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최근 한국 교회에 신비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신비주의로 물든 기독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한국기독교는 탈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신비주의는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경로를 거쳐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는 것일까? 그 근원적 본질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는 성경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 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다. 창조는 일종의 초월(超越)이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 너머 초월자인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內在者)로 자신을 계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은 내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늘 신비한 영역이다.

사실 성경의 저자들은 계시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모두 초월적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 저자뿐 아니라 초월의 신비한 영역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사람들에게 초월의 존재와 조우(遭遇)하기 위한 신비한 체험을 꿈꾸고 추구하게 만들곤 한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신비주의와 신비주의 신학이다. 이들 용어는 단순하게 중세 시대처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반성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넓은 의미에서 종교체험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은 자신이 이미 경험한 바를 기록했다는 면에서 신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이 신비주의나 신비주의 신학에 대해 부정적 기류나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신비주의 속에는 유사(類似) 초월의 기록들이 혼합될 가능성이 늘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신비주의는 초월을 믿는 사람들에게 동경(憧憬)의 부분이면서도 기독교적으로는 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밖에서도 미상(未詳)의 초월자와의 누미노제(numinose)한 체험은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초월 체험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것이 늘 정통 기독교가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그런 유사 초월적 신비주의의 진위와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오해와 편견이 아닌 건전한 성경적 신비와 유사 신비를 구분할 수 있는 잣대는 없을까? 본 논고는 그런 호기심과 고민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를 간략하게 개관해 보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신비주의적 현상과 요소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특별히 성경적 창조 신앙에서 그 기본틀을 만드는 기초 작업이 되기를 기대한다.

 

성경의 신비가 말하는 것

성경에 신비라는 단어는 주로 “뮈스테리온”(비밀, “musterion”)으로 표현된다. 신약 공인 본문(Received Text)에 27회 나오는 이 단어는 주로 바울 서신(20회)에서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계획과 측면들을 언급하는 단어이다. 즉 성경에서 “신비”란 곧 그리스도 계시와 관련된 비밀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초월적 신비는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사와 연관된다.

칠십인 역(Septuagint)에서 “뮈스테리온”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시 24:14)이나 숨겨져 있는 (군사적) 전략(외경 유딧서 2:2)으로 나타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계시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의 신비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의 비밀과 관련된 신비가 성경적 신비의 영역이라 할 것이요, 이를 벗어난 신비는 유사 신비에 속하는 악마적 영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로서의 신비주의

기독교의 신비가 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을 말하는 데 반해 영어의 “미스티시즘”(mysticism) 등 신비주의라고 번역되는 서구 근대어는 어원적으로는 (눈 또는 입을) 닫는 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myein”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물질적인 세계로 초월한 통상의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영의 세계를 중심한 철학, 교리, 가르침이나 신념이나 경험을 시사하는 것으로 신, 최고 실재, 우주의 궁극적 근거 등으로 생각되는 “절대자”를 인간이 자기의 내면에서 하나님 임재의 직접적이며 친숙한 의식을 통해 체험하려는 입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절대자는 물론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의 세상에도 관심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과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일관된 창조-타락-구속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반면 일반 종교로서의 절대자는 자신의 인격과 세상을 향한 절대자로서의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인격성을 보이기도 하고 인격성을 숨기기도 하는 “절대자” 앞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비 체험을 경험하려고 몰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적 합일(uniomystica)이라는 방식의 합일체험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와의 합일, 통상의 자기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의 합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탈각(脫却), 자기라는 틀의 돌파를 통해서만 현성(現成)하려고 한다.

 

신비주의가 기독교와 다른 점

그런데 이들 신비적 합일은 기독교적 신비와 조금 다르다. 즉 기독교의 신비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이 인격적 그리스도와 관련된 체험을 말하는 반면 이들 합일은 탈자(脫自)의 형태로 엑스터시(탈아, 망아)를 통해 개인 체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절대자”라는 것이 세계와의 합일이면 범신론의 형태가 되고, 만물의 신비 속에서 체험 되면 만유내재신론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애니미즘이나 미신이나 유사종교의 형태 속에서 체험되기도 한다.

이 같은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그리스도 계시로서의 신비가 아닌 말 그대로 주관적, 개인적 신비체험을 이루게 된다. 즉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기초한 반면 세속 신비주의는 주관적 체험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경 이외의 또 다른 특별 계시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비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기독교를 이탈한 주관적 체험이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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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