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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와 에드워즈의 회심 준비론과 현대 교회의 신앙
김리훈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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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30  10: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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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있는 분이 김리훈 장로(의사)

Massachusetts에 정착한 청교도 1세들은 회중중심의 교회를 운영하면서 가견교회(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불완전한 교회)를 불가견교회(눈에 보이지 않는 완성된 천상의 교회)로 접근 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그들은 교회회원의 자격을 엄격하게 높이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그들의 ‘구원 얻는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요한 칼빈은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인지 아닌지 이 세상에서 확실히 아는 것은 불가능함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화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견교회가 그 회원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표시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위선자들도 선행을 할 수 있고, 불신자 중에서도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선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들은 청중들에게 믿음을 탐지하는 지침을 제공했다. 특히 Jonathan Edwards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제1 세대 청교도 토마스 셰퍼드는 회심 준비론을 수립하였다.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 중생하기 전에 네 가지 과정, 즉 영적 각성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그것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통회’, ‘겸비’, 그리고 ‘믿음’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믿음을 갖기 전에 죄를 깨우치되(요 16:8-11), 먼저 죄를 보고(see), 그 다음에 그것을 느끼며(feel), 그런 다음에 그들로 믿게 한다(believe)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말이 앞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그 길로 계속 달려간다면 그 말은 적의 창에 맞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앞의 사망을 보지 못하고 죄의 길을 계속 간다면 마귀의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활에 의해 말씀의 화살이 내 양심에 꽂히면 나는 죄와 사망의 길을 향하여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죄를 깨달으며, 죄를 애통해 하고, 겸비해 져서, 나의 가던 길의 방향을 돌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청중들의 양심을 touch 안하면 그들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청중들의 양심을 touch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음에 찔려 어찌할고”하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이다.

이렇듯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신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말씀을 어떻게 철저히 준비 할 것인가”하는 문제이고 “또한 말씀을 듣는 우리도 옥토와 같이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성령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말씀이 선포될 때에 자신의 죄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고 눈물로 회개 자복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그러한 감동과 감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한국에서 꽤나 유명하다고 하는 어느 목사님이 인도 하시는 부흥회에 참석을 하였다. 내가 이 부흥회에 기대했던 것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나의 양심에 박혀 나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껏 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흥회에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목사님의 설교가 듣기 좋은 내적치유의 story로 들릴 뿐이었다. 눈물은 인간이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내 마음(영혼)이 상할 때 나의 육체적 반응이 눈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연결 시켜주는 매개체”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물을 귀히 보신다”고 하였다.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 구원파처럼 값싼 은혜와 구원을 남발하는 이 시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와 자기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는 알미니안식 구원론이 팽배한 이 시대에 Jonathan Edwards 와 청교들이 강조하였던 “영적각성의 단계 즉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통회, 겸비, 그리고 믿음”이 절실히 요구되어져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혹자는 “이러한 영적각성이 칭의(중생)의 전(before) 단계가 아니라 칭의(중생) 후(after)인 성화의 단계가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떻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영적각성의 단계를 거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필자를 포함하여 여러 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요청이 더욱더 수준 높은 신자들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신앙으로 이민 초기의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쟁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북에서 남으로 온 믿음의 선조들이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그들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시며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일관 하였던 것이다. 그때의 신앙! 얼마나 순수하고 고귀 하였던가? 이러한 선조들의 신앙을 받아 그 은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지금 어떠한가?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볼 문제이다.

청교도들은 영적각성의 단계와 성령세례를 구분한 것 같다. 그들은 영적각성의 단계를 거쳐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을 확인한 후에 물세례를 주어 교인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라고 말하였다. 청교도들은 위의 말씀의 순서와 같이 영적각성(회개)과 물세례 이후에 죄를 사함 받고 중생(성령세례)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Jonathan Edwards는 말하기를,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인격적인 피조물의 반응”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하고 있다. 복음을 지식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복음을 체험해야 하며, 복음을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청교도들은 복음을 체험할 때 감정적 요소를 중히 여겼다. 그 당시 청교도들은 유형교회를 무형교회로 접근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고 ‘구원 얻는 믿음’을 얻기를 원했다.

