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설명할 때 타인의 견해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한 구원론 강의에서 자기 구원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훈련을 한 적이 있다. 먼저 강의하는 필자의 구원에 대해서 간략하게 제시하면서, 강의 참석자들이 구원 과정(구원 서정)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그 훈련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타인의 구원 설명을 답습하지 않았고,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 신학과 경험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시도했다고 본다. 자기 구원 과정을 몸소 경험한 사람은 루터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은 구원 과정(구원 서정)이 같은 유일한 사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부패된 교회에서 나오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칼빈은 조용하게 탐구하려다가 제네바에서 개혁교회를 이루기도 했다. 믿음의 선진들의 시행착오는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그들의 미완은 우리에게 더욱 겸손과 경책을 준다.

루터는 구원 과정에서 가장 명료하게 준 것은 외부에서(extra nos) 들어온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생소한 의)이다. 그것은 오직 은혜의 구도를 설명한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갑작스러운 변화(subita conversio)는 스스로 깨달아서 할 수 없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런 역사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만약 스스로 깨달았다면 자기 거짓이든지 하나님의 실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절대로 스스로 자기 비참함에서 돌이킬 수 없다. 전적 은혜로 비참한 상태에서 나왔다.

그런데 신비는 비참한 상태에서 나왔지만, 그 비참한 상태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비참한 상태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상당한 거짓말일 것이다. 비참한 상태를 그리워하지 않으려면 도달하기 어려운 상당한 수준이다. 광야 백성이 그랬고, 가나안에서 그랬고,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그랬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서도 그랬다. 교회가 사라져도 마음 아파하지도 않는다.

비참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전하는 자가 전한 복음이다. 그리고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된 신자도 여전히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인격과 사역이다. 그런데 신자가 되어서 비참한 상태를 그리워하는 탐욕을 갖고 있는, 신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지 말라고 외쳐야 할까? 거기 가면 죽는다고 외쳐야 할까?

그렇지 않다. 불신자든지 신자든지 전할 것은 오직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아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하게 된다. 그 거룩의 한 모습이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복음은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속사람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주께서 복음전하는 자의 입에 주신 복음은 사람의 속사람을 회복하고 강건케 한다.

스스로 자기 비참함을 깨달을 수 없다. 그것은 신자 된 이후로도 그렇다. 그래서 주의 백성은 항상 주를 믿으며 주를 의지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날을 그리며 주의 교회를 그리워한다. 구원이 오직 주의 이름에, 주의 성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 날을 궁궐에 거하는 것보다 처마 밑 주의 성소에 거함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비참한 나의 상태에서 구원한 구주께 구원을 받았다. 나의 구주의 이름은 예수이시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는 주이시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33년의 생을 지내신 뒤에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 교회에 주신 복음으로 나를 살리셨는데, 복음 전하는 자의 복음은 천상 보좌에 앉으신 주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Calling). 성령께서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다. 이런 인식은 그 때 되지 않았고, 너무나 오래 뒤에 있었다. 너무나 정확하게 안 것은 목사가 된 뒤,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 였다. 나는 성경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박사를 취득하면서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힘쓰고 있다.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나의 주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는다. 성경교사가 되려고 할 때도 상당한 기도와 헌신과 전도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

나는 구주 예수께 구원받았다는 의식이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나의 전 생애를 던진다. 그럼에도 두려움과 떨림이 강하다. 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탐욕이 가득한 육덩어리에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정진하고 있다. 나의 생명의 주께서 만유의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만유의 주를 믿는 나에게 주신 소명에 의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며 주의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 주의 이름이 폄훼될 때에 항거해야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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