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 / 총신 신대원 83회 /


글을 시작하며

103회 합동 총회에서 ‘이대위’(위원장: 김영남 목사)는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보고했다(제103회 총회 보고서, p.575).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점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모든 글들을 살펴보면, 정이철 목사는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목회자이며, 특히 합동 교단을 사랑하는, 그래서 합동 교단이 지향하는 개혁주의의 신학이 변질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몇 안 되는 목회자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열정이 남달라서 때로 실수도 하지만 말이다).

작년 102회 총회에서 김성로 목사와 이인규 권사에 대한 교류 금지 결정도 정이철 목사에 의해 <바른믿음>에 개제된 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사실이다. 또 이번 총회에서 신학 사상에 관련되어 올라온 헌의안들 중에 유석근, 김형민, 김요한, 이용규 등 상당수가 <바른믿음>에서 다루었고, 다루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바른믿음>의 정이철 목사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장로교 합동 교단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대위’는 조사를 통해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음을 알았다면, 또 지 노회에서 헌의안을 올리지 않은 사안인 만큼 정이철 목사의 건은 기각시키는 것이 무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보고서에서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이상한 논리로, 다시 말하면 “정이철 목사의 비판 내용을 보면 과격하고 무례함이 보인다”는 구실을 내세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가 쓴 글들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문제 삼지 않고, 글을 쓴 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은 무언가 대단히 어색해 보인다.)

"본 위원회는 정이철 목사에게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바른믿음] 인터넷 사이트에 등재되어 있는 교단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모두 삭제 및 글을 내릴 것을 지시하는 바이다. 앞으로도 정이철 목사는 다른 사람의 강의나 설교 등에 대하여 과도한 비판의 글을 자제해 줄 것을 지시하는 바이며, 본 교단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더 이상 비판하지 않도록 엄히 경고한다." (제103회 총회 보고서, p.576)

위에서 본대로, 정이철 목사에 대한 ‘이대위’의 이런 결정은 ‘이대위’의 권한을 한참 벗어난 갑질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단성이 농후한 김풍일, 정동수에 대해서는 각각 4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으로 그들의 이단성을 지적하면서도, 어디에서도 그들의 태도가 과격하거나 무례하다는 지적과 경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는 어떤 면에는 정이철 목사보다 더 과격하고 무례하다).

‘이대위’는 어째서 이단성이 없다고 판정한 정이철 목사에게는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실상 이단 판정과 다름없는 멍에(정이철 목사에게 그의 글들을 내리고, 더 이상 비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를 씌워야만 했는가? 필자는 시일야방성대곡하며 아무리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필자는 ‘이대위’의 이런 결정이 오히려 ‘이대위’가 합동 교단에 속한 정이철 목사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직무유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단성이 없는데도,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의 글 쓰는 스타일과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은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판정한 것은 그가 쓴 글들에서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정이철 목사의 글들에서 정 목사의 비판의 대상이 된 자들에게 오히려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정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논문까지 쓴 자들과 정 목사를 이단이라고 성토한 자들에게도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대위’는 이런 자들에게 경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 목사에게 사과하라는 요구 대신에, 오히려 정 목사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이대위’가 해야 하는 일은 어떤 자의 설교나 강의, 그리고 글들에서 그의 신학적 사상에 이단성이 있는가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는 일이다. 어떤 이의 말투나, 태도를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은 중, 고등학교 선도(규율)부에서나 하는 일이지 결코 ‘이대위’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대위’는 이단성이 없는 정이철 목사의 태도를 문제 삼아, 교단 목회자들을 비판한 글들을 다 내리고, 앞으로 본 교단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따라서 ‘이대위’의 이런 조치는 이단성이 없는 정 목사에게 인격적인 수치를 주는 부당한 조치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눅23:15-16절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를 보면 빌라도로 인한 당시의 시추에이션이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분을 고소한 유대 당국자들을 의식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때려서 놓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빌라도의 이런 생각은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 없는 자라면 그냥 석방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빌라도가 정당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려고 한 것은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때리는 수치를 줌으로써, 유대 당국자들의 분노를 달래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기고, 수치를 죽음보다 더 싫어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명예-수치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가하려던 수치의 채찍은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만큼이나 힘든 일이셨을 것이다.

물론 동일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단성이 없는 정이철 목사에게 그의 글들을 내리고, 더 이상 비판의 글을 쓰지 말라는 경고는, 혹시 어떤 자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는 아닌지 조금은 의심이 생긴다. 또 이 경고는 정이철 목사에게 비록 사형 선고와 같은 이단 규정은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목회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채찍질과 같은 수치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이단성이 없는데도, 왜 그가 쓴 본 교단 목회자들의 글들을 내리라고 하는가?

