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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신대륙의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의 사람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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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3  22: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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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났고 1758년에 죽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대각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에드워즈가 살던 때는 다음과 같은 시대였다. 
 

1. 영국의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

에드워즈 시대에는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드워즈가 살던 북아메리카 땅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이 북아메리카 신대륙에 만든 첫 번째 식민지는 1607년 영국 국왕의 승인을 받은 런던 회사가 현재 버지니아 주에 속한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 인근에 세운 ‘제임스타운’(Jamestown)이었다. 신대륙에 생긴 최초의 영국 식민지는 영국 왕의 승인 하에 자치권을 가진 곳으로 출발했으나, 1624년에 자치권을 박탈당하고 영국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신대륙의 ‘버지니아 식민지’가 되었다.1)

두 번째 신대륙의 식민지는 헨리 8세가 주도하여 만든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1620년 9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순례자들의 아버지들)라고 불리우는 청교도 35명과 일반인 66명이 함께 조그마한 배 메이플라워호(Mayflower)타고 신대륙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신대륙의 버지니아 식민지로 가려고 계획했으나, 혹독한 날씨로 인해 매사추세츠 해안가에 정박하였다.

남쪽의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지 못하고 북쪽 메사츄세츠에서 정착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중요한 사실을 의논해야만 했다. 그들은 배 안에서 오늘 날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이라고 불리우는 중요한 결정을 문서로 만들었다. 그 내용은 영국 국왕의 승인 없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게 되었으나 새로운 땅은 영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고, 자신들은 식민지에 맞는 합당한 법률을 제정하여 복종하면서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처음 발을 내딛었던 곳을 자신들이 출발했던 잉글랜드의 도시의 이름을 따라 '플리머스'(Plymouth)라고 했다. 이것이 신대륙의 두 번째 영국 식민지 ‘플리머스 식민지’이다.  

1625년 찰스 1세가 국왕이 되자 영국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더 많은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했다. 1630년 국왕의 승인을 받은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먼저 만들어진 플리머스 식민지와 가까운 곳에 세번째 식민지 ‘메사츄세츠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곳에서는 청교도 외의 다른 종교들이 철저하게 배척되고, 오직 남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등의 엄격한 정책이 자리잡았다.
 

   
 보스톤 해안가에 전시되어 있는 메이플라워호의 모형 


1636년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엄격한 청교도 정책에 반발했던 토머스 후커가 한 무리를 이끌고 코넥티컷 주의 핫포드(Hartford)로 이주하여 신대륙의 세 번째 식민지 ‘코넥티컷 식민지’를 건설했다. 같은 해에 미국 침례교의 조상이 되는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1603-1683)도 메사츄세츠 식민지를 떠나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윌리암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반대하고, 신대륙은 원래 인디언 원주민의 땅이므로 마땅히 돈을 내고 사야하고, 당시 신대륙의 회중교회들이 영국국교회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다 메사츄세츠 식민지 총회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윌리엄스는 근처의 인디언들에게 몸을 의탁하여 지내다가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로 이주하여 인디언 원주민들과 평화로이 지내면서 또 다른 식민지,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윌리암스는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을뿐 아니라 신대륙에 침례교회를 전파하였다.2) 그 외에도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 식민지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얼마 후 메사츄세츠 식민지에 병합되었으므로 신대륙에 생겨난 영국의 식민지는 총 6개였다. 메사츄세츠, 코넥티컷,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를 당시 사람들은 신대륙에 있는 ‘뉴잉글랜드’(NewEngland), 즉 ‘신대륙의 새로운 영국’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식민지는 해안 도시 보스턴(Boston)을 중심으로 형성된 메사츄세츠 식민지였다.

에드워즈의 증조할아버지 윌리엄 에드워즈가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때는 1635년이었다. 에드워즈의 조상들은 코넥티컷 식민지에 정착하였다. 윌리엄 에드워즈와 함께 신대륙으로 온 그의 어머니 앤 코울스(Ann Coles)를 비롯한 몇몇 조상들의 묘가 코넥티컷 주 핫포드의 한 공동묘지에 지금도 있다.3)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날의 미국 사회, 정치, 문화를 생각하면서 에드워즈의 신앙과 부흥을 이해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의 북아메리카 신대륙을 지금의 미국과 같은 곳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한다. 에드워즈는 1758년에 죽었고,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 미합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독립전쟁은 1775년에 시작되어 1783년에 마무리되었다. 독립전쟁 후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은 독립된 새로운 나라인 미합중국의 주가 되었다. 

