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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에드워즈를 울린 것은 중도언약도 아닌 스토다드주의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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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8  03: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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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미 올렸던 기사인데, 중도언약에 대해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총신신대원 이상웅 교수님의 책에서 좋은 자료를 얻어 보강한 후 다시 올립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와 부흥을 연구할 때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은 에드워즈의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의 아버지, 즉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43-1729)이다. 스토다드는 1669년부터 1729년까지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1726년, 스토다드는 24세인 외손자 에드워즈를 부목사로 청빙하였고 3년 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스토다드의 뒤를 이어 에드워즈가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스토다드의 아버지는 보스톤 지역에서 소문난 부유한 상인이었다. 스토다드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을 배출했던 하바드 대학을 1662년에 졸업했고, 이어서 하바드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성찬 등에 관한 스토다드의 신학은 에드워즈가 일평생 주창하였던 칼빈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토다드와 노스햄프턴교회

스토다드와 노스햄프턴 교회의 만남은 1669년에 갑자기 이루어졌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 앨리자 메더(Eleazar Mather,1637-1669)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메더가 죽자 신자들은 스토다드에게 담임목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스토다드는 수락한 후 다음 해인 1670년에 노스햄프턴으로 이사하였다. 또한 스토다스는 홀로된 전임자 메더 목사의 미망인 에스더(Esther Warham)과 결혼했다.2) 당시에는 홀로된 목회자 미망인이 다른 목회자와 결혼하는 일이 비교적 흔했었다. 이후 스트다드와 에스더는 13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중에 한 명이 에드워즈의 어머니인 에스더 스토다드이다.

노스햄프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후 스토다드는 점차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저명한 목사가 되었다. 특히 스토다드는 원고에 얽매이지 않고 힘차게 설교하는 재능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훗날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가 회고한 내용에 의하면, 스토다드는 설교에 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디모데는 장인 스토다드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설교자는 자신의 재치 있는 말이나 웅변기술을 보이라고 강단에 세워진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양심에 믿음의 불이 붙게하려고 강단에 세워진 사람이다."3) 

에드워즈의 신앙과 일생을 기록한 이안 머레이(Iyan Murray)는 에드워즈의 설교 스타일이 비교적 단조로웠고, 원고에서 눈을 떼지 않고 평이하게 읽는 스타일이었다고 알려진 일반적인 정보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했다. 머레이는 만일 에드워즈가 단순하게 원고를 읽는 설교를 했다면, 그 교회의 신자들이 에드워즈를 좋아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머레이는 정말 에드워즈가 단조롭게 설교 원고를 읽는 설교를 했다면 스토다드 후임으로 청빙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4)

스토다드는 성경뿐 아니라 자연(nature)을 통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인간의 의지에 자동적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고, 또한 경험된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심령에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a commanding power on the heart)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스토다드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어도 인간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5)

스토다드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 시대의 다른 청교도 목회자들의 사상과는 다른 내용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회자들은 확실한 회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교리를 강력하게 믿고 신봉했다. 그러나 스토다드는 목회의 본질이 죄인들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의 사역의 목표는 죄인들의 마음을 바꾸는(conversion of the hearts of sinners)것이었다.6)

스토다드의 이런 사상은 원죄의 효력을 믿지 않은 미국의 2차 대각성의 중심인물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사상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피니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성령이 먼저 역사하시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준비하면 성령이 찾아오시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스토다드가 그릇된 신학과 목회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좋아했고, 그의 영향력과 명성은 계속 확대되었다. 그래서 당시 스토다드를 경계하는 청교도 목회자들은 종종 그를 '코넥티컷 계곡의 교황’이라고 비아냥하기도 했다.7)

 

