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과 현대교회는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다. 물론 정통교회와 개혁신학도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아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성도에게 성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작 성화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성도가 자신의 삶 속에서 성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거의 없다.

현대교회가 성도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신앙의 방법들이다. 오순절계통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도가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생겨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기 위해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서 철야를 하면서 몇 날 며칠을 기도한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증거로 방언을 제시한다. 기도하다가 현대의 거짓 방언이 터지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성화에 대하여 가르치는 목회적 현실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기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거룩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들은 볼 수 없다.

이러한 왜곡된 교리들이 현대교회에 만연한 것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미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교회에서 성도가 성령을 받으면 거룩해 진다고 하는 왜곡된 가르침이 있었다. 카톨릭의 7성례 가운데 하나인 견진성사를 보면, 견진성사는 성도에게 기름을 부어 성령을 받게 하는 의식이다. 쉽게 말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여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견진성사는 성도가 성령을 받아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가르침이 결국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 염수정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푸는 모습

그렇다면 성도가 성령을 받으면 거룩(성화)되는가? 요한 웨슬리는 성도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완전 성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결국 웨슬리도 완전 성화를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우리가 역사적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까지 로마교회나 오순절교회, 그리고 요한 웨슬리가 세운 교단에서 성도가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인간은 더 타락하고 악해져 가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왜곡시키는 일들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성도의 완전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고 있다.

여기에서 개혁신학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성도의 성화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고 있으면서 정작 믿음의 조상들이 가르쳐준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이신칭의만 가르친다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리석게도 개혁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개혁신학은 칭의와 함께 성화를 가르친다. 칭의 안에 성화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칭의를 말할 때 이중칭의인 믿음과 성화를 함께 가르친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어떻게 성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 즉 도덕법을 순종하면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이 바로 하나님의 도덕법을 요약한 것이다.

단순히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목적을 전혀 알 수 없다. 십계명은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다. 물론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 하지만 성도에게 이 법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으로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성도의 말과 행실과 태도뿐만 아니라 이해와 의지와 감정과 기타 영혼의 전역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겉으로 인사하고 서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에서는 미워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 결국 하나님의 법은 그것을 죄라고 정죄한다. 사랑하고 인사하면 그 속에서도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 동기는 선하지 못하면서 외적으로는 아주 천사 같이 행동하는 것은 외식이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이루시고 그 정신을 어떻게 보여주셨는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십계명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거룩한 법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주 큰 사랑이라고 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성도는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받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낼 때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믿음이 좋다고 해서 좋은 성도가 아니다. 좋은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정신과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며 순종하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빛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법, 즉 십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성도는 거룩(성화)을 이룰 수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 성도가 하나님의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순종하면 성화의 삶으로 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신령”하기 때문이다. 롬 7장 14절에서 율법은 원래 “신령”하다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령이란 형용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 사도가 신령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할 때 이 형용사는 현대교회가 사용하는 것처럼 어떤 종교적이거나 외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며 사용한 적도 없다.

다시 말해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영혼과 관계된 의미에서만 엄밀하게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성령과 관계된 의미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용법으로 볼 때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신령하지 않다. 기도를 많이 하고, 은사를 아주 특별하게 받은 사람만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성도가 신령한 사람이다.

이러한 이해 하에서 하나님의 법이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이 성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신령하기 때문에 그것이 성도의 외적인 삶의 모습과 행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성도의 생활과 마음과 상태와 감정과 의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는 그 동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세상의 법은 인간을 신령하게 만들지 못한다.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은 어느 정도 인간의 외적인 행동에만 규제를 할 뿐이지, 그 사람의 영적이며 마음까지 통제를 하지 못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세상의 법은 소득이 있는 자들에게 세금을 법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 세금을 내면서 어떤 사람이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내는 자가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법은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통치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은 사람의 영혼 전체까지 영향을 미친다. 외적으로 선하고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 속사람의 상태가 진실하지 못하면 여전히 그 사람은 외식적이고 가증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 살지 못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이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과 삶 전체를 거룩한 삶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은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방편이라고만 가르친다. 사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무지하였기 때문에 알고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가 신령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이후 신령한 법인 십계명에 순종할 때 신령한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은 성도의 내면과 외적인 모든 삶을 통치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외식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법이 거짓 없는 삶을 요구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앙이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믿어야 하며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현대교회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믿음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올바로 배우고 순종해야 한다.

사도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요구한다.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지 않는다. 네가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결국 모든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법 자체가 신령하기 때문에 그것에 순종하는 성도는 신령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법은 선하고 아름답다. 결국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신령한 법을 순종할 때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령을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자유의지의 노력으로 계명을 지켜서 성화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 마음에 믿음의 법을 심어주시므로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거룩해진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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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