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동안 미국 대통령들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세기의 복음전도자'로 잘 알려진 빌리 그래함 목사(Rev. Billy Graham,1918.11.7- 2018.2.21)는 지난 2월 21일 오전 7시46분에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Montreat)에 있는 그의 집에서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자연사이며,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그 동안 전립선암과 수두증(뇌에 수분이 축적됨) 및 파킨슨 병 등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은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의 대변인 제레미 블룸(Jeremy Blume)에 의해 확인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12 명의 미국 대통령에게 카운슬러 또는 고문으로 봉사해왔으며, 그는 평생 동안 전 세계 185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으며, 라디오, TV 및 인터넷에서 거의 일정한 존재감을 유지하면서 수백만 건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목사’라고 불렀으며, ‘개신교 교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건강 상태가 나빠진 빌리 그래함 목사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남성 중 한 명으로 여론조사에 정기적으로 선정되었으며 1955년 이래로 61회나 선정되었다. 또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던 1997년 회고록 『Just As I Am』을 비롯하여 34권의 책을 저술했다. 1996년 빌리 그래함과 그의 아내인 룻(Ruth)은 의회가 개인 시민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을 시작으로 모든 대통령에게 기도와 개인적인 조언을 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건강 문제로 그의 역할이 약화되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은 그의 사망 이후 트위터에서 그를 ‘대단한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렀고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종교에 의해 매우 그리워질 것이다. 아주 특별한 사람."

윌리엄 프랭클린 그래함 주니어(William Franklin Graham Jr.)는 1918년 11월 7일 빌리 프랭크 그래함(William Franklin Graham)과 모로우 코피 그래함(Morrow Coffey Graham)의 네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나 노스 캐롤라이나주 샬롯(Charlotte, N.C)의 낙농장에서 대공황 시기에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남부 동맹군이었다. 그의 가정은 장로교 개혁교단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매일 성경을 읽으라고 주장했다. 빌리 그래함은 종교보다 야구선수가 되기를 꿈꾸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생각을 악마적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라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북한을 두 번이나 방문(1992, 1994년)하여 김성을 접견했던 빌리 그래함의 생전 모습. 이 때문에 한국의 일부 교인들이 빌리 그래함을 마귀를 따르는 종북좌익아라고 멸시한다.

1934년 가을 빌리의 나이 16세에 그는 샬롯에서 있었던 여행전도자 모르드개 햄(Rev. Mordecai Fowler Ham)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을 작정하면서, 결단을 하는 자신을 보며 본인보다 더 놀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빌리는 복음주의에 반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름에 플러(Fuller) 브러시를 판매하며 밥 존스 대학 (Bob Jones College)에 들어갔다. 그때 테네시 주 클리브랜드에 있는 공인되지 않은 근본주의 학교가 있었다(현재 Bob Jones University,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그린빌). 그 다음 그는 인가받지 않았지만 덜 제한적인 탬파 근처에 있는 플로리다 성경연구소(Florida Bible Institute. 현재 Trinity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39년 남부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Bible Institute를 졸업 한 빌리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복음주의 대학 중 하나인 일리노이에 있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에 들어가서 1943년 인류학 학위를 받은 뒤 그곳에서 중국에서 17년간 의료선교를 했던 저명한 장로교의 선교사 넬슨 벨(Dr. L. Nelson Bell)의 딸이며 동료 학생인 루스 맥큐 벨(Ruth McCue Bell)을 만나 졸업한 같은 해 8월에 결혼하여 5명의 자녀(Virginia (Gigi) Graham Foreman; Anne Graham Lotz; Ruth Dienert; Franklin Graham, and Ned Graham)와 19명의 손주 및 수많은 증손자를 낳았다.

아내 루쓰 그래함(Ruth Graham)은 64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치고 2007년 6월에 사망했다. 빌리 그래함은 아내에 대해 "영적인 면에서 나의 아내는 나의 사역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1950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기반을 둔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 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를 설립하여 2003년 샬롯으로 이주했다. BGEA를 통해 그는 매주 "결정의 시간" 라디오 프로그램과 "Decision" 잡지를 출판했으며, 기독교 네트워크를 위한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34권의 저서를 썼다. 자서전 "Just As I Am." 그의 마지막 책인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 천국, 영원,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삶"은 2015 년에 출판되었다.

그가 지난 1973년 방문한 서울 여의도 전도집회 첫날에 51만 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주제로 열린 이 대회는 한경직 목사가 대회장을 맡았고 한국의 17개 교단이 연합하여 성회를 주관하였다. 당시 그 집회에서 2만 명이 결신하였다고 한다. 당시 빌리 그램함 목사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전도의 날"이라고 감격했었다. 그는 1992년과 1994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은 로잔운동 창시자(Founder, Lausanne Movement)이기도 하다. 지난 1974년 존 스토트(John R. W. Stott )와 함께 스위스 로잔느에서 세계복음화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를 개최하여 로잔느 언약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빌리 그래함은 1948년부터 세계적인 전도집회들을 인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목사였다. 그는 “복된 자들이여 하늘나라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다른 길은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빌리 그래함은 구원에 대해서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1958년 그는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어서 꼭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을 다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실토했다. 급기야 지난 1978년에는 성경은 “상징적”이며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1960년대에 그는 열렬히 분리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십자가 밑에 있는 땅은 평평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백인들이 십자가에서 흑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에 감동되었다"라고 말했다. 분리정책을 거부했던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Dwight Eisenhower)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과 상담하기도 한 바 있다. 백악관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래함 목사가 그와 만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매우 만족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는 1973년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에 대한 묘소 서비스를 주재하고 1994년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 장례식에서 연설했다. 2001년9월14일 그는 9.11 테러 이후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서 국가기도 서비스를 이끌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그레이엄을 절친한 친구로 간주했다.