에드워즈 시대의 교회의 운영 방식도 지금의 미국 교회들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에드워즈 시대의 교회는 그 도시를 교구로하는 도시의 교회였고, 목회자의 청빙 등의 교회의 중요한 문제는 곧 그 도시의 중요한 문제였다. 에드워즈의 사례비 인상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마을의 주민들이 상의하여 결정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례비 인상, 청빙, 사임에 관한 내용들은 그 마을과 뗄 수 없는 일들이었고, 마을의 역사와도 관련된 일들이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의 목회자들의 사회적인 위치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의 유력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1636년에 매사츄세츠 식민지의 대표적인 도시 보스톤에서 시작된 하바드 대학(Harvard University)과 대학원을 졸업했거나, 에드워즈처럼 1701년에 코네티컷 주의 몇 도시에서 다른 이름으로 시작되었다가 후에 코네티컷의 대표적인 해안 도시 뉴 헤이븐(New Heaven)에 자리잡은 예일대학(Yale University)과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목회자들은 일반인들로부터 지식적으로 큰 존경을 받는 대단한 엘리트들이었고, 사회적으로는 판사, 유력한 정치가, 지위가 높은 군대 장교와 맞먹는 높은 위치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목회자들은 악행을 범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한 교회 내의 범죄자들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명령하고,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결정하는 권징을 주도하기도 했다. 현대교회의 목회자들이 그들을 흉내도 낼 수 없고, 흉내내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뉴잉글랜드 식믹지 시대의 상황과 지금의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첫번째 대부흥은 1734-1735년에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 부흥은 하바드 대학을 졸업하고 인근의 도시의 목회자로 부임하려고 노회에서 심사받게 된  2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의 신학 사상에 대한 논쟁과 함께 일어났다. 그 목회자는 당시 하바드 대학에 침투한 그릇된 신학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신학에 반하는 알미니안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우려하였고, 특히 에드워즈는 앞장서서 그 목회자를 교회가 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자신의 교회의 설교를 통해 알미니안 사상이 기독교의 진리를 허무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쳤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첫번째 대 부흥이 일어났다. 신학과 교리 배우기를 싫어하는 현대교회의 신자들이 에드워즈 교회의 교인들이었다면, 그 부흥이 일어나기는커녕 반대로 에드워즈가 남을 괴롭히는 인정 없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매도되었을 것이다. 1734-1735년의 대 부흥은 에드워즈의 신학적인 설교와 종교개혁 사상에 대한 열정, 즉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앙노선에 대해 이해하고 지지하는 수준 높은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 날 과연 어느 교회에서 그런 신자들을 볼 수 있을까? 지금은 에드워즈 같은 탁월한 목회자도 보기어렵지만, 에드워즈의 신학적인 설교와 종교개혁 진리를 배우려고 준비된 마음을 가진 수준 있는 신자들을 보기는 더욱 더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목회 방식과 부흥의 비결을 무작정 동경하고 따라하려는 것은 마치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격일 것이다. 

 

2) 인디언,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의 시대

에드워즈가 살았던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신대륙에서는 천주교와 영국 국교회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종교개혁 신앙을 마음껏 실천하고자 영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천주교를 진리의 종교로 믿고 종교개혁을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예수회와 함께 일했던 프랑스 사람들, 그리고 그 땅의 인디언 원주민들의 치열한 경쟁과 싸움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 역사의 결말을 다 알고 있으므로 그 시대의 신대륙의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에드워즈 시대의 신대륙의 사람들은 내일의 안전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지키고 싸워야만 했다.

영국에서 이주한 뉴잉글랜드 식민지 사람들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은 인디언 원주민들이었다.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는 처음부터 인디언들과 이주민들 사이에 생존 경쟁의 긴장이 시작되었다. 이주민들이 담배 농사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자 무리하게 담배 밭을 확장하면서 원주민들의 터전을 성급하게 침범했다. 인디언 원주민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20년 동안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혹독한 가난과 원주민들의 공격에 의해 죽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초기 상황은 달랐다.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이주민들은 처음에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 신대륙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코 오래갈 수가 없었다. 불과 20-30년이 지나자 이주민들의 수가 급증하여 원주민들의 생활터전을 위협했다. 처음에는 이주민들이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돈을 내고 구입하기도 했으나, 얼마 후부터는 강압적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나중에는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도 이주민들을 죽이려는 원주민들의 공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703년 에드워즈가 태어나던 해에는 불과 15마일(24km) 북쪽에 위치한 코넥티컷의 디어필드(Deerfield, Connecticut)에 인디언들이 나타나서 이주민 몇 사람을 사로잡아 갔다. 그 다음 해에도 인디언들이 출몰하여 이주민 39명을 죽였고, 112명을 사로잡아 캐나다 쪽으로 사라졌다. 그때 인디언들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생후 6주, 생후 6년 된 자녀들을 죽였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사로 잡아가다가 잘 걷지 못하자 도끼로 내려쳐 무자비하게 살해하기도 했다.4)

