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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 옹호하는 분은 총신 교수 아니면 좋겠다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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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0  21: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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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아직까지 방언기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줄곧 고신의 박영돈 교수 등의 학자들이 현대의 방언기도를 인정하니 방언기도는 존재한다는 논리를 펼치더니, 급기야 (고)박윤선 박사도 방언을 인정했다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론에 올렸다.

“박윤선 만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정통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분은 주석을 쓰시면서 성령의 은사와 역사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깊이 있고 균형 있게 글을 쓰셨다. 때문에 늘 권위를 인정받으셨다. 평양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하셨으면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수용하셨고, 칼빈주의 전통을 참 귀하게 여기셨으면서도 지속적으로 한국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운동을 아주 강하게 반대하셨다. 사도행전 2장 1-4절을 주석하시면서 박윤선 목사님은 방언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첫째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 둘째,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박윤선 박사도 방언의 존재 인정했다, 뉴스파워, 2018.5.16)

박 교수는 방언은 없다고 하고 방언기도는 있다고 한다. 방언기도에 대한 주장을 하려면, 항상 자기의 연구에 기초하여 의견을 피력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알려진 다른 사람의 그릇된 견해를 업고 갈려고 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모름지기 학자는 자신이 외로이 연구하여 얻게 된 확신을 가르치고 주장해야 한다. 

나도 박윤선 박사의 방언기도에 대한 글을 읽어 보았다. 박윤선 박사님이 성경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기도의 유래와 차이를 잘 모르고 있었다. 박윤선 박사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방언기도를 권하지도 않았고, 엄금하지도 않는 모호한 자세를 취하셨다. 그것은 박윤선 박사님께서 성경의 방언의 신학적인 의미와 현대의 방언기도의 유래와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박윤선 박사의 가족과 매우 친한 분에게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박윤선 박사님이 초년에는 원산 부흥과 기도원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방언기도 은사에 대해 개방된 자세를 가졌으나, 나중에는 아무 뜻없는 소리현상에 불과한 현대의 방언에 대해 실질적으로 마음을 닫으셨다고 한다. 그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으나, 정작 박윤선 박사님 본인이 그런 내용을 명확하게 글로 남기시지 않았으므로 아쉽다.

현대의 방언기도 사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일상의 언어가 아닌 기도를 위한 특별한 영적인 언어를 주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근거를 성경과 교회사에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의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탁월한 인간 중보자 모세도 자신의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예수님도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성경의 그 누가 명확하게 자신이 기도를 위한 특별한 영의 언어를 받아서 활용한다고 말하였던가? 기독교에 기도를 위한 영적인 언어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21-22절이 방언 논쟁의 핵심

현대의 방언기도의 근거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발견된다는 주장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나는 그 동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현대의 방언기도의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수 없이 설명했다. 또 다시 반복할 수 없으므로 먼저 이전에 썼던 글 하나를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의 기사를 크릭하기 바란다.  

“정이철 핵심, 기독교 방언은 오직 이방인의 실제 언어”(바른믿음, 2018년 5월 1일)

나는 위 글에서 방언의 정체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고전 14장 21-22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1-22)

바울은 거짓 방언기도에 미혹된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이 이방인의 실제 언어로 나타나는 이유를 고전 14:21-22절에서 설명했다.

구약에서는 생소한 외국말을 구사하는 외국 군대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이 죄악된 이스라엘에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시작 무렵에서는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의 방언을 통해 죄악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심판이 선포되었다.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시는 방언을 통해 선포하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생소한 외국말하는 외국 군대를 통한 심판, 신약에서는 이방인들의 언어의 방언을 통한 영적인 심판, 이것이 고전 14:21-22절에 대조되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의 방언으로 영적인 심판을 선고하심은 유대인들을 생소한 외국말하는 군인들의 창칼로 심판하시는 것 못지 않은 저주의 선언이었다. 

이것이 신약의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논란은 없어야 한다. 이방인들의 언어의 방언을 통해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선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하나님이 친히 설명하시어 신약의 교회 설립을 하나님이 친히 도우셨다. 만일 성경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의 언어가 아닌 영의 언어로 기도하게 하는 은사였다면 이 중요한 일이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방언은 오직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다는 것 외의 다른 신학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짓에 미혹되어 현대의 방언기도를 성령의 역사로 주장하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기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들의 완고한 거짓돤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1)방언 기도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특별은사라는 주장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대체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모르는 비밀은 무엇인가? 인간이 자기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 일상적 언어가 아닌 특별한 언어를 받아서 하나님께 역으로 활용한다는 이론의 증인이 될 성경의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분명하게 찾을 수 있는가? 이 구절이 현대의 방언기도의 명확한 근거로 주장되기 위해서 먼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2)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주장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방언기도를 하거나, 신학적으로 방언기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위 구절을 근거로 방언기도가 남과 교회에는 이익이 없어도, 그 개인에게는 많은 유익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짜증나는 것이어도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용하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만일 바울이 정말로 성령이 주시는 방언기도의 은사가 존재하고, 그것이 교회에는 유익이 없으나 그 개인에게는 큰 유익이 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평소에 했던 중요한 가르침들을 스스로 파괴하는 우를 범하였다. 바울이 우리에게 모순된 내용들을 가르쳐서 혼동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오직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오직 그 개인에게 유익을 주는 현대의 방언기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말씀을 성경에서 없애야 할 것이다.

