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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나 누구의 말들보다 성경의 단 한 줄이면 족하다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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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7  00: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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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철 목사와 조엘 비키 교수(미국 미시간 주, 청교도개혁신학교 학장)

미국의 내가 다니는 학교의 학장님에게까지 메일을 보내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지지를 구하는 열정이 너무도 대단하다. 나도 조엘 비키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고, 프롱크 교수에게 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두 시간만 운전하면 직접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만일 조엘 비키 교수와 신학이 다르면 나보고 이 학교를 떠나라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없는 것을 만들거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청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이 진실로 성경적 진리인가 아닌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청교도들이다. 1646년에 함께 웨민고백서를 작성했으나 후에 웨민고백서를 실질적으로 떠난 회중파 청교도들이 1658년에 '사보이 선언'을 작성하면서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을 명시하였다. 프롱크 교수나 조엘 비키 교수는 청교도 신학 바탕에서 개혁신학 노선에 서 있는 사람들인데, 굳이 그들에게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서철원 박사님에게 이전에는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셨는데, 최근의 작품 <교의신학 전집>에서 수정한 이유를 문의해 보았다. 서 박사님은 자신이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신학전통을 따르는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배웠으므로 초기에는 그렇게 가르쳤으나, 후에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잘 맞지 않음을 깨닫고 폐기하셨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구분은 성경적 근거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얻은 죄 용서만이 우리의 의이고, 그리스도가 율법을 순종해서 얻은 의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준수하여 의를 이룬 것이 아니고, 율법의 요구 곧 죄 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그의 피로 죗값을 갚으심만 성립합니다. 17세기 사변적인 신학자들이 잘못 공식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여 죗값을 갚는 것만이 성경과 바울이 말합니다.”

프롱크 교수도, 조엘 비키 교수도, 청교도 신학교 모든 교수들도 ... 계속 이렇게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든 사변적이고 무익한 변론에 기대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한 들 무슨 소용일까?  이 두 분의 교수님들이, 특히 조엘 비키 교수는 자신처럼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정이철 목사처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데, 왜 이 분들을 자신의 편으로 엮는 것인가?

무엇보다 성경의 한 줄이면 족하다.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전가하신다는 말씀이 있는가?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죄의 용서가 우리의 의이고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부활을 높이는 부활종교 사람들과 투쟁했었는데, 이제는 기독교의 절대적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약화시키고 율법 순종을 비정상적인 강조하는 사람들과 투쟁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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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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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다운 2019-02-28 15:48:08

    그러는 정이철 목사님은 그간 늘 서철원박사를 기대며 대다수의 신학 사상을 주장하지 않으셨는지요.신고 | 수정 | 삭제

    • 증인 2019-02-28 10:56:34

      서철원 박사님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할 성경구절 한 구절만 올려주시면 ... good신고 | 수정 | 삭제

      • 정일철 2019-02-28 10:31:21

        정이철 목사에게 캐논은 성경이 아니라 서철원 교수의 가르침임..신고 | 수정 | 삭제

        • 수준하고서는 ... 2019-02-27 13:41:55

          "예수가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율법을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완벽하게 지킨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얘기한다 (행 2:23-32).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위와 같이 로마서에 적고 있다."

          -->>완전 또라이 해설이구만요. 예수님이 율법을 흠없이 지켰으니까 하나님이 그 몸을 부활시켰다고요? 완전 종교하나 새로 만드는 구만요.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피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시켰으므로, 하나님이 그 피를 받으시고 진노가 해소되었음을 보이시는 차원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몸을 살리신 것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다니 .... 이것이 능동순종파의 수준이구나!신고 | 수정 | 삭제

          • 로고스 2019-02-27 13:03:28

            정이철 목사님~~
            어제 저의 댓글이 많이 달렸던 칼럼이 없어졌던데 왜 삭제하셨나요?
            목사님께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논의에 참여한 분들의 수고는 아랑곳하지 않는군요.
            혹시 댓글 중에 다른 분들이 보면 안될 내용이라도 있었나요?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능동 수동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분들을 위해 퍼 온 글을 올리니 읽으시고도 깨닫지 못하시면 걍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 서신에서 발견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잠시 살펴보자.
            로마서의 다음 말씀을 눈여겨 보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내줌(죽으심)과 살아나심(부활)에 각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죽으신 것은 우리 범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서라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이것을 답하기 위해서는 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예수는 신인(神人)이니까 다시 사셨다”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예수가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율법을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완벽하게 지킨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얘기한다 (행 2:23-32).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위와 같이 로마서에 적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을 우리의 의롭다하심과 연관을 짓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말씀에서 또 드러난다.

