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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 공개적인 방언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없게하라박영돈 교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4장 서평 다섯번째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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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0  01: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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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4장 서평 다섯번째 글이다. 

박영돈 교수의 방언주장 5>
방언을 공개적으로 추구하고 활용하여 소외되어 상처받는 사람이 나오게 만들지 말라 

박영돈 교수의 현대 방언에 대한 주장의 핵심은 현대 방언을 공적으로 추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방언을 개인적인 기도의 은사로 알고 은밀하게 사용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영돈 교수는 더 나아가서 개인들이 은밀하게 방언 기도의 은사를 활용함으로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더불어 교회도 건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에 대한 박영돈 교수의 주장을 직접 읽어보자!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79 페이지)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79 페이지)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82 페이지)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85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현대 방언의 기도의 은사에 대한 위 주장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공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2) 방언을 성경대로 사용하면 개인에게 영적인 성숙을 준다.
3) 방언 못 받아 비애를 맛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박영돈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방언에 대한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내용이므로 참으로 심각하다. 왜 그러한지 하나씩 살펴보자!
 

1) 성경은 공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라고 가르쳤다(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185 페이지)라고 주장했다. 성경이 방언을 공 예배에서 활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말이다.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 27)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에서 반드시 공적으로만 활용되어야 하는 은사라로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쳤다. 바울은 왜 이렇게 가르쳤을까? 기독교의 방언은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이용하여 교회에 직접 설교하시는 특별한 은사였기 때문이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영성수련의 도구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가 교회에 임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방언을 비롯한 모든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박영돈 교수와 같이 아무도 통역 못하는 현대의 방언을 거짓 방언이라고 여기지 않고 개인의 기도하는 성령의 신비한 언어의 방언이라고 가르치는 거짓된 사람들은 위 말씀을 매우 악용한다. 문자 그대로 아무도 통역하지 못하는 방언을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계속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거짓 방언을 멀리하라는 의미이지, 박영돈 교수처럼 혼자서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

성령께서 통역 자체가 불가능한 방언을 왜 교회에 주실까?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통역하지도 못하는 방언을 예배 중에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었을까? 하나님이 바보가 아닌 이상 통역도 안 되고 통역하는 사람도 없는 이상한 방언을 교회의 공 예배의 설교 대용으로 주시는 분일까? 박영돈 교수와 같이 방언을 개인적으로 집에서 하라는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이단의 거짓 방언을 끝까지 성령의 방언으로 옹호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다. 통역이 불가능하고, 그 누구도 통역하지 못하는 방언은 거짓 영들이 고린도교 회에 심은 거짓 방언이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이 당시 고리도 교회에 이단의 씨앗이 자라서 심각한 결과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2) 방언을 성경대로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개인에게 영적인 성숙을 준다.(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는 방언을 성경대로 방언을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사용하면 개인에게 영적인 성숙을 준다고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182 페이지)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82 페이지)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위해 아마도 박영돈 교수는 다음의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그 개인의 유익(‘잘난체 함’)을 세운다는 이 구절을 바울의 진심이 담긴 사상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일관되게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개인의 덕(유익, 잘난체 함)을 위해서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의 방언 은사가 주어진다는 박영돈 교수의 주장은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완전히 상반된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12:7, 쉬운성경)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2:7, 공동번역)

예언, 방언, 신유 등 모든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유익과 덕을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유익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견고하게 하려고 주셨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반드시 공적으로 행해져야 했다. 그 결과는 교회의 신앙이 강화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강하게 전파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통역 안되는 방언을 공 예배에서는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하라는 박영돈 교수의 주장은 거짓 방언으로 교회를 복음을 혼잡하게 만드는 이단들의 전략과 일치하는 위험한 내용이다. 
 

3) 방언 못 받아 비애를 맛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는 공개적으로 방언을 받으라고 가르치면 꼭 방언을 못 받는 사람이 나타나고, 결국 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비애를 맛보게 되고 상처를 받으니, 공개적으로 방언을 받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79 페이지)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85 페이지)

   

현대의 방언을 공개적으로 추구하고 공개적으로 활용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상처를 받는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은 너무도 성경과 멀리 떨어진 내용이다. 현대의 방언을 못 받는 다른 사람들이 꼭 있으므로 공개적으로 방언을 언급하는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는 박영돈 교수의 주장은 꼭 신사도 운동의 대표 피터 와그너의 주장과 같다. 피터 와그너도 공개적으로 방언을 말하거나 꼭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신실하게 노력하고 구하였으나 끝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자매들을 알고 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 하여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또한 목회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일에 해당된다. 나의 아내 도리스(Doris)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방언에 대해서 열려있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아내를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녀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는 있으나 방언하는 은사는 없는데, 오순절 은사주의 신앙을 가진 형제들과 자매들이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피터 와그너)

박영돈 교수와 신사도 운동의 대표자 피터 와그너의 방언에 대한 주장이 왜 이렇게 동일할까? 두 사람 모두 이단들에 의해 일어난 1906년의 아주사 거짓부흥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시대 이후 2,0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방언을 성령세례의 징조라면서 본격적으로 가동시킨 이단들에 의해 현대의 방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와 피터 와그너는 이 중요한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아닌 현대의 거짓 방언을 계속해서 미화하는 엉뚱한 말들만 한다.

올바른 신학자라면 현대의 거짓 방언과 무관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이 현대의 거짓 방언을 받지 못하여 낙심하고 슬퍼하는 분위기를 조장하지 말라고 말한다는 것은, 곧 거짓 방언을 교묘하게 섬기고 숭배하는 행위이다. 공개적으로 현대 방언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말라는 박영돈 교수의 가이드는 아즈 그럴싸하게 진리를 훼방하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그래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박영돈 교수에게는 소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고신교단과 고신의 이대위가 박영돈 교수의 가르침을 고신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일반 신자들이 수용하고 따라도 되는 내용인지를 판단해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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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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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처럼 2018-02-20 02:53:28

    끝났네, 끝났어... 고신은 박영돈 교수로 인해 사망의 늪에 빠졌군요...ㅡ,.ㅡ

    아니, 어쩌면 책이나 설교 등으로 박영돈 교수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방언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이 보수 교단 내에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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