그런데 영국 이주민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인디언들의 배후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신대륙에서 종교개혁 신앙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천주교와 그들을 지원하는 프랑스 군대였다. 특히 카나다 쪽의 인디언들은 반종교개혁 운동을 위해 창설된 천주교의 예수회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군대와 연합되어 있었다. 1704년 카나다 인디언들이 코넥티컷의 디어필드와 인근의 도시를 습격하여 살인과 방화를 저지를 때, 프랑스 군대가 그들과 함께하였다.5)

에드워즈가 목회 활동을 할 때에도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는 카나다 인디언들의 공격은 영국 이주민들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745년에 에드워즈는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금식의 날에 설교를 맡기도 했다. 이 무렵의 에드워즈의 일기에는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아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지주 나타난다.6) 1차 대각성이 지나고 수년 후인 1748년에도 인디언들과 프랑스 군대가 함께 메사츄세츠의 이주민들의 도시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잔인하게 죽은 사람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은 치안유지를 위해 마을의 요소요소에 인디언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초소를 짓고 경계 근무를 서기도 했다. 에드워즈 집의 뜰에도 군인 2-3명이 경계근무를 서는 초소가 세워졌다.7)

인디언들로부터 당하는 생명의 위협은 에드워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이지지 않았다. 노스햄프턴 교회를 떠나 인디언 선교 마을 스톡브리지에 정착한 에드워즈의 인디언 선교 사역이 무르익고 있을 때에도 에드워즈의 그의 가족들와 영국 이주민들 모두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디언들의 공격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조종을 받는 인디언들이 덩달아서 영국계 이주민들을 공격하여 죽이기 시작했다. 1754년에 스톡브리지 인근 마을에 프랑스 군대의 조종을 받는 인디언들이 나타나서 영국 이주민 네 사람을 죽였고, 그 때문에 군인들이 스톡브리지에 초소를 만들고 상주하였으므로 에드워즈와 아내 사라가 그들을 돕고 섬기느라 재정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내용이 에드워즈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8)      

영국 이주민과 인디언들이 서로 죽이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영국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이주민들이 신대륙 원주민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 두 가지를 들자면, 하나는 영국 이주민들이 인디언 선교를 위해 카나다와의 국경지대에 건설한 인디언 선교마을 ‘스톡브리지’(Stockbidge)이다. 1737년부터 시작된 스톡브리지 건축 과정에는 에드워즈도 시작부터 연관되어 있었고, 외삼촌이며 에드워즈를 정치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강력하게 후원했던 노스햄프턴 교회의 성도 존 스토다드(John Stoddard)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스톡브리지에서는 인디언들에게 복음과 함께 농사짓는 방법, 영어, 수학 등의 문명화 교육이 진행되었다. 

또 하나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하여 큰 성과를 만들었으나 패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교사이다.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예일대학 시절에 에드워즈의 대부흥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에드워즈와도 밀접관 관계를 유지했다. 인디언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헌신으로 인해 많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안타깝게도 그가 병으로 일찍 죽자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를 기초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출판하였다. 훗날 이 책은 더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선교를 위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큰 도전을 주는 하나님의 수단이 되었다. 에드워즈 자신도 노스햄프턴 교회를 떠난 후 인디언 선교마을 스톡브리지의 선교사가 되어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 각주 ---

1)신대륙에 개척된 영국의 식민지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조하였다. 김상훈,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아메리카사> (다산에듀, 2011), 102-108.

2)강준만, <미국사 산책 1> (전자책, 2014).

3)https://www.geni.com/people/Anne-Cole-widow-Edwards/6000000003076830731

4)Jeorge M. Marsda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 14-15.

5)앞의 책.

6)Iain H. Murrey, Jonathan Edward: A New Biography (Carlisle, PN: The Benner of Truth Trust, 1996), p. 286.

7)Jeorge M. Marsda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 317.

8)Iain H. Murrey, Jonathan Edward: A New Biography (Carlisle, PN: The Benner of Truth Trust, 1996), p.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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