‘이대위’의 보고서만 놓고 본다면,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바른믿음>에서 교단 목회자들의 비판 글을 내리라’는 명령의 이유는 정이철 목사의 글 씀의 태도가 과격하고 무례하다는 이유 밖에는 달리 추측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대위’는 정이철 목사의 과격하고 무례한 태도를 지적하고 난 뒤에, 본 교단 목회자의 글을 내리라는 명령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이철 목사의 과격함과 무례함은 도덕적인 문제이지 신학적인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대위’가 도덕적인 문제인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아, 신학적인 문제인 그의 글들을 내리라고 명령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대위’는 ‘신학적인 글을 내리라’는 명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그 명령의 필연적인 신학적 당위성을 정이철 목사에게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대위’는 왜 정이철 목사가 자신이 쓴 글들을 <바른믿음>에서 내려야 하는지 그 신학적인 정당한 이유를 정이철 목사에게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면, ‘이대위’는 이제라도 ‘글을 내리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정이철 목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바른믿음>에서 교단 목회자들의 비판 글을 내리라’는 명령은, 사실은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명령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부탁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이대위’는 합동 교단의 위상과 장래를 위해 ‘본 교단 소속의 목회자들을 비판한 정이철 목사의 글들이 문제가 된다면, 정중하게 정이철 목사에게 합동 교단의 위상과 장래를 위해 교단 소속 목사들의 글을 좀 내려주기를 부탁해야 한다. 물론 그 글들의 대상이 된 목회자들에게 개혁주의 신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살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왜 정이철 목사는 본 교단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해서는 안 되는가?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경고도 부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명령도 앞에서 언급한 “그에게 이단성이 없는데도, 그가 쓴 본 교단의 목회자들의 글들을 내리라”는 경고의 부당성과 같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대위’는 이제라도 ‘본 교단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의 정당한 신학적인 이유를 정이철 목사에게 제시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정이철 목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또 이 명령은 정이철 목사와 상관없이 합동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대위’는 인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본 교단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다른 교단에 속해있는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유독 총신대 교수들은 신학사상에 이단성이 있어도 비판하면 안 되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스스로 합동 교단의 위상을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는 이상한 명령임을 ‘이대위’는 심각하게 인지해야 한다.

만약 ‘이대위’가 정이철 목사에게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경고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대위’는 전국에 있는 합동 소속 목사들 모두에게 앞으로 총신 교수들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 말하면 이단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비판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총신대 교수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의 대상인 정이철 목사가 합동 교단에 소속된 목사이므로 동일한 조건에 있는 합동 소속의 모든 목사들에게도 이 경고가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대위’의 경고가 정당하다면,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합동 목사들은 본 교단 총신대 교수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대위’는 이제라도 ‘본 교단의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정이철 목사에게 ‘본 교단에 속한 총신대 교수들의 신학사상을 비판할 때는 합동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비판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성경에서 정이철 목사의 글을 내리고, 더 이상 비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것과 유사한 상황은 아마도 행5:39-40절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의 시추에이션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상황이 이번 103회 총회의 ‘이대위’의 보고서에서 벌어졌다. 필자는 소속 교단 목사로서 이를 보고 어찌 ‘시일야방성대곡’을 아니할 수 있었겠는가? 진리에 대한 과격과 무례의 원조는 아마 예수님이실 것이다. 아래를 보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과격하고 무례한가?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태도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말씀의 내용이 이단적인가, 아닌가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의 입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을 미리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증거를 찾는 재판을 하지 않았는가(막14:55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를 비판한 것(갈2: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을 문제 삼아, 만약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이대위’를 구성해서 바울의 과격한 태도를 지적하며, 더 이상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여 그의 입을 막았다면, 그 후의 교회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이 초대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며 목숨 걸고 외친 ‘이신칭의’의 복음이 우리가 속해 있는 합동교단의 개혁주의 교회에까지 전해지기나 했을까?

끝으로, ‘이대위’에 충심으로 부탁드리고 싶다. 필자가 정이철 목사의 상황들을 예수님에 빗대어 묘사한 것은 분명히 지나친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대위’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당국자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충심으로, 시일야방성대곡하면서 살을 저미는 아픔으로 다소 무리한 유비를 쓸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며, 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이대위’에 유감을 표한다.

합동 교단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합동 교단의 위상을 높여주시는, 그러므로 합동교단은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가 있기를 주께 기도하면서 ...
 

이창모 목사 / 총신 신학대학원 83회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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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