스토다드의 성찬 신학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또한 복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람에게만 성찬에 참여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함부로 성찬에 참여하다가 죽기까지 했다고 언급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29,30)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확신하는 자에게만 성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고, 동시에 세례도 동일한 신앙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였던 스토다드는 성찬과 세례에 대해 조금 다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찬식 그 자체를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개종을 유도하는 '회심의식'(A Converting Ordinance)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8) 스토다드의 이런 주장이 훗날 에드워즈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스토다드가 성찬에 관하여 처음부터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스토다는 '중도언약'(Half-Way Covenant) 사상을 뉴잉글랜드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에 도입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스토다드 시대의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청교도 1세대의 탁월한 신앙이 그 자녀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성경대로 예수 믿기를 갈망하여 목숨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1세대는 떠났고, 그들의 자식 세대가 교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자식 세대는 부모에 의해 유아세례를 받았고,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고는 있으나 거듭남과 구원에 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교도 1세대의 신앙에 의하면 그 자녀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도 없고, 교회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여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은 유아세례를 받을 수도 없었다. 청교도 신앙의 원칙대로 하자면 그들과 그들의 자식은 교회와 무관한 이방인들로 규정되어야 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교회의 정회원으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닌 중간에 있는 교인들에 대한 신학 개념을 만든 것이다.

중도언약 개념이 적용된 사람은 신앙이 탁월했던 부모의 영향 하에 유아세례를 받은 후 교회를 떠나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기는 해도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중도언약의 골자는 그 사람들의 자식들에게도 유아세례를 베푼다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는 성찬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불신자로 여길 수도 없고 정식 교인으로 여길 수도 없는 어중간한 신앙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신학 개념이 바로 중도언약이었던 것이다.9)      

중도언약 사상은 스토다드가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기 약 8년 전 인 1661년에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중도언약 사상이 회중교회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스토다드였다.10) 1661년이면 스토다드가 불과 20살도 되지 않았던 때이고, 훗날 그가 담임하게 되는 노스햄프턴 교회는 칼빈주의자 앨리자 메더 목사가 건강한 몸으로 사역하고 있었던 때이다. 스토다드가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에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Wikipedia 백과사전에는 분명히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중도언약 사상을 주장했던 스토다드는 1704년, 즉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35년 정도를 목회하고 난 후부터 중도언약 사상에 반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스토다는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중도언약 사상보다 더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내용이었다. 총신 신대원 이상웅 교수는 스토다드가 중도언약 개념도 거부하고 더욱 위험한 자신의 성찬 신학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상웅 교수(총신 신대원)


“그러다가 1704년에 이르러 스토다드 목사는 성찬 참여 자격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공개화하게 된다. 스토다드는 외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찬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고 입장을 주장했다. 이것은 1661년 대회가 주창한 중도언약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입장이었다. 스토다드는 불신 영혼의 회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찬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죄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과 충족성을 배우는 한 방법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스토다드는 성찬을 회심의 규례라고 주장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이 ‘스토다드주의’라고 불리는 혁신안이었다.” 11)

스토다드는 자신의 주장의 신학적인 근거로서 다음의 두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진실로 거듭난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며, 또한 지상의 가시적 교회는 100% 완전하고 순결한 신앙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째, 성찬이 은혜의 수단(방편)이므로 비교적 올바른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개종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12)

스토다드가 성찬에 관하여 중도언약 개념도 파괴하는 더 위험한 내용을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또 있었다. 그는 국가교회(a national church)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구약 시대처럼 교회의 구성원들과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일시되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교회에 소속하여 세례를 받고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는 국가교회를 추구하는 그릇된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13) 당시 뉴 잉글랜드에서 목회자들의 사회적 신분은 매우 높은 계층에 속하였는데, 스토다드의 주장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은 더 많은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그래서 스토다드의 국가교회주의 사상을 좋아하는 목회자들이 매우 많았다.    

왜 스토다드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분명한 회심의 증거를 요구하였던 청교도 신앙과 배치되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을까? 교회와 멀어지고 있는 당시 뉴잉글랜드 청교도 2세대를 교회로 유입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그 당시 청교도 2세대들의 주된 관심은 신앙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 매더 목사는 여전히 철저한 청교도 목회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고, 교인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스토다드가 담임목사가 되어 엄격한 청교도 전통의 신앙에서 벗어나 개방된 목회 방식을 도입하자 교인의 수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14)

 

에드워즈와 성찬 문제

1726년부터 에드워즈는 스토다드가 담임했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1734-35년에 일어난 첫 번째 ‘코네티컷 계곡의 부흥’(Connecticut Valley Revival)과 1740-42년 동안에 일어난 두번째 부흥, 제1차 대각성(the First Great Awakening)을 이끌었다.

