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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박사, 대표적인 퀴어 신학자들의 주장의 문제점들
이승구  |  wminb@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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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19  21: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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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용어를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퀴어 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언급되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분들의 몇 가지 논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

먼저, 아르헨티나 출신의 해방신학자로서 에딘버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1952-2009)의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 보자. 1952년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Rosario)에서 태어난 그녀는 호세 보니노(Jose Miguez Bonino)와 세베리노 크로아타(J. Severino Croatta) 같은 해방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B. Th.). 아르헨티나 감리교 목사로 훈련받고 파울로 프레리의 “의식화” 방법을 더 연구하였으며, 브에노스 아이레스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안의 교회에서 이 방법을 적용하여 보고서는 후에 스코틀란드의 던디(Dundee)와 펄뜨(Perth)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하도록 초청받아 그 작업도 하였다.

그리고 폴 리꾀르와 해방신학을 연구하여 1993년 세인트 안두류스 대학교에서 실천신학과 기독교 윤리를 지도하는 Mr. Steven Mackie의 지도하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1994년에 학위를 받았다. 에딘버러 대학교 New College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그녀는 결국 Contextual Theology 교수가 되어 뉴컬리쥐의 최초의 여성 신학 교수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점차 남미의 해방신학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적절한 작업을 하였으나 충분히 포괄적이지 못해서 여성들과 퀴어 사람들(queer people)과 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작용하지 못했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신학을 좀 더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 여성주의신학, 그리고 큐어 신학을 연결하면서 신학은 몸과 산 경험과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자신의 신학은 “점잖지 않은 신학”(indecent theology)라고 하면서, 그런 신학은 “우리의 음식에 대한 갈망, 다른 몸을 만지고 싶은 갈망, 사랑에 대한 갈망, 하나님에 대한 갈망(our hunger for food, hunger for the touch of other bodies, for love and for God)의 지나침을 표현해 내야만 효과적이 될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그 어떤 것을 다른 것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의와 성적인 정의의 세계를 함께 갈망하는 데서만 신적인 것과의 만남이 일어 날 수 있다”고 까지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이성애라는 변태적 규범성의 이데올로기적 질서를 용감하게 떠나려고 할 때, 욕망의 교차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만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점잖치 않음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점잖지 않음과의 만남이고, 기독교와의 만남이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스스로가 “점잖치 않은, 라틴계의 양성애 신학자”(indecent, Latina, bisexual theologian)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렇게 새롭게 정의된 기독교를 믿는 강하고 살아 있는 신앙과 성적인 욕망은 동행할 수 있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레미아서 2:23-25을 그녀는 나름대로 번역하기를 “나는 낯선 이들을,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타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따르겠노라”고 말하면서, 성경이 타자성과 욕망을 잘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체 문맥을 보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적 정향과 행동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부분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다.

그러나 그녀는 게이 클럽의 거룩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퀴어 하나님”이라고까지 말한다. 앞서 언급했던 로버트 고스처럼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교단인 메트로폴리탄 컴뮤니티 교회(the Metropolitan Community Church)의 일원이 되어 그 입장을 대변하도 그녀는 오랜 투병 끝에 2009년 2월 20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Theodore W. Jennings, Jr.

 

테드 제닝스

둘째로는 2009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한신대학교 등지에서 방문 강연도 했던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의 퀴어 신학을 말해 보기로 한다. 듀크 대학교 출신으로(1964) 에모리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1967), 3년 동안 멕시코 시티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다시 미국에 가서 오랫동안 시카고 신학교 교수로 있는 테드 제닝스는 한국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발제하면서 “어떤 문서에도 소돔의 죄로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교만, 폭력, 미움 등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돔의 죄는 오직 “약한 이방인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강간을 저지르려 하는 형태를 취했던 소돔의 불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의 죄를 지적하면서 “여자들이 본성에 반해 행동한다”고 했을 때도 그것은 “섹스에 대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황제들을 지배하고 남편, 아버지 심지어 아들을 암살하며 권력 게임에 성을 사용하는 제국의 여자들을 지칭한 것이 동성애혐오를 위해 왜곡되어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황제들의 극단적인 성적 잔인성을 비난했던” 이교도나 바울이 “동의와 상호성에 의한 일반인들의 성적 관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를 취한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동성애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주장, 즉 “다윗과 요나단, 룻과 나오미” 등의 이야기가 “명백한 동성애 관계”라고 힌다. 그는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서구 문학에 최초로 등장하는 레즈비언 로맨스라고 한다. “룻과 나오미 간에 오가는 사랑의 말은 이성 간의 결혼을 축하하는 예전(예배)에서 종종 등장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부장적 세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늙은 보아스를 유혹하는 이야기다.”라고 하는 것이다. “룻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룻이 보아스에게 아들을 안겼다는 말을 하지 않고, 룻이 나오미에게 아들을 안겼다’고 말한다.” 이는 제3자인 남성을 통해 아이를 얻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가 상기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제닝스에 의하면, 신약에도 그런 예가 있는데, 종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온 백부장이 그 예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치권을 쥔 로마 군인이 아픈 소년 애인의 치료를 간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을 보고 예수는 적대시하거나 혐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기꺼이 병을 고치기 위해 ‘너의 집에 가겠다’고 한다. 제닝스 교수는 “예수가 백부장의 사랑만을 보았”으며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 백부장의 믿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제닝스 교수는 ‘동성애에 대한 정죄’는 “성서가 죄라고 판정하는 것이 탐욕과 교만과 폭력이라는 것”을 잊게 하고,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한다. 사실 제닝스는 예수님이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며 신약에는 동성애적(homoerotic) 본문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통적 교회가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은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은 바울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다니엘 헤미니악

