류의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단 4:25)

하나님은 온 세계를 재패하자 극도로 교만해진 느부갓네살 왕을 하루 아침에 권좌에서 끌어내려 들짐승과 같은 처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십시오.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순식간에 감옥에서 꺼내어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십니다. 모든 인생들을 자기의 뜻대로 높이시고 낮추시고 죽이시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설명하자면 하늘과 땅이라도 부족합니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해 아무도 도전할 수 없습니다. 도전하는 자는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고,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얻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진정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신앙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택하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이유가 그 사람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선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 야곱과 에서는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한 쪽은 버린신다.” (기독교강요, 3.22.5)

칼빈은 어떤 사람이 구원으로부터 소외되는 이유가 그 사람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고 한다. 이 사람들에 대해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인다. 야곱이 아무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렵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 (롬 9: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 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야곱과 에서는 아직 선악 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3.22.11)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원리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불합리합니다. 어떻게 이런 간단한 법으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바보가 되지 않고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고 하셨으면 그대로 되는 겁니다. 교만한 현대인들은 먼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고 수긍하지 못하면 천하의 누구도 똑똑하고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기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천하의 대 재벌이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영혼이 무엇을 한들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인간은 천 번을 죽고 다시 살아나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은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창조주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는 신앙의 비밀입니디.

구원의 방법과 비밀에 대해서 사람과 타협하면 신앙이 서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못합니다. 칼빈처럼 한 치도 양보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성경대로 행위나 외모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택하심으로 구원얻음을 믿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의 절대적 진리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얼마든지 더 멋있는 말 할 수 있어도 일제 다른 말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택하심만 말했습니다.

 

작은 종 정이철 목사가 맥도날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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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