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영국교회사 탐구(1)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시발자 헨리 8세 왕


1. 잉글랜드 종교개혁

: 헨리8세 ~ 엘리자베스 1세 (수장령과 39개 조항)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튜더왕조(House of Tudor)에서 시작했다. 1509년에 즉위한 헨리 8세(Henry Ⅷ, 1509-1547)가 부인 문제로 교황권과 대립함으로 발생했다. 헨리는 1531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534-1536년 천일왕비), 1533년 앤 볼린(Anne Boleyn)과 혼인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인데, 단순한 애정 문제와 교황권에서 분리하기 위한 명목으로 애정 문제를 삼았다는 것이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영국 교회의 대표임을 공표하는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 1534)을 공포했다. 이것은 기존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 로마 교회를 유지하려는 세력, 종교개혁을 바라는 사역자들에게 모두 기회가 되는 카오스가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을 바라는 사역자들에게는 다양한 목표, 다양한 방법이 대두된 것이 문제였다. 그러한 사상의 근원은 잉글랜드 자체에 있는 지식과 선진 종교개혁 지역인 대륙(신성로마 제국, 스위스 제네바, 네덜란드 등)에서 참조했다.

1547년 헨리의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9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했다.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을 더 활발하게 추진하기 좋은 여건을 만났다. 영국 국교회에서 성직자의 의복에 로마 교회 요소들이 많이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에드워드 6세 옆에 토마스 크랜머(T. Cranmer, 1489-1556)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이혼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제공했고, 에드워드 6세 옆에서 개혁을 주도했다. 크랜머는 마틴 부처를 초청했고, 존 낙스를 프랑스 갤리선(gelley) 노예에서 구출했다. 비극인지 에드워드 6세는 6년 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1553년 메리, 피의 여왕(Bloody Mary)이 등장했다. 그녀는 로마 교회로 회귀시키는 것을 목표했다. 많은 개혁파 사역자들이 순교했고, 다수는 대륙으로 망명했다. 대륙으로 도피한 개신교인들이 칼빈과 그의 제자들의 종교개혁 신학을 접했다.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자 해외로 도피했던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이루기 좋은 여건이 형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개혁자들을 이전보다 더 잔인하게 죽이거나 목사직을 제명하고 벌금형을 가하였다. 중도의 길을 취하는 엘리자베스는 “39개 조항”(the Thirty-nine Articles, 1563)을 발표했다. 그러나 개혁을 원하는 사역자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개혁해야 할 로마 교회 요소들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혁을 원하는 사역자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서명하지 않은 300명의 사역자들은 교구에서 추방되어 사역지를 잃었다.
 

스코틀랜드 종개개혁자 존 낙스의 상


2.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불길
: 마틴 부처(국교회)와 존 낙스(장로교회)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명한 개혁자이지만, 그가 잉글랜드에서 죽었다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부처는 1523년부터 25년간 사역한 스트라스부르(Strassbourg)에서 1549년 4월에 추방당했다. 추방 이유는 슈말칼텐 전쟁에서 개신교(개혁 진영)를 패배시킨 카알 5세(Karl V)가 제안한 󰡔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Augsburger Interim, 1549)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슈말칼텐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은 1531년 헤센의 영주인 필립(Pilipp von Sachsen)을 중심으로 형성된 루터파 세력이었다. 오스만과 갈등 관계에서 완화되었지만, 루터파 영주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1546-1547년 슈말갈텐 전쟁이 발발했고, 카알 5세가 승리했다. 그러나 루터파 제후들은 만족하지 않고 저항했다. 결국 카알 5세는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휴전을 선언했다.

여러 곳에서 초청장을 받았는데,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초청을 선택했다. 2년간을 캠브리지 삼위일체 왕립대학교의 명예교수(Regius Professor)로 지냈다. 부처는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52)을 개정했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연구인 『그리스도의 왕국론』(De regno Christi, 1551/1557)을 집필해서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했다. 잉글랜드 교회 지도자 존 브래드포드(John Bradford), 메튜 파커(Matthew Parker), 에드문드 그린달(Edmund Grindal)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1553년 에드워드 왕이 죽고 뒤를 이은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를 받고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단으로 단죄되어 1554년 프랑크푸르트로 망명했다. 리차드 콕스(Richard Cox) 등은 낙스의 개혁교회 예배에 반대하고 영국교회 전통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낙스는 그곳을 떠나 1555년에 제네바로 이주했다. 1555년 비밀리에 스코틀랜드에 들어갔고, 다시 1556년에 제네바로 돌아왔다. 낙스는 칼빈의 배려로 제네바에 피난 온 약 200여명의 영국인을 섬기는 목사로 활동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 추진 동맹’(Lords of Congregation)이 결성되었고, 1557년 3월에 낙스에게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까지 사역했다. 그가 떠난 1560년 제네바성경(Geneva Bible)을 출판했는데, 낙스의 공헌에 대해서 침묵하지만 그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559년 스코틀랜드로 귀환해서, 1560년 8월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를 작성하면서 국가 신조를 확립했다. 1561년 12월 5일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 총회를 시작했다.

