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구속사」라는 저술이 있다. 에드워즈가 노샘프턴(Northampton) 교회에서 1739년에 6개월 동안 설교한 30편의 원고를 그의 사후에 스코틀랜드의 존 어스킨(John Erskine, 1721-1803)이『구속 사역의 역사』(1774년)라는 명칭으로 출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귀탁이 번역하여 부흥과개혁사에서 「구속사」(2015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에서 구속사적 성경 해석은 상당히 중요하고 관심을 받는 주제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드니 그레이누스(Sidney Greidanus) 혹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을 통해 많은 신학생들이 그것을 접했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는 「Biblical Theology」(1948)를 통해 구속사적 성경 해석 및 설교의 신학적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보스의 신학을 계승하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나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오스카 쿨만은 자유주의 마지막 무렵에 칼 바르트 등과 어깨를 견준 대표적인 학자이다.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 대화에 공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구속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에드워즈는 「구속사」에서 구속 개념을 “광의적 개념”과 “엄밀한 개념”으로 구분했다(구속사, 157-158). ‘광의적’은 ‘엄밀한’이라고 제시한 에드워즈의 표현을 근거해서 필자가 제언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구속사”라고 사용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구속사는 “엄밀한 구속 개념”을 포함하는 “구속” 개념이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엄밀한 구속”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에 이르는 구속 사역이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구속사(광의적 구속)”은 아담의 타락에서부터 재림까지에 이르는 구간에 발생하는 구속이다.

필자는 에드워즈 방식의 광의적 구속 개념에 대해 우려가 있다. 오스카 쿨만도 그와 유사한 방식의 구속사 구도를 제시했다. 광의적 구속 개념의 시초는 에드워즈일 수도 있겠다. 필자는 벵겔(Bengel, 1687-1752)이 “구속사”라는 어휘를 최소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벵겔의 구속사 개념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에드워즈의 『구속사』에서는 “구속사”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아마도 벵겔, 에드워즈 그리고 보스, 쿨만은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구속사 개념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광의적 구속 개념이다.

우리는 “광의적 구속 개념”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필자는 오스카 쿨만의 “already but ~ not yet”에 대해서 문제점을 짧은 에세이로 제시했었다. 그것은 신자의 구원 서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겪는 긴박한 구원 사건과 세례, 교회 이해의 소중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폐단이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광의적 구속 개념의 다른 표현은 쿨만의 “already but ~ not yet”이 될 수 있다. 그럼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어 행하신 구속 사역의 종말론적 중대성이 소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육신 이전과 부활 이후의 구속 사역의 차이점에 대해서 명료한 구분이 약하게 된다. 구약과 신약 관계 이해는 성경 해석과 신학 구성에 중요한 변수를 갖는다. 

필자는 구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종료시킬 것을 제언한다. 에드워즈가 제시한 엄밀한 구속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 발생하는 구원은 복음 전도자의 복음 선포로 발생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사역자의 복음 전파 사역을 구분해야 한다. 광의적 구속 개념에는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어떤 효력이 유효이고 직접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사상이 혼재할 우려가 있다.

성령강림 이후 구속의 발생은 오직 복음선포에 의해서 일어난다. 어떠한 감응이나 감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기적으로 감정이 발생했어도 반드시 복음의 내용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방식이다.

에드워즈는 알미니안과 이신론을 적극적으로 바른신앙을 변호한 유력한 위인이다. 그러나 “복음선포”를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을(참고 기독교강요 4권 1장) 효과적으로 계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강력한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구속사를 “광의적인 구속사 개념”이 아니라 “엄밀한 구속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에드워즈에게 풍성한 부흥 현상이 발생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복음은 오직 복음선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부흥으로 구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복음을 어디에 두어야할까? 부흥은 복음이 아니다. 부흥은 복음이 강력하게 역사할 때 등장하는 한 현상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흥이 아닌 복음을 사모해야 하고, 사역자는 부흥을 주도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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