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께서 율법에 순종하셨음을 당연히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능동적 순종으로 표현하는 용어도 수용한다. 예수님의 생애 끝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수동적 순종으로 표현하는 용어도 수용한다. 수용하지 않는 것은 능동적 순종으로 의를 얻으시어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면 십자가 중심의 복음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이 우리의 ‘의’이고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받아야 형벌을 면제받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이고,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피’이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핵심도 메시야가 율법을 준수하여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신구약 성경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 죽으심에서 구원이 나온다고 한다. 성경 어디에도 메시야가 율법을 준수하여 의를 획득하신다는 말씀이 단 한 줄도 없다.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의 의로 우리를 의롭게하신다는 주장은 오직 사람이 만든 신학과 교리에 근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받았다고 이해하는 ‘행위언약’ 사상이 그 핵심적 근거이다.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한 계명준수에 실패하여 저주받았으므로,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시어 완벽한 계명 준수를 통해 행위언약을 복구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의 자격이 되는 의를 전가하여 주셨다고 한다(능동적 순종의 의). 그리고 그것과 별도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해결했다고 가르쳤다(수동적 순종의 의).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구원의 원리를 율법의 의와 십자가의 속죄, 두 가지로 가르치는 곳이 없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의와 속죄를 주신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외의 다른 무엇이 우리에게 의를 준다고 하면, 이미 그것으로 십자가가 무너진다. 그래서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와 의미는 수용할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어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었다는 사상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

율법에 대해 성경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 있는 개관적인 사실들은 무엇일까? 첫째, 율법은 아담의 타락 후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율법은 ‘첫 언약’(선악과 약정)을 배반하여 저주받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을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죄인들의 죄를 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설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그런데 그리스도의 율법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율법 해석과 신학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의 청교도주의 목회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크르넬리스 프롱크이다. 그의 글에는 보석 같은 내용들이 엄청 많다. 동시에 복음과 율법에 대해 바울의 해설과 다른 내용도 보인다. 프롱크는 인간이 율법을 모두 지킬 가능성은 낮았을지라도 율법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은 조건적인 구원을 약속합니다. 오직 율법에 완벽히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행위언약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9)

객관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율법이 구원을 준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계시에 대한 해석기관이었던 사도 바울은 율법 속에 구원을 주는 기능이 있다고 전혀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언제나 율법이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고 가르쳤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성경은 언제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개혁신학자들은 구원을 설명할 때에도 십자가의 희생 보다는 율법을 중심으로 이야기함으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복음의 영광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프롱크의 말을 보자.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떻게 회개가 일어납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고, 우리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입니다.”(프롱크, 26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프롱크, 268)

“죄인은 자신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 죄인에게 전가됩니다.”(프롱크, 236)

 


그러나 기독교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최종적 해설기관이었던 사도 바울은 전혀 율법을 중심으로 구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구원은 언제가 십자가 중심이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최종적 계시해석 기관이었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 보혈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율법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가로 몰아가려고 왔던 것이다. 문론 율법의 제 3 기능도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

그러나 이 말은 구원받은 신자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율법을 계속 세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율법의 내용뿐 아니라 정신까지 다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또 말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구원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시종일관 오직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히 9:28)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의로 우리를 의롭게하신다는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으나, 아담에게 영생을 위한 율법이 처음부터 주어졌다는 유추에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이 받은 그 율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주어졌다는 더 심한 사색과 변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죽었으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심으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교리가 형성되었다. 예수님의 율법준수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프롱크도 아담에게 처음부터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프롱크에게서도 그 내용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율법이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을 뜻합니다.”(프롱크, 25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프롱크, 257)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율법은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아담은 율법을 바라볼 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사랑했습니다.”(프롱크, 26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시내산에서의 율법조차도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율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돌판에 새기셨다는 것입니다.”(프롱크, 258)

그러나 아담에게 율법이 처음부터 주어졌고, 그 동일한 내용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졌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성경 어디에도 아담에게 선악과 약성 외에 율법들이 주어졌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둘째, 정말 하나님이 처음부터 아담에게 영생을 얻도록 율법을 주셨다면, 그 내용이 훗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내용과 같은 수가 없다. 그때 아담은 순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전혀 죄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였고, 완전한 자유의지자였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영혼의 의지와 육신의 성품이 투쟁하지 않는 순정상태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타락한 상태였다. 

아직 죄를 범하지 않은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방법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고,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가 없고,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이 같은 수는 없는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불완전한 아담에게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이 주어졌다는 성경적 근거도 없지만, 만일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훗날 그대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매우 억지스럽다.

그러나 웨민고백서 19장은 아담에게 주어진 율법이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니, 오히려 성경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데 짐이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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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