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수 목사


정이철 목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노승수 목사가 토론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오류들을 주장하였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다.

1)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적 순종을 했다.
2)그리스도가 자기의 속죄를 스스로 이루었다.
3)종교개혁의 핵심은 능동적 순종의 의이다.
4)예수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통해서도 죄책이 다 제거되지 않고 오직 교회에 허락한 은혜의 수단을 실천하여 이루는 성화를 통해 죄책이 제거된다.
5)원죄와 오염이 부모를 매개로 자식에게 전달(죄의 혈통유전설)된다.

여기에 대해 노승수 목사는 “노승수 ‘정이철 씨는 협잡과 음해를 멈추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하여 반박하였다. 안타깝게도 노 목사가 계속 미숙한 신학적인 주장을 함으로서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노 목사에게 독자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저급한 표현을 사용하지 말자고 충고하고 싶다. ‘협잡’, ‘음해’, ‘인터콥 옹호자’ 등의 표현들은 지금 오고가고 있는 신학적 토론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노 목사 자신의 이미지를 저하시키고 독자들의 공감도를 떨어뜨리게 되는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다. 정 목사에 대해 ‘협잡’, ‘음해’, ‘인터콥 옹호자’ 등의 비본질적이고 상황을 왜곡하는 표현들을 사용할 때, 조금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인천경찰서 형사에게 찾아가서 고소장을 접수해 달라고 떼쓰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좋겠다. 노 목사 자신이 자주 말하는 ‘명예훼손의 죄’를 지금 스스로 범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제 노 목사가 반박한 신학적인 내용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고자 한다.

노 목사의 반론 1에 대해>

“먼저 정이철 씨는 ‘노승수는 1)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적 순종을 했다. 2) 그리스도가 자기의 속죄를 스스로 이뤄었다.’고 한 내용에 대한 변증이다. 확실하게 말하지만 1)과 2)는 정이철 씨의 생각일 뿐이지, 내 글 어디에서도 그런 주장은 없다.” (노승수 목사)

노 목사의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노 목사는 자신이 쓴 다음의 내용을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그가 이루신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 곧 행위언약에 대한 성취인 것이죠.”(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싸이트, 2017.12.15. 그리고 노승수 목사의 페이스 북, 2017년 12월 14일)

“이 때 칭의란 바로 그리스도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노승수 목사의 페이스 북, 2019년 2월 2일)

노 목사는 분명히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능동적 순종을 했다고 했고, 그것을 지적받은 후에 쓴 해명의 글에서 또 다시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셨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는 의미의 글을 분명히 썼으면서 무작정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노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의도가 그런 뜻일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노승수, 정이철 서철원을 안셈과 피스카토에 비유한 적 없다”라는 제목의 반박글을 통해 루터의 글, 바빙크의 글, 벌코프의 글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는 자신의 이전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노 목사가 벌코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한 부분을 여기에 인용한다.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벌코프의 표현을 토시하나 안 빼고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은혜 언약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동적이고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을 통하여, 행위언약이 규정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고 실제로 충족시키셨다.’” (노승수 목사)

대체 무엇이 노 목사의 진심인가? 예수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율법에 순종했다는 노 목사의 처음의 주장은 변했는가? 그대로인가? 노 목사는 이번에 올린 반박글에서 강웅상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또 다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가 칭의 되신 사건으로 보고 있다. 성부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은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구속사역을 의롭게 여기신 사건이다”(노 목사 인용한 강웅상 교수의 책의 내용)

그리스도가 칭의되었다는 것은 곧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대체 그리스도가 왜 칭의를 얻으셔야 한다는 것인가? 성자께서 타락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갚으시려고 죄 없는 사람이 되시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졌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심은 예수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대신 피 흘리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선포하심이다. 예수는 우리의 칭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결코 예수는 자신의 칭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그 말이 강웅산 교수의 말이건, 외국의 어떤 학자의 말이건 간에 옳지 못하다. 노 목사는 그 정도의 신학적인 분별력이 없는 것인가?

“아마도 정이철 씨에게 걸리면 강웅산 교수나 개핀 교수도 이단화하지 않을까 싶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모르면 겸손하게 배우거나 할 일이지 사방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노승수 목사)

노 목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이 강웅산 교수까지 끌고 들어갔다. 계속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될 법한 다른 사람들의 모호한 말을 끌어다가 이용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능동적 순종(율법준수)하셨다는 자신의 이전의 말이 오해였다고 말했으면서, 동시에 그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이런 이상한 자세이다. 노 목사는 하나를 택하기 바란다.
 

노 목사의 반론 2에 대해>

“정이철 씨가 다니는 PRTS의 조엘 비키 교수가 서신을 통해서 자신과 모든 교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다는 역사적 장로교회의 교리를 지지하며 이것이 주류 장로교회의 신학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노승수 목사)

조엘 비키 이야기는 대체 왜 하는 것인가? 지금 서철원 박사와 정이철 목사는 17세기 회중파 청교도들이 발전시킨 지극히 사변적인 ‘능동적 순종의 의와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신학을 우선적으로 따라가는 청교도주의자 조엘 비키의 말을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리고 조엘 비키의 글 어디에도 노 목사처럼 십자가와 분리된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지지한다는 말이 없었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으심 외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와 죄와 형벌을 없애주심이 의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모든 율법준수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효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건이지, 결코 십자가의 희생과 구별되는 별개의 의가 아니다.

만일 조엘 비키는 정 목사처럼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십자가 외의 별도의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의 획득 전가를 가르친다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노 목사 등이 처음부터 정 목사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개념은 인정할지라도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 획득과 전가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 목사의 본래의 지적은 노 목사가 종교개혁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노 목사는 자신의 페이스 북(2월 2일)에 올린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다” (노승수 목사)

“이 지점을 생각하면 종교개혁 신학이 그 출발선상에서부터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할 경우, 결국 이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되냐면 우리의 행위가 대신하게 됩니다.” (노승수 목사)

“결국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신학적 위치가 바로 종교개혁 이전의 세미-펠라기안들의 위치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 인정하든 안하든 행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승수 목사)

종교개혁은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든 천주교의 행위구원론을 배격하고 교회를 이신칭의 신학 위에 세우기 위해 일어난 기독교 회복운동이었다. 그릇된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통한 의의 획득과 전가 교리가 어째서 종교개혁의 핵심과 관련되었다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불가하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믿지 않으면 펠라기우스도주의로 기울어진다는 주장의 근거를 무엇인가?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율법과 모든 면에서 흠이 없으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의와 죄사함을 주셨다고 믿는 성경적인 신앙이 왜 펠라기우스주의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인가?

노 목사의 나머지 몇 가지 반박에 대한 반론을 다음에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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