두 사람, 1551년에 잉글랜드로 들어간 마틴 부처, 1559년에 스코틀랜드로 들어가 존 낙스는 영국의 주요 신학자의 원형이다. 마틴 부처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존 낙스와 갈등 관계를 이루었다. 부처는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낙스는 교회를 바르게 하려고 했다.

낙스의 후계자인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은 <두 왕국론>에서 교회와 정부를 분리시킬 것을 제언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Lex Rex]에서 교회 거룩을 위해서 세속 정부에 불복종을 선언했고, 목사임명권(Patronage)을 국가나 회중이 아닌 지역 노회에 두었다.
 

3.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엄숙 동맹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는 1619년 도르트 공회의에 참석하면서 대륙 개신교(칼빈파와 알미니안)의 사상이 급속하게 유입되었다. 그 무렵에 소시니안(유니테리안)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소시니안은 종교개혁에 반동적인 운동으로 합리주의를 도입해서 일신교를 확립했다.

소시니안은 1553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렐리오 소치니,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소시니안은 유아세례거부, 전쟁(폭력) 거부, 여호와 이름 사용, 지옥 형벌 거부, 삼위일체 거부 등 전혀 반기독교적 교리를 구축했다. 잉글랜드에 1652년 존 비들(John Biddle, 1615-1662)이 유니테리안의 라코비안 교리문답(Racovian Catechism, 1605년)을 번역하여 유입시켰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는 잉글랜드는 대륙에서 들어온 모든 사상이 모였고, 사상들이 서로 융합되면서 다양한 분화가 나타났다. 그러한 다양한 분화가 모여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했기 때문에(1646년), 문서의 수준은 명료한 교리가 아니라 다소 포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로파는 기존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대신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했고(1647년), 회중파는 사보이 선언을 작성했고(1658년), 침례파는 런던신앙고백서(1677년, 특수침례교회)를 작성했고, 국교회는 이전 39개 신조(Thirty-Nine Articles, 1556년)로 회귀했다.
 

4. 웨민고백서 채결 후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역사

스코틀랜드는 1712년 목사임명권을 지역 지주들에게 허용하면서 130여년을 논쟁을 진행했다. 1733년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이 목사임명권 반대하며 협력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Thomas Gillespie)가 목사임명권을 거부하고 구원대회(Relief Synod)를 조직했다.

1843년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도 목사임명권에 반대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 총회를 설립했다. 187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목사임명권을 폐기했다. 1847년 협력노회와 구원대회가 "연합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설립했다. 1900년대에 자유교회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 때 반대한 교회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이고, 1929년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가 합동해서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조직했다. 2007년에 두 교단은 연합했다. 201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등 다수 교회가 연합된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에 파트너십을 맺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20세기 칼 바르트 신학을 수용하면서(Thomas F. Torrance, 1913-2007) 거대 교단을 이루었다. 토랜스(T. F. Torrance)는 1959년 자신이 편집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연구의 서문에서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성공회와 파트너쉽을 맺으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
 

5. 결 론

영국 교회는 17세기에 몇 교리를 거부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려 했고, 현재는 모두를 수용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영원히 바른 교회가 없다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현상이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그렇게 몸부림했지만 결국 자유주의로 세속화되었다. 소실의 역사에서 다시 새로운 교회가 형성된다고 최정호 목사는 교회사를 이해했다.

루터의 교회, 칼빈의 교회, 스코틀랜드 교회, 프린스턴 대학, 지금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옛모습을 지키고 있을까? 한국의 개혁신학을 대표한다는 총신대학교는 어떤 상태일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두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개혁파들이 있어야 한다. 더 작아지고 적어지는 것이 소실의 역사의 특징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변함없기 때문에, 작고 적은 교회를 통해서 자기 경륜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세상의 변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믿음의 정진을 하면, 주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자기 종으로 이루어 가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