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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신학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의 산물
서철원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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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8  20: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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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삶: 낮아지심의 두 번째 단계; 의의 성취

고난의 삶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두 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성육신 자체와 고난의 삶과 십자가가의 죽음과 지옥강하로 이루어진다. 이 비하 상태에서 한 그의 사역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었다. 고난의 삶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계속되었다. 출생도 보통 인간이 당할 수 없는 굴욕적인 출생이었다.

또 그의 모든 삶은 죄악과 영적 세력들의 공격과 백성들의 배척과 지도자들의 미워함과 시기에 의해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되 연속적으로 당하였다.

그러나 고난의 삶은 고난으로 이어진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의 삶은 의의 성취에 이르게 되었다. 곧 그의 의의 성취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 흘려 죗값을 갚으셔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의의 성취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율법을 성취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는 율법의 성취요구 곧 율법을 범함으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그의 죽음으로 갚았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죗값을 갚으므로 죄의 용서를 가져왔다. 곧 그가 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가져오는 그런 능동적 순종이 아니다. 전통적 신학이 제시하는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적 산물이다. 능동적 순종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그리스도가 스스로 지켰으므로 능동적 순종이고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죽으셨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피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런 것은 성경에 맞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전혀 맞지 않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의를 얻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요구 곧 범죄하므로 그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따라 피 흘림으로 죗값을 갚아 용서를 가져오셨다. 이 죗값을 갚아 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이다. 이 의 곧 죄용서를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다. 율법의 성취는 죗값을 갚으므로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이상 없도록 한 것이다. 그 면에서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쿰란, 2018),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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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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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n 2019-03-01 05:22:22

    서박사님 설명에 공감하지만, 행위언약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의는 단지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습니다. Gresham Machen이 그 예입니다. 지금 어떤 신학교도 이 사람의 주장을 반대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창시자이니까요. 이 분이 그 시대에 개혁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신 건 사실입니다. 서박사님의 설명은 그런 사람들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일 필요한 것은 행위언약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보시지 않으므로 (렘 31;31) 제거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이 이론을 다른 전제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능동/수동으로 나누면 안 되고, 순종을 하나로 봐야합니다.
    부족하지만 제 생각은 우선 예수님께서 율법 전에 계셨고, 율법을 유일하게 아시고 (자신이 만드셨음으로), 그 분의 삶 자체가 율법이라는 전제와, 여기서 율법은 문자적인 법이 아닌, 그 안의 참 뜻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라는 것이 전제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율법이었고 (그분께서 율법의 화신이므로), 그분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라는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낙원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으로 이민 가려고 그 이민 조건을 열심히 알아보고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 못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왕, 즉 그 조건을 만드신 분이 오셔서 그 조건의 참 뜻을 알려주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신 다음,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온다고 약속하시고 그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왕 자신이 조건을 맞추고 낙원으로 들어갔냐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건을 충족했어야지 호적에 들어간 사람들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격입니다. 왕의 호적에 들어가면 당연히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지금 그 조건을 만드신 왕에게 조건을 충족시켰냐고 따지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 밑바탕에는 그 왕을 왕으로 생각하기 싫고, 자신들처럼 똑같이 생각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제가 쓴 댓글 중에 이 이론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적으로 보게 한다고 했는데 저는 아직도 같은 생각입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성령님 인도하심으로 2019-02-28 21:19:24

      평신도님 댓글 내용에 있던 한 의로운 행위로(one act of righteousness 롬5:18) 의의 성취가 이루어졌군요.신고 | 수정 | 삭제

      바른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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