“But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to each one for the profit of all(고전 12:7, NKJV)

“각 사람에게 성령님이 계시는 증거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고전 12:7, 현대인)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12:7, 쉬운)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2:7, 공동)
 

3) 방언기도의 내용을 마음은 모르나 영은 안다는 주장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기도의 뜻을 우리의 마음은 모르지만 영혼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바울이 인간의 인격을 이렇게 이분화시키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다른 충분한 증거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서 인간의 인식체계를 영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으로 나누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가?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기도의 내용을 마음은 모르지만 영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인간의 인격을 영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으로 찢고 가르는 이방종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다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4)바울이 방언기도를 유창하게 잘 했다는 주장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현대의 방언기도 미혹에 빠졌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사도 바울이 방언기도를 매우 유창하게 잘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바울은 ‘방언을 더 말하므로’라고 했을 뿐이다. ‘방언기도에 유창하므로’라고 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방언’이라는 용어는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의 언어들을 의미하는 단순한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체 지중해 세계가 로마제국이었으므로 여러 나라들의 언어들은 단지 로마제국의 각 지방의 언어들로 이해되었다. 한국말로 쉽게 말해서, ‘지방의 언어들’을 줄이면 ‘방언’이다. 바울은 그 당시의 터어키 지방의 언어, 유대 지방의 언어, 로마지방의 언어, 그리이스 지방의 언어에 유창했다. 그리고 스페인에 가서 선교하기를 오매불망 소원했으니 틀림없이 스페인 지방의 언어도 말했을 것이다.
 

5)바울이 방언기도를 금지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39-40)

방언기도를 하거나 방언기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기도를 장려해야 하고, 단지 적당하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 어디에 방언기도라는 말이 있기나 한가? 다시 분명하게 보기 바란다.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고 했다.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교인들을 대상으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이 하게하시는 대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에는 방언의 은사가 여전히 활용되고 있었다. 자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예언과 하나님이 친히 이방인의 언어로 복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방언이 여전히 있을 때이다. 하나님의 정상적인 방언이 나타나면 예배의 은혜가 더 풍성해졌다. 그러므로 방언을 금하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이 구절들은 당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방언이 나타나고 있었고, 방언의 통역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복음을 설명하시는 내용이 교회에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방언이 통역되어 온 교회가 그 유익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이 불가능한 거짓 방언을 엄히 경계했다. 통역이 불가능한 거짓 방언이 나오면 너희들의 집에가서 하라!(고전 14:28)고 했다. 진짜 집에 가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가치없는 거짓 방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 당시 성경적인 방언은 반드시 통역의 은사와 함께 교회에서 공적으로만 활용되었다. 개인의 영성을 위해 사용되는 방언기도는 바울의 사상에서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바울의 알쏭달쏭한 말들의 원인

이런 내용들은 바울의 평소의 신학과는 분명히 다른 내용의 말들이다. 바울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을 했을까?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고린도후서에서 찾을 수 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 11:13)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교회에 이단의 씨가 뿌려졌던 것이다. 이단들이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거짓 은사의 씨를 뿌렸으므로 성경의 방언을 변질시키는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가 자라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방언에 대한 알쏭달쏭한 바울의 말들은 거짓 방언을 전파한 이단들의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면서 반박하고 비아냥하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울의 신학에서 하나님이 모르는 비밀을 인간이 방언기도로 하나님께 말하고, 마음이 모르는 내용을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스럽게 기도하고, 방언기도로 개인의 영성을 증진하고 ... 이런 사상은 바울의 사상도 아니고 정통 기독교 신학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방언기도 통역하는 사람이 없나?

마지막으로 현대의 방언기도가 거짓 소리현상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증거 하나를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방언기도 통역의 문제이다. 고전 14장에서 방언기도의 근거가 있다고 가정하였을 때, 동시에 당연히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방언기도를 통역하는 은사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7,28)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기도 미혹에 빠졌거나 신학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통역이 없을 때에는 방언기도를 집에서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복음을 설명하는 말을 하려면’ ...이라고 말한 것이다. 절대로 ‘방언기도를 하려면’라고 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상적인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예배 중에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을 교인들에게 말하면,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이 교인들이 모두 알도록 통역했다.

조용기나 이단들처럼 자기가 맘대로 지껄이고 또한 자기가 통역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자기가 떠들고 자기가 통역하면 그 내용의 신빙성을 누가 담보할 것인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시행되었고, 반드시 통역되어 온 교회가 유익을 누렸다. 성경의 방언은 반드시 ‘교회의 덕’(고전 14:12)을 세우려고 주신 은사이다. 방언뿐 아니라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그 개인의 영성수행의 수단이 아니고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거짓 방언기도 중독자들과 옹호자의 말을 따라 백보를 양보하여 방언 기도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방언기도 통역의 은사도 있어야 한다. 방언기도 중독자들과 옹호자들은 바울이 방언기도 통역이 없을 때에는교회에서 하지 말고 집에가서 하라고 했다고 한다. 어디엔가 분명히 방언기도를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언기도를 통역하는 사람을 찾아오기 바란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통역하면 그 내용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방언기도 녹음 테잎을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방언기도 통역자들에게 주고 통역하게 했을 때,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약간이라도 비슷하게 통역되어 나온다면 우리는 방언기도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가 지금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 보면 그 참담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알 것이다. 같은 방언기도 녹음 테잎을 비슷하게 통역하는 두 사람을 지구상에서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은 중지되었다고 하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비밀스럽게 기도한다는 방언기도를 주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다. 총신의 교수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알고 자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교수들을 뽑을 때에는 이런 정도의 신학점검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방언기도와 교회의 역사, 특히 아주사 거짓 부흥에서 나타난 방언이 과연 방언기도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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