먼저 죄에 대한 지성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감성적 인식으로 전진하며 그 결과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청교도 회심론의 핵심이었다. 성령님과 말씀에 의해 자기의 죄를 확실히 깨닫고 통회하며 겸비해 져서 믿음을 갖게 됨을 확인한 후에 물세례를 주었고 그 후에 중생 한다고 보았기에 영적각성의 단계와 중생의 단계를 구분 하였던 것이다. 셰퍼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영원한 지옥 형벌 등과 같은 두려움과 슬픔 이라는 감정의 체험이 없으면 참된 회심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감정적 요소를 중히 여겼다.

이러한 통회를 거쳐 겸비에 이르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영혼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달려갈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참된 회심의 과정에 두려움이나 애통 등의 감정적 요소가 필수적 이라는 셰퍼드의 주장이 Jonathan Edwards에게 영향을 미친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여러 차례 환상이나 신비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죄의 은총을 느꼈다.

물세례는 인간이 주는 것이지만 죄사함과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고 또한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연합의 의미가 있다.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성도와의 연합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세례를 받는 조건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요1:29). 유아들이 물세례를 받는 것도 아담의 원죄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물세례가 왜 필요한가? 물세례는 우리의 신앙 여정 중 한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초 쯔빙글리 밑에서 수학한 몇몇 성도들에 의해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재세례파가 등장했고 그들의 여파로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침례파 등이 나타났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언제 죄를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가? 물세례 후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물세례 자체가 성령세례이므로 물세례와 동시에 받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필자는 위의 어느 것이라도 가능 하다고 본다. 그러기에 Jonathan Edwards가 여러 가지 영적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나타난 여러 가지 신비한 외적 현상들은 영적각성의 상태(J. E.가 말하는 중생 이전의 단계)이전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심지어 유아세례(필자처럼)를 포함하여 물세례를 받았던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듯이 성령의 나타나심도 그런 것이다(요 3:8). 19세기 중반 영적 대각성 시에 많은 사람들 중에 성령을 처음으로 체험한 사람들도 있고 또한 이미 성령체험을 한 신자들 중에서도 성령의 내적 조명하심으로 자기의 죄를 다시 깨닫고 통회하며 자복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는 그 당시 성령을 처음으로 체험한 사람들과 성령을 반복적으로 체험한 사람들과의 구분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오순절 운동가들에게 성령재세례 사상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청교도들과 오순절 운동가들의 성령론의 적용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성령님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성결함에 힘썼으며, 후자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장과 번영에 힘썼던 것이다.

Jonathan Edwards는 주장하기를, “회심의 정도와 형태는 사람마다 다양하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격렬한 신체적 반응으로,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어떤 사람은 황홀경으로, 어떤 사람은 울부짖음으로, 어떤 사람은 모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나는 외적 현상으로서는 그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마지막 청교도 주자인 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이 위대한 말을 하였다.

“진정한 부흥은 참된 회심에 있다.”

이러한 사상이 훗날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그들이 척박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그 결과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현재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가 없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살고 있다. 객관적 진리는 무시되고 주관적인 체험과 상황에 따른 나의 실존적 판단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에 살고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죄를 죄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죄악들을 거룩한 교회마저도 인정하고 허락해주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과거에 화려한 능력과 경건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현재 그가 부패하고 타락한다면 과연 그가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마 7:22-23; 히 6:4-6). 성령충만하였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동일한 믿음을 소유했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7,8)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할 것인데, 우리의 믿음의 현 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지만, 개인 종말시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믿음, 칭의, 중생의 진위가 가려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의 비유, 마 7장에서 나오는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종교가들처럼). 과연 이 시대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몇 명이나 될까? (“과연 인자가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

(바른믿음 편집인으로서 교정하고 싶은 부분이 약간 있으나, 평신도 의사의 신학연구를 매우 격려하고, 독자들의 의견 개진과 토론을 위해 김리훈 장로님의 원문을 그대로 게시합니다. 정이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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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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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처럼 2019-01-30 12:40:14

    본 칼럼은 자칫 인본주의 성화론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화를 강조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인 듯 합니다.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이, 성화 역시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영역을 사람이 자꾸만 들먹일수록 그 의도와는 다르게 어쩔수없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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