            한 사람이 [아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예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물론 여기서 말하는 순종을 십자가 사건으로 한정 지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우리의 구원과 관련짓고 있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만일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뿐이라면 지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골고다로 가시는 것 만으로도 구속의 성업을 달성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신 것은 죄 가운데 잉태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들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은, 우리의 칭의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생에 걸친 완벽한 율법의 순종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 된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의 사실이 우리 칭의의 근거이다.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2-27 06:58:09

              마 22:37-39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포함한 공생애 전체가 율법에 맞는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다 행하셨고 (히 10:7) 그것은 이웃인 우리를 위한 삶을 사셨다. 성도는 성경에서 친구, 가족으로 비유되고, 예수님의 몸으로 설명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셨고, 그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것의 절정은 십자가로 나타났고, 예수님께서도 다 끝났다 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다 행하셨다고 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삼위일체 제 2위격의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일이며, 그것이 창세 전에 계획되었다. 인간의 몸으로 우리처럼 낮아지신 것은 맞다. 그리고 유혹을 당하신 것도 맞다. 그러나 영은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 안에는 불순종이라는 말은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모두 행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 분과 연합될 수 없다. 연합되어야지만 우리도 율법의 두가지를 행할 수 있다.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들에 속하게 됐을 때 그것이 구원이다.

              행위언약의 문제는 아담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마치 그 언약은 영원히 지속되고, 예수님은 그 언약의 조건을 맞추기 오신 것으로 해석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아들을 통한 교회의 구원이다. 아들 안의 교회가 아들이 높아지면서 같이 높아지고, 아들의 신부가 되게 하시는 것이 계획이다. 아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비록 죄가 없는 상태이더라도 율법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지키지 못하고, 양자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 아담이 율법을 사랑했다면 어떻게 어길 수 있었겠나? 아담은 율법을 사랑하지 않았다. 칼빈도 어거스틴도 아담의 타락 전의 pride를 언급한다. 기독교강요 2권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이 오만이 악의 시작이라고 하였고, 칼빈도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원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타락 전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행위언약이 아니라 오직 은혜언약(성령을 약속하심)만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렘 31:31을 통해 새 언약이 구약을 파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헌 포도주와 새 포도주를 말씀하실 때에도 나타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다. 우리는 성령없이 칭의를 받을 수 없다. 양자됨과 성화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계셔야지만 인치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 연합은 창세 전에 선택된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고 그 어느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신고 | 수정 | 삭제

              • 김재성교수의 글은 2019-02-27 06:30:52

                정이철 목사님은 능동적 순종 개념 자체를 이단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율법에 순종하심이 귀하고, 그것이 십자가의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시는데 중요한 구성요건이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십자가의 의와 구별되는 별개의 의가 율법순종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상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십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2-27 05:45:53

                  힘 내시기 바랍니다. 개혁교리가 나왔을 때, 만든 사람들은 모두 교리가 성경과 같은 권위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 후에 성경에 더 가까운 교리가 나오면 수정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후죽순같은 교리들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역사를 통해 우리는 단지 몇 개의 교리들만 교육에 쓰이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교리들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는마냥 논쟁도 할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과 동급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The Three Forms and Unity 를 교회에서 가르쳐야 된다는 주장이지만, 그 내용 중에 보충되거나 수정되어야 할 내용이 있다면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웨민 같은 경우는 수정본들이 성경에서 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우리는 성경이 있기에, 또 성령께서 인도하시기에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잘못된 성령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 것을 알겠고 그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림을 더 크게 보신다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저도 신학과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 별로 되지 않기에 이 사이트가 아니었다면 행위언약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행위언약이 모세언약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렘 31:31도 첫번째 언약이 모세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행위언약, 능동/수동적 순종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잘못 이해했기에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성경을 통해 비로소 그 이론들의 오류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In Christ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되었고, 에베소서가 이해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신앙의 단계가 숨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율법과 죄, 그리고 개인구원을 이해시키고 그 이후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목회자로 살다 보면 제명되진 않을까, 이단으로 몰리진 않을까, 빈털털이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말씀보다는 세상과 타협해야 합니다. 차라리 바울처럼 천막수리하며 먹고 살더라도 타협하지 마십시오.
                  저는 놀라운 생각이 듭니다. 이 행위언약 이론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부터 드는 생각은 행위언약, 능동/수동적 순종 이론에 관한 기사가 많이 있었는데, 성경구절이 그리 많이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론들 자체가 성경의 뒷받침이 미미합니다. 그래서 이 기사의 제목이 참 와 닿습니다. 성경의 한 줄 말씀이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 책 한권보다 낫습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분명하게 비교됨 2019-02-27 04:47:00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심이 능동적 순종이고 이를 율법준수라고 보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심이 수동적 순종이고 이를 대속이라고 보는 것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한 (전통적)해석이라면,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이 곧 의이며 율법의 요구를 완성함이라는 서박사님의 견해와 비슷하며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바로 능동적 순종인 율법의 준수가 모세의 율법준수이고 의이며 끝까지 순종인가 하는 것이다.
                    다르게 순서를 옮겨도 율법의 준수가 의이며 모세의 율법준수이고 끝까지 순종인가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해도 율법을 지키심이 의인가 대신 죽으라는 뜻대로 대신 죽으심이 의인가 하는 것이다.

                    프롱크가 아담 안에 새겨져 있다는 율법이 대신 죽으라는 뜻대로 순종하심인가.

                    능동적 수동적 순종 주장과 서박사님의 주장은 다르다.

                    어느 쪽이 성경에 부합하는가?

                    서박사님의 주장대로 하여도 인간의 행위가 얻을 수 있는 틈이 있는가?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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