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중파 청교도 > 미국-에드워즈
에드워즈의 신비 영성과 중세 신비주의자 버나드의 영성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2.22  15:01:43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그 동안 나는 에드워즈에 대하여 당연시하였거나 심각성을 간과하여 가벼이 여겼던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1739년 또는 1740년에 에드워즈가 기록한 자서전에 나오는 특별한 영적인 체험에 대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20대 청년시절부터 숲이나 들판에서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지지를 매우 좋아했고, 다음과 같은 체험을 자주 했다고 기록하였다. 다음은 에드워즈의 자서전을 번역한 백금산 목사가 자신이 저서「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에 소개하여 준 내용이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166 페이지)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177 페이지)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79 페이지)

“나는 종종 그리스도의 탁월한 충만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온유하시고 적임자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만 왕으로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180 페이지)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180-181 페이지)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을 느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샘으로 나타나셨습니다.”(181 페이지)

“최근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더욱 충만하게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계시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4-185 페이지)

묵상의 본질은 우리의 실제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보는 것이다. 묵상과 함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살아서 운동하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하여 부족하고 빗나간 삶에 대한 애통, 회개, 결단도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드워즈는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경험하는 특이한 체험을 맛보았다. 만일 다윗에게 그런 영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면 문제는 다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직접 특별계시를 받는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보다 밝은 빛으로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회심했다. 그런 체험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일이었지, 에드워즈 같은 인물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성령은 신자에게 자신을 직접 체험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여주어 신자들이 감동을 받게하지 않는다. 신약의 성령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가르치고 적용시키신다. 신자들이 이미 주시어 기록된 말씀을 따르고, 깨닫고, 삶에 적용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친히 성령이 그런 일을 하신다고 가르치셨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5)
 

   


성령의 역사하심의 결과는 반드시 말씀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대해 모든 개혁신학자들은 동의한다. 칼 쇼올스(Carl A. Schouls)가 벨직신앙고백서를 해설하는 탁월한 작품 「우리는 믿고 고백한다」(원제: Simply, Faith, 마르투스, 2017년)에서 신약의 성령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라.

“성령께서는 언제나 오직 말씀을 통하여서만 일하십니다.”(26 페이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궁극적인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말씀을 성령께서 마음에 적용해 주실 때만 올 수 있습니다.”(33 페이지)

“믿음은 항상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62페이지)

“성령께서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진리를 우리 마음에 증거하십니다.”(94 페이지)

“성령께서는 말씀에 없는, 또는 말씀과 반대되는 새로운 교리를 꾸며내시지 않습니다 ... 성령은 절대 말씀 밖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96 페이지)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97페이지)

“왜냐하면 성령은 성부께서 정하시고 성자께서 획득하신 바를 적용시키셔서 교회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61페이지)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뚜렸한 말씀으로 귀결된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이 터치하시므로 기쁨, 슬픔, 회개, 결단 등의 affection(감정, 정서)이 생겨난다. 고요한 시간을 가지기를 좋아했던 에드워즈에게도 그러한 Affection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에드워즈는 뚜렷하고 선명한 말씀보다는 묘하게도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그분을 직접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직접 맛보게 한다는 에드워즈의 신비적 사상은 정통신학에서 용납되지 못한다. 이단으로 정죄받을 수도 있다. 에드워즈의 신비한 하나님 체험 이야기는 결코 예사로운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국내의 학자들은 에드워즈의 그런 체험을 오히려 높이고 칭송하기만 했다,

“그의 신학의 중요한 핵심과 골격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자신의 회심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백금산)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 에드워즈의 생애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만나과 교제가 계속된 생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백금산)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백금산)

“아마도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이의 글이 아니라 다른 무명의 성도의 간증문이었다면 이것은 순전히 날조된 신비주의라고 말할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처럼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을 자주 했으며, 그 결과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을 저술한 양낙홍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당시 에드워즈의 영성에는 신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체험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1)

“골짜기 부흥의 열기가 식어버린 직후인 1737년, 30대 중반에 이른 에드워즈는 생애 중 가장 놀라운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된다.”2)

개혁주의 신학자의 ‘신비적 체험’이라고 표현은 그 일이 매우 성경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확신할 성경적인 근거가 많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바람직하고 추천할 만한 일을 신비적 체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의 행위를 양낙홍 교수가 ‘명상’이라고 번역하였다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양낙홍 교수가 에드워즈의 기도를 네 번이나 ‘명상’으로 표현하였다.3) 명상은 일반 종교인들의 진리추구를 위한 사색이고, 명상이 기독교에 스며들어 나타난 것이 관상기도이다. 이전에 나는 에드워즈가 고요한 시간을 가지면서 경험한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 현상이 관상기도의 영성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실제로 에드워즈가 직접 사용한 단어도 ‘contemplation’(명상, 사색)이었다. 혹시 18세기에는 이 단어가 기독교의 기도나 묵상을 의미했었을까? 

