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다르다. 정통신학에서는 온전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니케아 신조(325)와 칼시돈 정의(451)를 따라서, 예수님은 가장 온전한 신성을 지닌 분이시면서 가장 온전한 인성을 지녔다고 믿는다. 따라서 정통신학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와 상관된 것이 조금도 없고, 죄를 전혀 범치 않으셨고, 인간의 구속을 이루시고, 구속된 사람들이 살아갈 바른 길을 제시하셨다고 그를 믿는다. 

이에 반해서, 퀴어 신학에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 자신이 동성애적 정향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분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니 동성애적 정향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고,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구해 내야 한다고도 말하면서 “퀴어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패트릭 쳉은 성육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연관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퀴어성(queerness)은 성육신의 선함의 확언이다. 즉, 성육신하신 말씀은 나의 퀴어성에서 확언된다.”

또한 그는 부활절과 관련해서 다음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부활절은 퀴어 성적인 해방(queer sexual liberation)의 소망이 된다. 성적 해방을 위한 퀴어 신학의 투쟁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부활절의 약속이다 ... 부활절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우리들과 연대한 퀴어(queer)가 되게 하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께서 ‘닫힌 곳으로부터 나오셔서’(comes out of the closet) 퀴어 그리스도(queer Christ)가 되신 것이다.”

이처럼 정통신학과 퀴어 신학의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에 대한 이해는 그야말로 대척(對蹠)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같은 가논(R. A. Gagnon)의 주장은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동성애적 관습에 대해서 개방적인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묘사하는 것은 아주 비역사적인 것이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 방향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극복하는 구원, 동성애를 조장하는 구원

구원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다르다. 정통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죄의 권세로부터도 원칙적으로 해방하셨고 점차 이일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화되는 것 안에 동성애적 정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사는 삶이 가능하고 그런 삶이 구속 받은 자들의 지상 생활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퀴어 신학은 동성애가 그로부터 인간이 구원 받아야할 죄악의 세력으로 보지 않고, 그것도 인간이 정당히 누릴 성적 행동 방식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구원 받은 삶은 동성애를 극복하고 배제하는 삶인데 비해서, 퀴어 신학은 구원 받는 것이 동성애를 포용하며 조장하는 삶이 된다.

패트릭 챙의 주장을 따르면서, 메트로폴리탄 컴뮤니티 교단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하이브리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특정한 정체성을 하나만 선택하게 하지 않고 동시에 두 가지 정체성을 다 가지게 허용하신다"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LGBTQ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아주 다른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정통신학과 퀴어 신학이 아주 대척(對蹠)적인 것임이 잘 드러난다.


동성애와 싸우는 전투적 교회, 동성애를 포용하는 교회

따라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대척적이다. 정통신학은 이전에 동성애를 비롯한 여러 죄를 행하는 자들이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자신들이 그들이 이전에 행하던 그 모든 것이 죄임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끊임없이 동성애를 비롯한 그 모든 죄와 싸워 나가는 교회(church militant)임을 고백한다. 이 땅에서는 승리한 교회(Church triumph)가 아직 아니니, 아직도 부족하고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끝까지 죄와 싸워 나가는 교회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퀴어 신학은 동성애가 전혀 죄가 아니라고 여기기에 그와 싸울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성례전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성적으로 다른 정향을 가진 사람들을 거부하고 해치던 공동체가 어떻게 그들을 다 포용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치유하는 공동체가”(communities of healing) 되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들은 사실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을 듣기에 합당치 않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래서 성적 정향이 어떠하든지 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세례를 주어야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가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가졌든지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이제 세례로 그가 타고 난 성이 상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온전한 회원으로 인정되어야 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적 자아’이지 우리가 과연 어떤 성을 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그들 중에 함께 있다”(마 18:20)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두 사람이 동성애적 관계를 가질 때 그들이 서로를 모르고 익명적으로 동성애적 관계를 가질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계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성공회 신학자인 엘리자베트 스튜어트는 커플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에서 교회의 마크를 드러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커플이든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됨을 드러내고, 그 둘이 순전한 은혜와 넘치는 내어 줌이라는 신적 실재를 나타내야만 한다는 점에서 거룩하고, 전체 교회의 프로젝트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자신들의 관계가 그저 사적인 관계(private affairs)가 아니고 전통의 권위 아래 있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사도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덜햄의 제랄드 로흘린은 에베소서 1:4-6에서 성을 뒤집어 패러디하고 있는 현상(the subversive parodying of gender)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남성인 그리스도가 여성적인 몸인 교회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교회(여성)가 세상에서 그를(남성인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그들은 남성성의 상징(the symbolics of masculinity) 안에 사로잡혀 잇는 것이고 남성들도 교회의 한 부분인 점에서 이 남성들은 여성성의 상징(the symbolics of femininity)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성을 뒤집어 패러디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회가 여성인 “에클레시아”로 표현된 것에 근거하여 지나친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수정수의적인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엘리자베트 스튜어트나 로흘린 모두 전통적인 용어를 상당히 다른 영역에 적용하면서 그 의미를 뒤트는 일을 시도하고 있다.
 

명확한 성경적 종말론, 미래적 성적인 종말론(Sexchatology)

“세상 끝”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정통신학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와서 이루시는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에서는 동성애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죄악이 참으로 다 일소되고 인간들이 그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놀라운 문화적 활동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퀴어 신학은 이 소망과 믿음이 있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구원의 종국 문제에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유르겐 몰트만과 함께 대개는 “(결국) 이 세상이 다는 아니라는 데에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새로움과 변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참된 가능성이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하니, 이는 극복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는 것이다.

성 문제와 종말론을 연결시켜서 “sexchatology”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수잔나 콘월은 “우리가 성이나 성별 등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성적 관계에서 활동하는 방식은 소외보다는 조화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더 정의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것에 의해 채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신학적 논의의 모든 점에서(every locus 그러므로 all loci) 정통신학과 퀴어 신학은 대립적으로 대척적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은 퀴어 신학은 정당한 기독교 신학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아주 솔직히 말해서, 퀴어 신학은 정통신학을 수정하고 극복해야 할 신학적 표현으로 본다.

이처럼 정통신학과 퀴어신학은 자의식적으로도 대립적인 것이다. 사실 그 둘을 다 인정하며 같이 할 수 있는 점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질문은 우리가 정통신학을 주장하는 정통 기독교인가 아닌가(to be orthodox Christianity or not)의 문제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생각하시려는 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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