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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능동순종 의 등 한국교회의 '의'에 대해 담론에 대해
고경태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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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5  12: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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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16년에 김세윤 교수의 신학에 대해서 많은 탐구를 했다. 그 결과를 2017년에 <현대 칭의론 논쟁>(CLC)을 출판했다. 이 신학담론의 장을 위해 <바른믿음>(대표 정이철 목사)을 활용했다. 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를 “유보적 칭의”라고 최덕성 박사께서 정립하면서, 한국 교회는 유보적 칭의와 구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한 담론으로 뜨거웠다. 이제 우리는 김세윤의 칭의를 “유보적 칭의”라고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칭의’에서 ‘의’라는 개념 이해로 논의가 확장되면서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라는 개념이 있고, 루터의 개념인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 개념을 갖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남은 죄’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신자이지만 여전히 옛사람을 가진 존재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개념에서 성화를 강조한다는 명분으로 종말에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이 아닌 성도의 견인을 믿는 진영에서 다시 분화된 이해가 발생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하는 이유는 이전의 믿음의 동료가 후에는 갈등하는 동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 논쟁에서는 정통에 섰었으나 기독론 논쟁에서는 이단의 자리에 선 위인들이 있었다. 고대교회의 신학 이해는 너무나 세밀해서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시대는 예수만 믿고 구주로 인정하면 바른 믿음으로 판정한다. 그러나 고대교회에서는 정통과 이단 모두가 예수를 구주로, 믿음의 대상으로, 하나님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유보적 칭의 이해 뒤에 다시 다른 논의가 전개되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신학 이해가 더 깊어지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있다. 그러나 신학논쟁은 교회분열을 초래하고 복음전도 열기를 소진시키기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논쟁이 격화되면 그리스도인은 논쟁을 중지하고 복음전도, 즉 예수의 이름을 증언할 것을 서약하고 중지할 것을 제언했었다. 예수 믿음이라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 수준이 선진 기독교 지역인 유럽과 미국에서도 긴밀하게 필요한 수준이라고 판단되는 비참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의’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 간략한 이해를 제시하려고 한다. 의에 대해서 담론을 제시하려면, 먼저 의에 대한 자기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의를 ‘생존권’이라고 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생존권을 획득한 것”이 구원이다.

서 박사는 ‘의’는 성경대로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며 어떤 행위도 개입되지 않도록 주의시킨다. 주 예수께서 속죄제사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고(satisfactio) 자기 백성을 획득하시고(구속하시고, redemptus)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셔 복음을 선포하여 교회를 설립하셨다고 제시한다. 현세에 하나님 앞에서 생존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복음과 성령’뿐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논의가 확대되면서 미로(迷路)에 갇힌 것 같다. 메이천 박사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큰 영향력이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의 가치와 ‘신자를 체휼하시는 긍휼’로 이해해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 조항을 준수한 ‘능동적 순종으로 획득한 의’를 전가시킨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에게 수여된 의는 오직 보혈의 공로로 ‘내주하는 성령’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다(롬 10:4).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처럼 율법에 부착된 제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며 산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사는 인생이 복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율법 아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다. 율법 아래서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원수도 전혀 반박하지 못하도록 한 하나님의 공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까지 가시는 길에 겪으신 고초의 생이 복된 것은 우리의 죄사함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인 “나의 죄과가 복되다”(o felix culpa mea)는 고백으로만 말할 수 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주의 말씀을 따라서 주의 이름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뿐이다. 그 이름을 전파할 때 그 ‘의’가 주의 백성에게 전달된다. 주께서 자기 복음을 들어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의를 전가시키신다. 이것은 소명이고 중생이고 회개이고, 믿음이고, 칭의이다.

우리는 많은 논쟁이 구원을 낳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논쟁이 발생하면 분명한 자기 이해를 밝혀야 한다. 자기 개념, 그리고 자기 개념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 토론장에 들어온 학도의 기본자세이다. 그 기본이 없는 자는 토론장에 입장할 자격이 없다. 김세윤 교수의 사상에 동조하는 연구자와 거부하는 연구자의 토론은 평행선으로 결론되어 있다. 자기 선생을 밝히면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는데, 이런 복잡한 토론이 발생한 것은 자기 선생을 알지 못하거나 밝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논쟁을 피하고 힘써 주 예수의 이름전함에 전력하자.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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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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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치겠네! 2019-02-12 13:37:14

    언이네 님, 제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답잡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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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로 인해 버려진 자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복귀시키는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보혈의 공로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다.