   


중세의 신비주의자 버나드

더욱 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표현하는 글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형용사는 ‘달콤함’(sweet)이다. 에드워즈 연구자인 찰스 햄브릭스토우는 자신의 소논문 “그리스도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달콤한 내적감각’”에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영적체험을 기록할 때, ‘밝고 달콤한 교리’, ‘달콤한 내적 기쁨’, ‘달콤한 내적 감각’, ‘달콤한 상태’,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 ‘달콤한 만족감’, ‘달콤함의 무한한 샘’, ‘신적 영광의 달콤함’, ‘피와 속죄가 달콤하게’, ‘달콤하고 행복한’ ... 이러한 표현을 총 57회 사용했다고 했다.4) 에드워즈는 1742년에 출판한 「균형잡힌 부흥론」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참된 경건의 표본으로 소개할 때에도 아내의 입신 및 황활경 체험을 ‘달콤한 위로에 완전히 압도되어’,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사랑의 달콤함에 사로잡힌’ ... 라고 서술하였다.5)

더 흥미로운 사실은 성령의 역사를 이와 같이 ‘달콤한’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이 에드워즈만의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찰스 햄브릭스토우는 하나님 체험을 지극히 강조했던 중세의 프랑스 수도사이고, 대표적인 관상기도 신비주의자 클레르보의 버나드(베르나르,1090-1153)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버나드의 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는 청교도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서적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는 여기에서 달콤함이라는 말이 관능적인 인상을 갖지만, 알레고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최소한 중세의 신비주의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버나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책「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는 매우 유명하였고, 17세기 청교도들의 설교에 자주 인용되었습니다.”6)

나는 아무 정보가 없을 때 에드워즈에게서 신비주의 관상기도 성향이 있어 보인다고 의심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중세의 천주교 수도사들의 관상기도 신비주의가 청교도들의 묵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최근에 나왔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것은 시카고의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실천신학 교수인 탐 쉬안다(Tom Schwanda) 박사의 저서「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경건」(Soul Recreation: The Contemplative-Mystical Piety of Puritanism, 2012)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또 다시 에드워즈를 긍정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의 논문에서 신비적인 하나님 체험에 대한 에드워즈의 사상과 표현 방식이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체험’을 매우 강조했던 중세의 신비주의자 클레르보의 버나드로부터 유래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였다. 청교도들이 버나드의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도 처음 접했다. 

물론 에드워즈는 묵상한다고 했을 것이나, 이미 청교도들의 묵상은 중세의 관상기도 신비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에드워즈를 무조건 칭송하지 않고 이상한 점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의심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주신다.

 

--- 미주 ---

1)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 2017), 142.

2) Ibid., 221.

3) Ibid., 143-146.

4) D. G. 하트 외, 「조나단 에드워즈의 유산」(장호익 역)(부흥과개혁사, 2009), 133-137.

5) Ibid., 145.

6) Ibid., 134-135.

정이철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3
전체보기
  • 김리훈 2018-12-23 07:39:34

    회심은 회개와 믿음이다. 즉 성령의 활에 의해 말씀의 화살이 양심에 꽃힌 상태이다. 전쟁터에서 말이 앞의 죽음을 보지 못하면 결국 그 길로 달려가 적의 창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할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도 앞의 사망을 보지 못하고 죄의 길을 계속 간다면 마귀의 화살에 의해 죽임을 당할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활에 의해 말씀의 화살이 내 양심에 꽂히면 나는 죄와 사망을 향해 가던길 을 멈추고 죄를 깨달으며, 죄를 애통해 하며, 겸비해 져서, 나의 가던길의 방향을 돌려 에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청중들의 양심을 touch 안하면 그들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청중들의 양심을 touch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음에 찔려 어찌할고”하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한것이다. 이렇듯 성령님은 말씀과 같이 역사 하신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 신비적 체험을 전혀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도 신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무시하고 신비성을 계속 추구한다면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수 있다. 필자도 22년전 집사안수시 성령 체험을 한적이 있었고 훨씬 그 이전 (그 날짜는 모름)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히 본적이 있었다. 단지 그 사건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단 한번 일어난 사건 들이었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기쁨, 황홀감, 달콤함 그 자체 이었다. 집사 안수시 죄의 회개와 눈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신비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이후 장로 안수시 그러한 체험을 기대했으나 그러한 신비적 체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금도 감사하고 있는것은 그러한 신비적 체험들이 나의 신앙여정 중 활력소를 제공 한다는 점이다. 내가 지치고 낙심될 때, 내가 죄 중에 거할때 그러한 체험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시록 10장을 보면 사도요한이 천사의 작은 책을 받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입에서는 꿀같이 다나 내 배에서는 쓰다” (계 10:10). 하나님의 말씀은 입에서는 다나 그 말씀을 소화하여 말씀대로 사는것은 고통을 따르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는 꿀같이 달콤하고 경이롭다. 그러나 그것만을 추구한다면 결국은 망하는 것이다. Jonathan Edwards도 그의 글가운데 그러한 신비적 요소들을 포함하여 오순절 운동가들에게 ‘성령 재세례’의 빌미를 제공 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것 같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인 생애를 살펴볼때 그는 신비체험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였으며 그 이후 그의 ‘종교적 정서’를 통하여 그러한 요소들을 시정 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삶도 자기의 명예나 부를 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일관 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성령 운동가들과의 현저한 차이점이다. 영성은 신비적 달콤함을 추구하는데 있지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데 있다. 또한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신고 | 수정 | 삭제

    • 바울처럼 2018-12-22 21:42:01

      아무나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앞으로 개최될 2019년 개혁주의 컨퍼런스가 기대됩니다.
      해마다 조나단 에드워드를 우려먹는 신학자들의 다음 번 행보가 어떨지 너무 너무 궁금합니다.

      지금쯤이면 본 칼럼의 주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모를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이 너무도 궁금한데 알 방법이 없네요...ㅋ
      혹시 바른믿음에 그들의 입장표명이나 해명의 글이 온다면 꼭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개혁자 2018-12-22 17:14:34

        에드워즈의 실체를 드러내는 글이네요

        그를 칭송했던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반성해야 합니다신고 | 수정 | 삭제

        바른믿음
        최근 3개월 동안의 중요 기사 10
        후원방법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USA)
        대표(발행,편집):정이철(734 678 7133, cantoncrc@gmail.com)  |  편집자문: 정태윤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이철
        Copyright © 2019 바른믿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