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8)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인데,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무엇을 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믿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

먼저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을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해서 다 아실 것입니다. 1620년, 대영제국의 남쪽의 플리머스(Plymouth)라고 하는 항구도시에 출발한 조그마한 배 한척이 위험한 대서양의 파도를 헤치고 지금의 미국 땅의 메사체츄스 주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지도를 보면 보스톤 밑에 Cape Code Bay라는 만이 있고, 그 부분을 마치 낚시 바늘과 같은 모양의 땅이 감싸고 있습니다. 낚시 바늘과 같이 생긴 땅 끝 부분에 그 배가 닿았습니다.

그 배에는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35(36명)명의 청교도 신자들과 66명의 일반 이주민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청교도 신자들이 영국에서 살다가 곧 바로 대서양을 건너 온 것이 아니고, 그들은 그 이전에 이미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살던 사람들인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려고 다시 영국으로 가서 그 배를 탔다고 합니다. 그 배를 타고 온 사람들 중에서 청교도의 숫자는 절반도 되지 않은 소수였습니다. 전체 101명 중에서 35명만 청교도였습니다. 그 이후 점점 이민자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온 배는 많아졌는데, 믿는 사람들보다는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모두 청교도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미국은 완전히 기독교 정신 위에 건설된 나라라고 것도 정확한 사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배가 가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지는 지금의 버지니아 주였습니다. 버지니아 주에는 이미 영국의 첫 번째 식민지가 개척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살려고 출발했었는데, 풍랑을 만나 길을 잃고 예정했던 곳보다 훨씬 더 북쪽 지금의 보스톤 근처의 바닷가에 닿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배에서 내려 상륙하기 전에 중요한 회의를 통해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정착하여 살게될 새로운 땅을 영국의 식민지로 발전시키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배 안에서 이루어진 그 회의와 서약을 역사는 “메이플라호 서약”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탄 배가 얼마 후에 Cape Code Bay 안쪽의 해변으로 다시 이동하여 드디어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상륙했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자신의 출발한 영국의 도시의 이름을 따서 Plymouth라고 지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가 11월이니까 매우 추운 겨울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지금은 미국 북동부의 평균 기온이 이전과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엄청 춥습니다.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하 30도, 40도의 추위는 사형선고였을 것입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46명이 죽었습니다. 배를 타고 오면서도 죽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살아서 대서양을 건너온 사람의 절반이 첫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지금도 지진이 나면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잠시 비율이 높아집니다. 생존의 상황이 너무도 어려운 그때에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처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당행히 처음에는 이 땅의 인디언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이 있었으므로 그나마 다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첫 겨울을 넘기고 다음 해 봄이 되면서 농사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맞은 두 번째 되는 해 이맘때에 대서양을 건너 온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그 해에 농사지어서 얻은 곡식들과 사냥한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기록을 보면 양생 칠면조를 잡아가지고 온 사람은 인디언 원주민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면 “하나님께 감사”라는 구호가 온 세상을 울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과 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만든 그 사람들은 매우 초라한 만찬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들의 감사의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이 땅에서 400년 전에 처절한 생존 전쟁을 치르면서 정착 첫해에 농사지어 얻은 초라한 것으로 만찬을 즐기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핵심적인 이유는 예수 믿게 된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마음대로 예수 믿게 된 것이 그들의 최고의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온 메이플라호라는 배는 어선의 크기로 말하자면, 4,5톤에 불과했습니다. 그 시절의 기술로는 그것도 큰 배였습니다. 그 배는 그 후에 다시 대서양을 항해하다가 침몰하여 사라졌습니다.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메이플라워호가 또 다시 대서양을 건너다가 침몰하여 사라졌다는 것은 그 당시 기술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위험한 모험을 했을까요? 예수를 성경대로 믿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예수 믿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결과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는 것이 불행이고,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청교도들이 생명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유는 예수 믿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이 원래 태어나고 살았던 영국은 예수 믿기 어려운 나라였기 때문에 대서양을 건넌 것입니다.

