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신학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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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신학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의 산물
  • 서철원
  • 승인 2019.02.28 20:48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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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삶: 낮아지심의 두 번째 단계; 의의 성취

고난의 삶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두 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성육신 자체와 고난의 삶과 십자가가의 죽음과 지옥강하로 이루어진다. 이 비하 상태에서 한 그의 사역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었다. 고난의 삶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계속되었다. 출생도 보통 인간이 당할 수 없는 굴욕적인 출생이었다.

또 그의 모든 삶은 죄악과 영적 세력들의 공격과 백성들의 배척과 지도자들의 미워함과 시기에 의해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되 연속적으로 당하였다.

그러나 고난의 삶은 고난으로 이어진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의 삶은 의의 성취에 이르게 되었다. 곧 그의 의의 성취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피 흘려 죗값을 갚으셔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의의 성취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율법을 성취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는 율법의 성취요구 곧 율법을 범함으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그의 죽음으로 갚았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죗값을 갚으므로 죄의 용서를 가져왔다. 곧 그가 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가져오는 그런 능동적 순종이 아니다. 전통적 신학이 제시하는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적 산물이다. 능동적 순종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그리스도가 스스로 지켰으므로 능동적 순종이고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죽으셨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피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런 것은 성경에 맞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전혀 맞지 않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의를 얻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요구 곧 범죄하므로 그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따라 피 흘림으로 죗값을 갚아 용서를 가져오셨다. 이 죗값을 갚아 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이다. 이 의 곧 죄용서를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다. 율법의 성취는 죗값을 갚으므로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이상 없도록 한 것이다. 그 면에서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쿰란, 2018), 147)
 

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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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성 2019-03-04 16:37:19
제가 그랬습니다. 엎드려 구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깨닫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는 특별한 눈이 있어서 나에게만 이것이 질문이 되고 의문이 된다는 생각은 교만의 지름길입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질문이 많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신학자들의 글들을 보고 말꼬리잡기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십니까? 우선은 배우고 공부하는것이 우선입니다.

정진성 2019-03-04 16:27:12
지금 현재 나에게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신학적 의문이 생긴다면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먼저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한 개인이 역사적 교회보다 지혜로울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타락하였다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아는 성도는 함부로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교리를 사변적이라고 취급하기에 앞서서 그들이 세워놓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며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아마 새로운 이론을 만드신다면 이미 역사적으로 이단정죄 받은 옛이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진성 2019-03-04 16:18:52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종의 형태를 취하셨고 그 종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셨다라는 표현이 나온것입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하지만 죄인의 생명을 살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죄인을 대신하여 철저하게 죄인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대속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능동적 수동적으로 나눠설명하게 된 역사적 계기를 모르셔서 질문이 자꾸 생기시는겁니다.

Minn 2019-03-02 12:44:16
제 말과 능동/수동 순종 이론이 같다고 생각하시다니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열심히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답하지만 제 글을 읽고 깨달으신 분들은 몇몇 있을거라 희망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습니다. 능동/수동 순종 이론은 노목사님 같은 분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법을 지켰다는 주장이 나오게 합니다. 제가 정리한 이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율법이라고 말하니까 헷갈리시나 봅니다.

단 한마디로 말하죠. 예수님은 법을 지키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법을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입니다.

사도 바울이 줄기차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은 아담도 예수님도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에 빠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창세 전에 선택한 자들은 죄가 사해졌다가 바울의 주장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2019-03-01 19:50:15
답답한 분...
사도 바울이 줄기차게 아담과 예수님을 왜 비교했는지를 제발 생각해봐요.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고요.
그리고 “율법 아래에 나신”의 의미도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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