"내 친한 친구인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목사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시민권 운동에 관한 저의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마틴 루터 킹 주니어)

그럼에도 빌리 그래함의 명성은 논란이 되었다. 1990년대에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쓴 반유대주의적 의견에 동의했는데, 2002년 유대인에 비판적인 닉슨 대통령과 가진 1973년 대화 테이프가 발표된 후 2002년과 2009년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비기독교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해지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사역과 단결에 대한 그의 헌신은 분리정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가 그의 봉사를 위해 통합하도록 강요했다.

2002년 뉴욕 타임즈의 한 기사에 따르면, 빌리 그래함은 유대인의 목을 조르거나 국가가 배수관을 내려야할 것이라고 말했고, 당시 빌리 그래함(83세)은 서면으로 사과를 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과 빌리 그래함 두 사람은 자유주의 유대인이 언론을 통제하고 포르노를 담당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지난 2012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밋 룸니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몰몬교)는 이단이 아니라고 표명하여 미국 기독교계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크리스천투데이 2012.10.28. "롬니 공개 지지한 빌리 그래함 목사, 교계 비판 직면" 참조)

또 빌리 그래함은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을 현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극존칭을 붙이고 칭송을 해 마지 않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같은 복음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1997년 5월 31일 TV프로그램 “능력의 시간”에 “긍정적 사고에 ‘예’ 하고 말하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에서 로버트 슐러가 “목사님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기독교의 미래는 어떠할까요?”라고 빌리 그래함에게 질문하였다. 그때 빌리 그래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늘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백성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슬람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불교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기독교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아니면 믿지 않는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간에 그들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인 겁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의 이름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들의 심령 안에서 알고 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빛으로 그들이 돌이킬 것이라는 사실도 그들은 그들 심령 안에서 알고 있습니다. 난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빌리 그래함)

이에 로버트 슐러 목사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둠 가운데 태어나서 성경말씀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혼과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군요. 제가 당신의 말한 바를 제대로 해석한 것인가요?”

그 질문에 빌리 그래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로버트 슐러는 “목사님 이건 놀라운 말이군요. 당신의 말을 들으니 정말 전율이 느껴지네요.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이 있다는 말이군요.”라고 말하자 빌리 그래함은 “그럼요. 있습니다. 있고 말구요.”라고 맞장구쳤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빌리 그래함의 장남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을 비롯한 차세대 복음 전도자들이 자신의 다음 세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5년 11월 77세의 생일에 그래함은 프랭클린을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 협회의 대표로 지명했다. 그의 딸 앤 그래함 로츠(Andne Graham Lotz)와 그의 손자 윌 그래함(Will Graham)과 윌리엄 그래함(William Graham Tullian Tchividjian)도 사역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의 아들 프랭클린은 그의 사역을 이어 받고 그는 샬롯의 빌리 그래함 도서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조용한 삶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여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습관처럼 말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종종 천국에 갈 때 내가 할 첫 번째 할 일은 '왜 주님, 저입니까? 왜 주님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 농장 소년을 선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훌륭한 동료 팀을 두고, 20 세기 후반에 주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왔지만, 하나님만이 그 답을 알고 계심을 압니다."

한편, 2007년 6월14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한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Ruth는 빌리 그래함 도서관(Billy Graham Library)에 묻혔으며, 빌리 그래함 목사 역시 같은 장소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가족 대변인 마크 데모스(Mark DeMoss)는 3월2일 금요일, 노스 캐롤라이나주 샬롯에 있는 빌리 그래함 도서관 (Billy Graham Library) 근처의 캔버스 텐트에서 장례식이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래함의 관은 2월24일(토)에 애쉬빌(Asheville)의 장례식장에서 샬롯(Charlotte)으로 옮길 예정이다. 장례식은 사적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그래함의 사역에 감동받은 가족, 친구 및 지역 사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약 2,300 명의 사람들이 90분의 예식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을 예정이다. 빌리 그래함은 사망하기 몇 년 전에 장례 준비에 관한 계획과 세부 사항을 개인적으로 승인했다. 따라서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이 장례식 메시지를 전하며, 나머지 네 자녀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며 간략하게 조사를 할 예정이다.

빌리 그래함의 설교 사역은 1949년 로스 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캔버스 대성당'이라고 알려진 대형 흰색 천막 아래에서 십자군 운동을 펼칠 때 처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족과 팀원들은 자신의 공개 사역이 시작된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천막 아래에서 장례식을 실시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가족 대변인 마크 데모스는 말했다. 빌리 그래함의 관은 2006년 앙골라 교도소(Angola Prison) 수감자가 손수 만든 것이다.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 협회(BGEA)는, BGEA(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Charlotte, N.C. 28201)에 꽃 대신에 BillyGraham.org 온라인 또는 우편을 통해 복음 전도의 사역에 대한 기념 기부를 해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기억 메모는 BillyGraham.org에 게시 할 수 있다.

BGEA은 Franklin Graham Festivals, Will Graham Celebrations, The Billy Graham Library, The Cove의 빌리 그레이엄 트레이닝 센터, SearchforJesus.net, Billy Graham 등 다양한 국내 및 국제 부처를 지휘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1950년에 빌리 그래함에 의해 설립된 이 조직은 2000년부터 그의 장남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전 세계 약 500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노스 캐롤라이나주 샬롯에 본사를 두고 호주, 캐나다, 독일,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본 헤럴드에서 옮겨온 글, 원제목은 "미국 남침례교 목사이며 세계적인 복음주의 부흥사 빌리 그래함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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