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16년에 김세윤 교수의 신학에 대해서 많은 탐구를 했다. 그 결과를 2017년에 <현대 칭의론 논쟁>(CLC)을 출판했다. 이 신학담론의 장을 위해 <바른믿음>(대표 정이철 목사)을 활용했다. 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를 “유보적 칭의”라고 최덕성 박사께서 정립하면서, 한국 교회는 유보적 칭의와 구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한 담론으로 뜨거웠다. 이제 우리는 김세윤의 칭의를 “유보적 칭의”라고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칭의’에서 ‘의’라는 개념 이해로 논의가 확장되면서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라는 개념이 있고, 루터의 개념인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 개념을 갖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남은 죄’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신자이지만 여전히 옛사람을 가진 존재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개념에서 성화를 강조한다는 명분으로 종말에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이 아닌 성도의 견인을 믿는 진영에서 다시 분화된 이해가 발생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하는 이유는 이전의 믿음의 동료가 후에는 갈등하는 동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 논쟁에서는 정통에 섰었으나 기독론 논쟁에서는 이단의 자리에 선 위인들이 있었다. 고대교회의 신학 이해는 너무나 세밀해서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시대는 예수만 믿고 구주로 인정하면 바른 믿음으로 판정한다. 그러나 고대교회에서는 정통과 이단 모두가 예수를 구주로, 믿음의 대상으로, 하나님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유보적 칭의 이해 뒤에 다시 다른 논의가 전개되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신학 이해가 더 깊어지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있다. 그러나 신학논쟁은 교회분열을 초래하고 복음전도 열기를 소진시키기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논쟁이 격화되면 그리스도인은 논쟁을 중지하고 복음전도, 즉 예수의 이름을 증언할 것을 서약하고 중지할 것을 제언했었다. 예수 믿음이라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 수준이 선진 기독교 지역인 유럽과 미국에서도 긴밀하게 필요한 수준이라고 판단되는 비참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의’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 간략한 이해를 제시하려고 한다. 의에 대해서 담론을 제시하려면, 먼저 의에 대한 자기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의를 ‘생존권’이라고 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생존권을 획득한 것”이 구원이다.

서 박사는 ‘의’는 성경대로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며 어떤 행위도 개입되지 않도록 주의시킨다. 주 예수께서 속죄제사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고(satisfactio) 자기 백성을 획득하시고(구속하시고, redemptus)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셔 복음을 선포하여 교회를 설립하셨다고 제시한다. 현세에 하나님 앞에서 생존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복음과 성령’뿐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논의가 확대되면서 미로(迷路)에 갇힌 것 같다. 메이천 박사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큰 영향력이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의 가치와 ‘신자를 체휼하시는 긍휼’로 이해해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 조항을 준수한 ‘능동적 순종으로 획득한 의’를 전가시킨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에게 수여된 의는 오직 보혈의 공로로 ‘내주하는 성령’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다(롬 10:4).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처럼 율법에 부착된 제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며 산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사는 인생이 복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율법 아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다. 율법 아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원수도 전혀 반박하지 못하도록 한 하나님의 공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까지 가시는 길에 겪으신 고초의 생이 복된 것은 우리의 죄사함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인 “나의 죄과가 복되다”(o felix culpa mea)는 고백으로만 말할 수 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주의 말씀을 따라서 주의 이름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뿐이다. 그 이름을 전파할 때 그 ‘의’가 주의 백성에게 전달된다. 주께서 자기 복음을 들어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의를 전가시키신다. 이것은 소명이고 중생이고 회개이고, 믿음이고, 칭의이다.

우리는 많은 논쟁이 구원을 낳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논쟁이 발생하면 분명한 자기 이해를 밝혀야 한다. 자기 개념, 그리고 자기 개념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 토론장에 들어온 학도의 기본자세이다. 그 기본이 없는 자는 토론장에 입장할 자격이 없다. 김세윤 교수의 사상에 동조하는 연구자와 거부하는 연구자의 토론은 평행선으로 결론되어 있다. 자기 선생을 밝히면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는데, 이런 복잡한 토론이 발생한 것은 자기 선생을 알지 못하거나 밝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논쟁을 피하고 힘써 주 예수의 이름전함에 전력하자.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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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