셋째로 천주교 신부인 다니엘 헤미니악의 퀴어 신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그는 1995년부터 웨스트 조오지아 대학교의 심리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2007에 정교수로 인간과 초인격 심리학과(the Department of Humanistic and Transpersonal Psychology)의 교수로 있다. 1942년 생으로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그의 폴란드 이민자들의 공동체에서 성장한 천주교도이고, 신부가 되기를 소망하여 17세에 시라큐스에 있는 Our Lady of the Lake Seminary에 입학했고, St. Vincent Seminary (Latrobe, PA)에서 철학으로 학사학위를 했다고 한다(1964).

그 후 로마로 가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Gregorian University) 다시 신학사 (STB, 1966)와 일종의 신학 석사인 STL (License in Sacred Theology, 1968)을 하고, 그 가간 동안에 교황의 교구 교회인 성 요한 라테란 성당(St. John Lateran Basilica)에서 신부로 임직했다(1967).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4년 동안 고향인 피츠버그에 있는 스코트 타운쉽에 있는 시몬과 유다 성당(SS. Simon and Jude Church in Scott Township)의 사목을 하고(Associate Pastor)를 하고, 볼티모아에 있는 St. Mary Seminary에서 가르치고(1972-1973), 그 후에 보스톤 컬리쥐와 안도버 뉴튼 신학교의 조인트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조직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했다(1979).

이 기간 동안 그는 보스톤 컬리쥐의 (흔히 20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쯤으로 여겨지는) 버나드 로너간 교수(Bernard, J. F. Lonergan, 1904-1984)의 조교를 했으니 로너간의 사상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 산 안토니오에 있는 Oblate School of Theology in San Antonio에서 조직신학 조교수를 하면서(1981-1985) 보스톤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인격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또 하고(1983), 텍사스 대학교에서 인간 발달에 대한 연구, 특히 중년의 문제와 삶의 의미, 그리고 영적 발달에 대한 연구로 교육 심리학 분야의 두 번째 박사학위를 했다(1994).

이 기간 동안에도 주말에는 여러 교구 교회에서 사목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1976년에 게이임을 드러냈고, 1995년에 공식적인 사제직 사직원을 바티칸에 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에 대한 반응을 듣지 못했고 그는 이것이 천주교회를 위해 계속 말하라는 뜻이라고 농담조로 말하면서 천주교 LGBT 사람들을 돕는 네트워크인 DignityUSA를 돕고 있다.

그는 영적인 핵심(spiritual core)이 모든 문화에 관통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영성 심리학(psychology of spirituality)을 제시한다. 이 모든 것이 그가 한 때 조교로 섬겼던 로너간의 관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는 전체적인 설명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창세기 1:26-27에 근거해서 논의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인간의 마음에 부어진 성령의 은사에 근거해서(롬 5:5) 인류가 가능한 최대한의 성취에 이르게 되고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의 이해나 보편적 사랑과 같은 신에게만 있는 어떤 자질들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공유하지 못함”은 분명히 한다. 이것이 헬미니악이 생각하는 신성화(deification)이다.

신과 인간을 상당히 연속적으로 생각하려는 동양 종교의 전통과 아무래도 구별하려는 서양 종교의 전통은 각각의 옹호자들을 각기 잘 섬겼으나, 다원성을 말하는 21세기 상황에서는 어떤 점에 대해서는 영적인 어떤 의견의 일치(a spiritual consensus)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헬미니악은 소위 ‘지구적 공동체의 영성’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로너간의 인식론을 사용해서 영성 안에서 신과 인간의 차이도 말하고, 연관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심리학, 영성, 신학을 연관시켜서 논리적으로 정합성 있고 포괄적인 자기 나름의 영성에 대한 이해를 제시했다. 그는 모든 문화의 핵심에 있는 영성적 핵심이 (the human core of spirituality) 전반적 학제적, 과학적 프로젝트의 린치핀(the lynchpin of the overall interdisciplinary, scientific project)이 된다고 여긴다. 그는 20세기 토미스트답게, 자신의 영성 신학이 그 위에 은혜가 완성을 이룰 자연이라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는 1994년에 처음 나왔고, 2000년이 다시 출간 된 동성애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로서 성경의 본문을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정황에 부합하게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 주장이 매우 지나치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은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고, 대부분의 고대 사회가 그리했던 것처럼 같은 성 간의 성적인 관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여자와 동침하는 것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레위기 18:22의 금령도 항문 성교만을 금할 뿐, 다른 동성 간의 성적인 행위는 허용하는 것이라고 하며, 금해진 것도 고대 유대교의 정결 예식과 관련된 것이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로마서 1:26-27의 말씀도 레위기의 말을 언급하는 것일 뿐, 옛 율법의 정결 예식 요구를 다 버리게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필요한 구절은 인용하니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다”는 취지의 로마서 14:14의 말씀을 제시한다. 로마서 1:26의 “부자연스러운”이라는 말도 “파라 푸쉬킨”이라는 전문적 스토아적 용어를 바울이 통속적으로 쓴 것을 제대로 해서하지 않아 편견이 생긴 것이라고 하면서, 이 말은 전혀 윤리적 함의를 지니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a typical, non-standard)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니, 이 말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을 잘못이라는 논의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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