그 시대의 유럽의 가장 큰 이슈는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지금 유럽의 가장 큰 이슈는 난민문제 ...그런 것입니다. 그 시대의 유럽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되었고,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이 종교개혁 운동에 뛰어든 때는 1530년대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물결은 섬나라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530년대에 영국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종교개혁은 정상적인 종교개혁이 아니었습니다. 헨리 8세라는 왕이 원래 자기의 형의 부인이었던 캐서린이라는 부인을 버리고 앤이라는 예쁜 궁녀와 새로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바티칸의 교황이 이전의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이었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결혼을 허락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독일의 황제가 교황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캐서린은 독일 황제의 이모뻘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압력을 넣자 교황이 허락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다시 결혼하기 위해 “지금부터 영국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고 영국의 왕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의 교회가 천주교와 결별해 버렸습니다. 신학적인 동기로 종교개혁을 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교회가 쉽게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종교개혁은 크게 독일의 루터의 종교개혁 노선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르치고 있는 칼빈의 종교개혁 노선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칼빈의 가르침이 더 우세하여 졌습니다. 종교개혁을 루터가 시작했으나 주도하고 완성한 사람은 칼빈이었고, 칼빈에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교회들이 여러 곳에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에도 종교개혁 사상이 전해졌습니다. 영국에서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입니다. 청교도를 의미하는 ‘Puritan’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깨끗한 자들이라는 뜻인데, 영국의 정치적인 종교개혁을 따르는 사람들이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따라는 사람들을 조롱하였던 말입니다. 청교도들은 계속해서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에 대해서 따졌습니다. 무엇이 참된 종교개혁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영국의 정치적인 종교개혁 노선을 따르는 교회를 영국 국교회, 영국 성공회, Anglican Church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갈수록 청교도들이 귀찮았습니다. 그냥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자꾸 따지면서 종교개혁을 바르게 하자고 하니까 싫었습니다. ‘이 순결한 놈들!’라는 의미로 Puritan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영국에 사는 한 그들이 정치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청교도들은 그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을 떠나 주변의 종교개혁 신앙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네덜란드 등의 나라로 망명을 하기도 했고, 결국 예수를 바르게 믿기 위해 목숨 걸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온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배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바다 위에서 장사하였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 겨울에 절반 정도가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지옥과 같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왜 감사하였을까요? 무엇에 대한 감사였을까요? 마음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을 자유로이 실천할 수 있으므로 감사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예수의 복음의 결과는 지옥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우리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아직도 예수 믿도록 허락하지 않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북한에는 지금도 숨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다가 걸리면 그대로 죽음입니다. 이슬람권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발각되면 죽음입니다. 예루살렘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걸리면 죽음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이나 미국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전혀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는 신앙을 누거나 자기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에게 원하고 예의를 갖추기만 하면 언제든지 예수 믿는 신앙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 합니다. 구원을 주는 예수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감사하고, 또한 예수 믿는 신앙을 개인적으로 마음껏 실천할 수 있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법의 제제를 당하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고, 재산의 손해를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하지 않고, 사형에 처해지지 않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희롱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고, 톱으로 잘려 죽고, 들판에서 유리하면서 염소와 양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거지처럼 떠돌고, 산주의 토굴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 예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껏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정부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요즘 정부가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서 장차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려고 한다고 걱정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단을 비판하는 것이 차별금지법 위반이 되고,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이 차별금지법 위반이 되므로 실질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박해하는 시대가 온다고 걱정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틀린 것이 틀렸다고 말을 못하게 하는 법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이 자유를 위해 많은 이전의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종교개혁 그 자체를 성공시키기 위해 약 5천만 명이 피를 흘렸습니다. 종교개혁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희생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이전의 피를 흘리고 죽은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에 감사하면서 이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 자유를 타락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이 자유를 죄 짓는데 사용하지 말고, 이 자유를 하나님을 힘을 다해 섬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마음껏 이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밤, 낮으로 이 자유를 누리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예수 믿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한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믿는다"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무엇을 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범하는 순간 모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고, 죄에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으므로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전혀 뜻을 행할 수가 없는 부패하고 무능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선악과를 범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범하여 죄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순간부터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은 전무해진 것입니다. 인간의 그와 같은 영적인 상태를 시편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고,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부패하고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인간 스스로의 힘이나 인간의 내부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만든 모든 다른 종교들의 특징은 구원이 인간의 내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인간의 내부에 이미 잠재된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숨겨진 구원의 능력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내는 것이 다른 종교들의 목적입니다. 인간의 내부에 이미 잠재된 구원의 빛을 찾아내기 위해 해야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는 일은 자기부정, 금욕, 기도, 명상 등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은 인간의 의식 깊은 곳의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구원의 빛을 일깨우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일상의 의식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침묵, 힌두교에서도 침묵, 뉴에이지에서도 침묵이 중시됩니다. 명상하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종교는 침묵을 연습하여 무의식의 세계의 구원의 빛을 일깨우는 종교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인간의 내부에서는 구원의 길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인간의 내부는 죄성으로 가득하고,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는 부패한 본성만 충만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도 그곳에서 인간을 구원할 진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죄 없는 한 사람을 보내졌습니다. 죄 없으신 그 사람이 우리의 죄 값을 자기의 피로 배상하셨습니다. 배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값아 주어 피해자에게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나님은 언약의 쌍방, 즉 언약의 파트너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으로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언약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언약을 파괴하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 될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는 행동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담의 그 행위는 언약 파괴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언약의 파트너이신 하나님에게 심각한 손해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의 언약을 맺었는데, 그 신랑이 부정한 행동을 하여 언약의 파트너인 신부에게 고통과 손해를 끼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부가 손해 보상을 요구하면, 신랑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도 분할하여 자기의 언약을 파괴한 죄를 배상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한 범죄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언약을 파괴한 그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배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죄에 대해 배상할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배신당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여 영원히 죽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언약을 파괴한 그 죄 때문에 영원히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려서 영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 값을 자기의 흠 없는 피로 배상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죄 없고,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흠 없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만족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언약을 파괴한 죄가 더 이상 없는 것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죽음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영원히 떠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죄가 떠나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권세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실질적인 죄성이 치료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입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간, 재창조된 하나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 복음뿐입니다. 이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과 다른 내용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믿는 믿음에서는 구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도님들은 지금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선물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어도 아무도 우리를 박해를 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 복음을 믿어도 정치적인 손해가 없고, 경제적-재산상의 손해가 없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400년 전의 청교도들이 시작한 추수감서절은 이 복음을 믿을 수 있으므로 감사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일 옆에 있는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 믿을 수 있는 것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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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