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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서도 능동순종의 의의 전가 사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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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서도 능동순종의 의의 전가 사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 정이철
  • 승인 2019.03.08 13:13
  • 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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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완성자 존 칼빈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의 획득과 전가 사상이 있었을까?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설자인 사도 바울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바울과 칼빈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하였다.

1) 바울과 칼빈에게서 아담이 창조될 때부터 율법이 주어졌고,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받았으며, 훗날 시내산에서 그 율법이 모세를 통해 기록되어졌다는 사상을 찾을 수 없다. 바울과 칼빈은 율법이 인류가 죄 아래 떨어지고 난 후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을 가지시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생산한 이스라엘과의 '하나님 백성 됨의 언약'을 체결할 때 주어졌다고 보았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7.1.)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 갈 3:17)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 롬 5:13)
 

2) 바울과 칼빈은 죄 속에서 살면서 죄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사는 죄인들이 죄와 하나님의 저주를 알게 하려고 율법이 왔다고 보았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7.2.)

“그러므로 율법만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하며 당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서 얻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정죄와 저주이기 때문이다(갈 3:10). 율법은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도, 그 축복과 우리 모든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7.4.)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7.7.)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 롬 7: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 롬 5:13)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사도 바울, 롬 7:7)
 

3)바울과 칼빈은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들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려고 주어졌다고 보았다.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7.1.)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사도는 단언한다 ...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7.6.)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 갈 3:24)
 

4)바울과 칼빈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롬 10:4)의 의미를 모든 율법 조항들에 대한 순종하심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죄인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만는 것이라고 보았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6.2.)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사도 바울, 엡 2:15)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
 

기독교 설립자인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으로 기독교를 다시 회복시킨 칼빈에게서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받았고, 그리스도가 아담을 대신하여 율법을 준수하시어 의를 획득하고 전가하였다는 교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

바울과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과 모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음을 항상 말하였으나, 그것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죄인들의 대표로서 율법에도 흠이 없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결코 칼빈과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복음과는 별도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율법준수의 의)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의 전가 사상은 성령의 회심의 은혜가 임하기 전, 인간의 편에서 회심을 준비하는 과정에 관한 신학을 발전시킨 회중파 청교도들의 ‘사보이 선언’(1658년)을 통해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칼빈은 신앙의 성장과 성화와 관련하여 율법을 가르쳤으나, 에드워즈 등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의 회심의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회중파 청교도들에게는 분명히 율법에 대한 비성경적이고 과도한 가르침과 적용이 있었다.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는 회중파 청교도의 이런 문제점과 관련되어 발전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진정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으로부터 청교도 신학의 과도한 율법주의를 털어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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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사리 2019-03-10 23:43:52
우리에게 율법에서 획득해낸 의를 주시려고 율법을 지키셨다는 말씀은 성경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변적인 합성물이다.

비평1 2019-03-10 14:02:34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오신 분은 율법을 다 지켜서 자신이 의로운 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보여줄 필요 없으면 뭐하러 힘들게 이 땅에 오셨나?
걍 하늘보좌 우편에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
지저분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실 필요도 없으며 힘든 목수일도 하실 필요가 없으며 생선 비린내 쩌는 어부들과 대장놀이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시이며 말씀 자체가 곧 법이다.
그 계시된 법을 지켜 순종하심으로써 자신의 백성들이 보고 깨달아 구원케 하시려고 오셨다.
보고도 모르는게 사람인데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정말 바보 중에 으뜸이다.

초등학교국어교사 2019-03-10 13:49:53
“그 의인이 타락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모든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는 인간이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문장일까?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문장이다.
‘양’이나 ‘가’를 줘야겠다.

철면피 2019-03-10 13:40:43
“칼빈은 아담을 오만방자한 인간으로 보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욕심냈다고 했다. 아담은 불순종이 겉으로 나오기 전에 불순종을 마음 속으로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순종이 겉으로만 나오지 않고 probation period가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셨을까?”

님이나 저와 같은 모든 사람에게는 오만방자한 마음이 없을까요?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당신과 저의 오만방자함을 간과하시고 성령을 주셨겠지요?
하나님께서 당신과 저같은 사람에게도 주시는데 유독 아담에게만 냉정하게 안 주실거라 단정하는 그 마음은 아담의 오만방자함을 넘어 후안무치함을 보는 듯 합니다.

Minn 2019-03-10 07:16:47
기독교강요를 샅샅이 뒤져보지 않아도 칼빈이 능동수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은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회심 후에 쓴 '기독교 강요'에서 제일 첫 장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령께서 계셔야만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모든 지혜는 이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행위언약이론이 롬 5:12-21에서 나왔으며, 거기서 바울이 아담과 주님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 것을 안다. 바울이 그렇게 쓴 것은 아담이 주님과 동급이어서가 아니고, 한 사람으로 인한 범죄와 한 사람으로 인한 죄사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아담과 주님을 같은 선상에서 보며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가 받게 되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 추론을 바탕으로 몇몇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probation period를 주셨다고 지어내는 데까지 나갔다. 그분들이 그리스도를 몰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 이론이 주님을 주님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절대로 아담을 주님과 같은 선상에서 보지 않는다. 칼빈은 아담을 오만방자한 인간으로 보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욕심냈다고 했다. 아담은 불순종이 겉으로 나오기 전에 불순종을 마음 속으로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순종이 겉으로만 나오지 않고 probation period가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셨을까? 그리고 주님만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인데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된다고 이해하지만, 아담은 어떻게 해서 양자가 되는가? 이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을 지지하는 한 신학자 (더글라스 켈리)는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주장까지 한다. 어쩌다가 아담이 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에 그 계획이 확실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시간을 뛰어넘어 반드시 이루어진다. 성도의 구원이 마지막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아는 것은 그분의 주권적 힘에 대한 이해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제물되심은 모든 것을 같이 결정하시고 계획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그것은 메이천이 말하는 아담에게 적용된 'probation peiod'가 주님에게 적용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를 교회의 죄사함과 양자됨을 위해 보내셨을 때 의인을 보내셨고, 그 의인은 의인으로 남는다. 그 의인이 타락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모든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는 인간이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아담같은 존재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다. 인성을 무시하고 신성만 강조해서도 안되지만, 인성을 너무 강조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무너진다. 이 밸런스를 깨는 것이 이 능동순종이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이 요한복음과 다른 서신서들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 = 하나님 이다. 어떤 분이 그리스도 = 율법이라면 율법을 다 지키시는 것을 보여주셔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오신 분은 율법을 다 지켜서 자신이 의로운 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결국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고 율법은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을 판단하라고 준 잣대가 아니다.
율법 앞에 흠이 없으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하시고, 율법의 참 의미를 실행하시고 보여주신 것이 주님이시다. 그 사랑(율법의 참 의미)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러나 모세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자신이 완벽함으로 성도에게 그 의를 전가시키셨다는 주장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오류로부터 출발한 오류 많은 이론이다. 칼빈을 인용하여 이 이론의 타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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