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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약화시키는 모든 이론을 경계하라!
김만옥  |  potentia-de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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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8  00: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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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복음이다. 우리시대에는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분이 아니라 율법의 저자이시다(마 5 : 17). 율법의 저자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소 그 과정을 겪으셨다.

아직까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어휘를 창안한 학자의 이름은 찾지 못했다. 칼빈도 아니고 튜레틴도 아니다. 그들은 요즘 뜨거운 논쟁을 이끌고 있는 <바른믿음>의 정이철 대표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죽음’으로 기독교 구원의 핵심적 요건을 주장했다.

바빙크는 능동적 순종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 보다 더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교리였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구속교리를 약화시키는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 경계하였다. 요즘 자신의 나쁜 이론을 더하여서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다가 <바른믿음>의 정이철 대표로부터 심각하게 비판당하고 있는 어떤 분에게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속죄와 구속 강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능동적 순종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구속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요인이 된다면, 그 자체로서 성경적이지 못하다.
 

   
 정이철 목사 / 바른믿음 대표


현재 우리 시대에 논란이 되고 있는 능동적 순종에서 획득한 의의 전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준비의 필요성, 구원을 받았지만 마지막 심판에서 정죄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탈락 가능성 등 다양한 이론은 개혁신학이 기본 전제에 맞지 않다.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네덜란드 개혁파는 한국에 와서 서로 융합되었다고 보여진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장로파, 개혁파를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두 노선의 신학, 즉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노선과 개혁파의 3 개의 문서 사이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 차이가 있다면 행위언약에 대한 것인데, 개혁파 신학자들에게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구도는 올바른 신학 이해를 갖기 위해서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구도이다. 지금 현재의 두 개의 언약 구도는 크게 기존의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그리고 서철원 박사가 주장하는 ‘첫언약’과 ‘새언약’, 그리고 클라인, 마이클 호튼 등이 주장하는 ‘창조언약’과 ‘은혜언약’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교회나 인간의 공로를 구원 과정에 개입시키지 않도록 강조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종교개혁 사상의 구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중 은혜(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시작)에 있다. 루터는 Simul Iustus Et Peccator으로 회개를 강조하며 성화를 주도했고,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하며 성화를 주도했다.

종교개혁의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택자의 구주로 확정함과 동시에 연합, 그리고 거룩한 기관으로서 교회 설립이 핵심이었다. 개혁파 그리스도론은 구원의 신비에 대한 자기 고백을 요구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도록 촉구했다. 한국교회는 선교지이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에서 형성된 개혁파 신학과 상당히 다른 환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과 연합된 지체로서 은혜를 증진하는 원리는 변할 수 없다.

개혁파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고 교회론으로, 신자에게 고난의 신비가 깊어지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언약을 준수하도록 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은 신자에게 고난의 흔적을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진되도록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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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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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좋은 글입니다. 2019-02-08 10:38:54

    참 좋은 제목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그 효과를 허물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위험한 일들이지만 이것들은 신자들의 무지를 이용해서 놀라울 정도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모든 논쟁은 십자가의 구속사역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수하심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영이 그 심령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은 모신 자들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성도사이의 중보자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다시금 나타납니다. 그것이 이단들입니다. 교회가 혼란해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이 중보자를 자처하는, 그리스도의 지위를 참칭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지위를 다시 죄인의 지위로 전락시키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임재(臨在)하심입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표, 증거입니다(엡1:13-14). 고로 성도의 칭의(稱義)의 근거는 성령의 내주(內主)하심,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성화의 근거도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입니다. 성도의 성화는 성령이, 하나님이 하십니다. 물론 그 성도와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행위구원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말씀과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구원과 성화는 그래서 동시에 시작되고 함께 이루어 갑니다.


    고로, 칭의의 근거에 대해서 법정적 칭의나 관계적 칭의(유보적 칭의), 조사 심판론들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사심판론은 수용하기 어렵지만 관계적 칭의나 법정적 칭의는 일면의 타당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성화에 대해서 약한 면이 있습니다(고로 구원파라고까지 비판을 받습니다). 관계적 칭의는 이신칭의로 인한 성령의 인(印)치심이 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임재적 칭의)은 양자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단계인 십자가의 구속(救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 구속함이 있기에 죄인이 의인이 되고 거룩해지니 성령이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되지만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성령의 내주(內主)입니다. 그가 성화되어 간다는 증거도 내주(임재하심)입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도가 명확하게 정립해야 할 신학적, 신앙적 좌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강조가 예상보다 적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단들과 중보자를 자처하는 직통계시나 각종예언사역자들과 은사사역자들과 각종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파고드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생각됩니다. 교회를 건강하게 못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생각됩니다.

    물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도가 의롭다 할 수 있지만 삶이 언제나 성결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성도의 칭의 문제와 성결한 삶은 또 다른 문제라고 봐야 하고 양자를 같은 의미로 매치시키는 것은 성결교의 영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가 아는 루터는 맥주 광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비난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차원이 달라집니다. 성경 말씀과는 무관하게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중보자의 존재를 소멸시키고 성도와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정립되는 것이고 그것을 더욱 더 강화시키는 게 목회자의 사명인 말씀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사역보다 중보자적지위로 나서려는 경향이 한국적 정서상 다분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 환경, 역사적 문화적 환경으로 그렇고 이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지 못하고 성도를 아들에서 다시 종의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과오가 될 수 있습니다(이것은 구원론을 혼동케 하기도 합니다. 칭의 논쟁을 다시 건드리게 됩니다).

    축도에 대해서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중보자의 축도가 불필요합니다. 중보자 가 아닌 동역 자들의 축도는 가능합니다. 권장되어야 합니다. 중보자적 지위의 축도와 동역자지위에서의 축도의 구분이 한국교회는 없습니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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