    예수님의 능동순종(율법준수)는 예수님이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저주받은 상태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스스로 율법 아래 나셨고, 율법의 명령들과 절차를 따르셨다. 처음부터 의롭고 거룩하셨으나,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흠없는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율법준수(능동순종)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능동순종)로부터 직접 의와 속죄가 나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이철 목사/오히려 웨슬리안(장기영교수)이 능동순종 의미 더 정확히 알아신고 | 수정 | 삭제

    • 언이네 2019-02-12 12:55:41

      정이철 목사님 자신의 입장부터 명확히 정리하시고 글쓰시는게 좋겠습니다.
      이제야 보게 되서 여기에 댓글다네요. 2월8일 이 기사에 올리신 댓글(아래)에
      "저나 서철원 박사님은 예수님의 율법준수(능동순종)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 예수님의 죽으심과 피가 그런 효력을 가지는 원인 중에는 예수님이 율법까지도 다 준수하시면서 사신 능동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뭘 원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능동적 순종은 이단이라고 안하셨어요?신고 | 수정 | 삭제

      • 정이철 2019-02-08 09:04:00

        언제, 어떻게 쓴 저의 글이 그렇게 읽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율법준수(능동순종)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서 박사님이 반대하는 것은 율법의 의를 취득하여 자신과 우리를 의롭게하여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율법준수(능동순종)가 필요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율법을 준수하셨습니다. 범죄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은 우리들을 구속하는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예수께서도 스스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고,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율법의 내용과 과정을 순종하시면서 거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완전히 흠없는 속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제사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죄와 무관하게 태어나셨으므로 처음부터 거룩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에도 흠이 없는 삶을 사셨으므로 율법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시니, 우리의 범죄에 대한 완전한 배상이 되었습니다. 롬 10:4절의 말씀처럼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로우시고 흠이 없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성령안에서 연합되니, 예수님의 의와 거룩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언(칭의)하셨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리의 죄 사함과 의롭다힘은 우리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로움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원죄의 전가와 죄의 오염과 무관하였고, 처음부터 거룩하고 흠없으셨고, 공생애 동안 하나님의 모든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서 율벌의 명령과 모든 과정과 절차들 무흠하게 통과하시고다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저나 서철원 박사님은 예수님의 율법준수(능동순종)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능동순종으로부터 우리를 하나님되게하는 의가 직접 오는 것이 아니고, 능동순종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죽으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용서와 칭의가 나온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중심의 신앙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모든 은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피가 그런 효력을 가지는 원인 중에는 예수님이 율법까지도 다 준수하시면서 사신 능동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오해되는 내용이 있으면 이렇게 남겨주십시오. 교수님을 차단한 것은 서로 너무도 신학의 배경과 바탕이 다르므로 말을 하면 할 수록 평행선을 긋고, 계속 일방적으로 주장하니 듣기도, 반응하기도 곤란해서였습니다. 이 참에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니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 올림신고 | 수정 | 삭제

        • 장기영 2019-02-08 08:10:52

          정이철 목사님, 한 가지 질문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신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한 흠없는 제물로 준비하는 일에 필요했다는 것이 웨슬리안의 관점입니다. 목사님이 가진 입장이나 개혁주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반대하는 측에서의 주장은 웨슬리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의견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신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한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 자체를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분이 아니기에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주장을 진의를 확인하지 않고 몇 문장으로 단정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목사님께 직접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시기에 그 순종은 그리스도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상응하는 마땅한 태도이기에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마땅한 태도이자, 인간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흠없는 제물로 준비하는 데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목사님은 이 모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진리로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시는지요?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2-07 11:47:21

            좀 뜬금없는 질문일 수 있지만 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눠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 단어들에 집착할 수록 이상한 논리가 나오는 것 같구요. 김세윤 교수는 신학을 너무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가버린 케이스가 아닐까요. 그런 논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과연 성령께 인도를 받는 사람인지 의심이 갑니다. 김세윤은 슈바이처의 말을 토대로 주장을 하는 듯 한데 슈바이처 자체가 예수님을 자살한 인간으로 주장했다고 알고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과연 '신학자'로 간주해야 하는지요.
            '신학'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유용한 학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새로운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다른 학문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성령과 성경으로 성도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은 한정적인데 그 외에 것을 알려고 이리저리 궁리하거나 이미 세워진 교리를 부수려는 모습도 보입니다. 김세윤 교수를 보면서 저도 '좁은 문'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단지 김세윤 교수를 반대한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역사적으로 교회는 방어적 전투를 해오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끝까지 진리를 붙잡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만이 진짜 성도겠지요.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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