그러나 스토다드가 성찬에 관하여 뿌려놓은 그릇된 씨앗이 에드워즈의 목회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올무가 되었다. 1744년에 에드워즈는 교인들에게 최초로 스토다드의 성찬 사상이 옳지 못했다고 말했고, 174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그것을 교정하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에드워즈와 그 교회 신자들 사이에 성찬식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었고, 심각한 감정대립으로 치달았다. 1749년에 에드워즈는 친구 죠셉 밸라미(Joseph Bellamy)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당신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극도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신적인 도우심과 자비로우신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서 있습니다. 내가 내 딛는 발걸음 하나 하나, 그리고 내가 말하는 내용 하나 하나에 대해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으로 냉혹한 태도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하게 만들고 있고, 나의 말들과 행동들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빛처럼 주목받고 있습니다.”15)

에드워즈와 노스햄프턴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성찬식 참여 자격에 관한 문제로 극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결국 교인들이 에드워즈와 함께 하기를 싫어하므로 에드워즈에 대한 신임 투표가 진행되었다. 남자 성도들 230명이 투표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 중에서 에드워즈가 그 교회에서 계속 목회하기를 바란다고 의사표시를 한 사람의 수는 불과 23명에 불과했다. 1750년 7월, 에드워즈는 23년 동안 목회하면서 두 번의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공식적으로 그 교회를 사임했다. 

누가 에드워즈를 그렇게 슬프게 만들었는가? 에드워즈를 쫓아내려고 반대표를 던진 그 신자들인가?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를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도록 이끌어 준 외할아버지 스토다드 목사가 에드워즈를 그 교회로부터 쫓아냈다고도 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스토다드가 실천하고 가르친 성찬에 대한 그릇된 것들을 배운 신자들이 에드워즈의 올바른 가르침을 거부하고 싫어하여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에드워즈가 스토다드의 중도언약 사상 때문에 훗날 슬피 울게 되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토다드가 중도언약 사상만이라고 변함없이 실천했다면, 실질적 불신자들이 성찬에 참여하고 그 교회의 직분을 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회중교회의 중도언약 개념은 교회는 잘 다니나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정도를 허락하는 것이었지, 그들에게 성찬에까지 참여하게 허락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도언약 사상을 무너뜨리고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여, 불신자들이 노스햄프턴 교회의 직분자가 되는 길을 연 사람은 스토다드였다. 여기에 대해 이상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토다드가 왜 이렇게 입장을 바꾸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스테티나의 설명처럼 그의 회심 체험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아무튼 이와 같은 스토다드주의는 노스햄프턴 교회의 회원 자격을 느슨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도덕적 해이함을 가져오게 되었다."16) 

성찬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표징이다. 스토다드의 성찬 사상은 매우 비성경적이었다. 에드워즈를 담임목사로 청빙한 그 교회의 뿌리가 되는 사람들은 스토다드의 그릇된 성찬 신학으로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스토다드는 교회에 다니면서 특별히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 누구나 성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우고 훈련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회를 지탱하는 견고한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성찬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회의 핵심 인물이 된 사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완고하게 에드워즈의 올바른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그 사람들이 에드워즈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노스햄프턴 교회가 에드워즈가 직접 개척한 교회였고, 처음부터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 세력이 된 교회였더라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각주 ---

1)Solomon Stoddard-Wekipedia.
2)앞의 글.

3)Iain H. Murrey, Jonathan Edward: A New Biography (Carlisle, PN: The Benner of Truth Trust, 1996), p. 8.
4)앞의 책, p. 188.
5)Solomon Stoddard-Wekipedia.
6)앞의 글.
7)Jeorge M. Marsda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 11.
8)앞의 책, p. 31.
9)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부흥과개혁사, 2013), 98-99.
10)Solomon Stoddard-Wekipedia.
11)
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부흥과개혁사, 2013), 99.
12)Jeorge M. Marsda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p. 30-31.
13)앞의 책.
14)Solomon Stoddard-Wekipedia.
15)Letter to Joseph Bellamy, 6 December 1749 (Letters and Personal Writings, ed. Claghorn, 309).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의 Michael A. G. Haykin 교수의 수업 교재에서 재인용.
16)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부흥과개혁사, 2013),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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