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


들어가는 말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비록 사본이기는 하지만 헬라어(히브리어) 원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번역하는 자들은 성경 원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 번역자들이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원문의 의미를 번역 성경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에서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번역이 생기기도 하고, 조금 후에 다룰 “내 아버지여 할 만 하시어든”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코미디 같은 번역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영어 History(역사)를 별 생각 없이 His Story(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영어 ‘History’는 ‘His’와 ‘Story’의 합성어가 아니라, 헬라어 Historia(히스토리아)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 Historia는 ‘지혜자’를 의미하는 Histor(히스토르)에서 왔다. Histor에서 유래된 Historia는 ‘연구에 의해서 얻어진 지식’을 뜻하는데, 이 의미는 Historia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 Historio(히스토리오/찾아서 안다)에서 온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History->His+Story로 설명하면 틀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도 원문의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작업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자들이 같은 헬라어 단어, 또는 같은 헬라어 문장이라 할지라도, 전후문맥이나, 시대적인 상황(삶의 정황), 또 신학적인 고려에 따라서 달리 번역해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제 함께 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어든~”(마26:39)은 문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번역은 신학적인 고려가 결여된 실패한 나쁜 번역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어든~”(마26:39)

위에서 “~할 만 하시어든”으로 번역된 마26:39의 헬라어 원문은 “eiv dunato,n evstin”(에이 뒤나톤 에스틴)이다. 헬라어에서 ‘eiv(에이) 가정법’은 “만일 ~이라면”의 가정법(if)과 “~이므로”라는 직설법(since)의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로 쓰인다. 따라서 전후문맥과 당시의 삶의 정황, 특히 주어의 정체(예를 들면 ‘주어’가 전능하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연약한 인간인가)를 염두에 두고, 가정법과 직설법 중 어느 것이 더 잘 어울리는지를 살펴서 번역해야 한다.1)

그러면 성경에서 연약한 인간, 즉 전능하지 못한 자가 주어로 등장하는 ‘eiv(에이) 가정법’을 몇 군데를 보자. 아래의 본문들은 주어가 다 전능하신 하나님(예수님, 성령)이 아니다. 그러므로 ‘eiv(에이) 가정법’은 “~할 수 있다면”의 가정법으로 번역하면 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eiv dunato,n/에이 뒤나톤)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24:24)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eiv dunato.n/에이 뒤나톤/ 할 수만 있으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행20:16)

"할 수 있거든(eiv dunato,n/에이 뒤나톤)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그러나 마26:39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나오는 ‘eiv(에이) 가정법’은 주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도 “~할 만 하시어든”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면,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꼴이 된다.

그래서 이 번역은 하나님의 신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오역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검토한 모든 번역 성경은 마26:39에서 “~할 만 하시어든”의 주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eiv(에이) 가정법’ 형태의 “eiv dunato,n evstin”(에이 뒤나톤 에스틴)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처럼 보이는 “~할 만 하시어든”으로 번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새번역>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NIV>
"Going a little farther, he fell with his face to the ground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possible, may this cup be taken from me. Yet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

KJV>
"And he went a little farther, and fell on his face, and prayed, saying, O my Father, if it be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

위의 번역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며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런 전능하지 못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막9:22은 벙어리 귀신들린 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의 치료를 간청하는 말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ei; ti du,nasai/에이 티 뒤나사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막9:22)

지금 벙어리 귀신들린 한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eiv(에이) 가정법’은 한 아이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가능성을 묻는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의 가정법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바르게 알고 믿도록 하기 위하여 그 아이의 아버지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Eiv du,nasai/에이 뒤나사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9:23)

예수님이 책망하신 대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막9:22의 요청을 예수님께 다시 했다면, 이제는 한 아버지가 한 말 “Eiv du,nasai”(에이 뒤나사이)의 의미가 “할 수 있거든”이 아니라 “할 수 있나이다”가 된다. 왜냐하면 한 아이의 아버지가 이제는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부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어의 정체’에 따라 같은 형태의 ‘eiv(에이) 가정법’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가정법’으로, 때로는 ‘직설법’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렇게 한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면서, 믿음의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할 수 있거든’이라는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신 예수님께서 정작 자기 자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으시고, “~할 만 하시어든”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기도하셨을 리가 없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 “eiv dunato,n evstin”(에이 뒤나톤 에스틴)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병행구절인 막14:36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14:36)

마가는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기도 “eiv dunato,n evstin”(에이 뒤나톤 에스틴)처럼 ‘eiv(에이) 가정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평서문으로 “Abba o` path,r pa,nta dunata, soi”(압바 호 파테르 판타 뒤나타 소이/아바 아버지여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라고 기록했다. 마가가 평서문으로 기록한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와 마태가 기록한 “eiv dunato,n evstin”(에이 뒤나톤 에스틴)은 서로 다르게 표현했지만, 같은 의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주어의 정체’를 고려하면서 마26:39절을 원문대로 바르게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는/당신은) 능히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나가는 말

마26:39에서 “~할 만 하시어든”으로 번역한 예수님의 기도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함 어떤 이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뜻)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2) 그러나 이런 설명은 억지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의 “dunato,n”(뒤나톤)은 ‘의지’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명백히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배운 초보적인, 그리고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 헬라어 문법에 얽매여서, 번역의 실수를 보지 못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뜻)에 관한 것이다”라고 궁색하게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변조시키시는 무서운 범죄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도하는 자가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인용하여 기도하기도 한다. 필자가 학생 시절 주일 예배 때, 어느 장로님이 힘 있게 하셨던 대표 기도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다면, ........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필자도 마26:39의 바른 번역을 몰랐을 때, 위와 같은 형태로 기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다면......”의 객관적인 의미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번역에 의존하는 기도는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원문을 바르게 번역하는 것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 미주 ---

1) ‘eiv(에이) 가정법’의 일반적인 설명에 의하면, eiv(에이) 뒤에 ‘중간태 단수’가 오면, “~이면”의 가정법이고, eiv(에이) 뒤에 ‘중간태 복수’가 오면, “~이다, ~이므로”의 평서문(직설법)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모든 번역 성경이 이 설명에 따라 마26:39을 번역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설명은 맞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필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전후문맥과 당시의 삶의 정황, 특히 주의 정체를 염두에 두고, 가정법, 또는 직설법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를 것이다.

2) 장종태, 히브리적 관점으로 다시 보는 마태복음2(서울: 쿰란출판사), p.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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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