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요한의 지렁이 잡기(3)

새물결 플러스 김요한 대표, <지렁이의 기도> 저자


글을 시작하며

지렁이 잡기(2)에서 지적했듯이 “불의 체험”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 즉 사단이 주는 미혹의 체험이다. 따라서 “무릎을 꿇자마자 기세등등한 산불처럼 어떤 뜨거운 불이” 김요한 목사를 사로잡은 뒤, 김요한 목사에게 “아들이다. 됐냐? 뭐 하루 종일 화를 내고 그러냐?”라고 속삭인 맑고 분명한 음성은(지렁이의 기도, p.32) 성령이 음성이 아니라 사단의 음성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비록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만큼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삶이나 말(특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서)은 비교적 정직하고 모순 없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반면에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생각 없이 보면 참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삶이나 말(특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서)에는, 거짓 영의 특징인 속임수와 일관성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속임수와 일관성 없는 모순의 공통점은 사단의 속성인 ‘거짓’이다. 그러므로 거짓 영에 사로잡힌 김요한 목사의 삶이나 말(특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서)에서도 당연히 속임수와 일관성 없는 모순, 즉 사단의 속성인 거짓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교묘한 위장술로 인해 거짓을 발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필자는 지렁이 잡기(2)에서 김요한 목사가 파스칼의 메모를 조작한 속임수를 지적했다. 이번 지렁이 잡기(3)에서는 그의 말에 일관성 없는 모순된 거짓 진술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할 것이다.
 

홍혜선 씨가 점치면 불륜이고, 김요한 목사가 점치면 로맨스인가?

김요한 목사는 2014년 한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홍혜선 씨의 섬뜩한 전쟁 예언(卜)을 [지렁이의 기도]에서 소개하고 신랄하게 비판한다.(지렁이의 기도, p.157ff) 아마도 자신의 예언(卜)과 차별을 두려는 속셈인 것 같다. 아래는 김요한 목사가 비판한 홍혜선 씨의 예언(卜)들 중 하나이다.

“11월 말까지 한국에 있는 중요한 땅굴을 먼저 막아야 큰 일을 막을 수 있다. 안 막으면 25퍼센트가 더 죽는다”(지렁이의 기도, p.158)

김요한 목사는 이런 홍혜선 씨의 점(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최근에는 홍 아무개 전도사라는 사람이 올해 12월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해서, 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는 모양이다. 나는 홍 아무개의 전쟁 예언 역시 거짓 내용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성경의 예언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특정한 시기나 장소나 시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 피한다.....(중략)....(따라서) 어떤 ‘타임 테이블’ 혹은 ‘스케줄’을 제시하면서 예언을 남발하는 것은 성경적 예언이라고 보기 어렵다.

2. 성령께서 그의 백성에게 미래를 알려주실 때에는 항상 복수의 은사자들에게 함께 알려주신다. ....(중략)...신적 비밀을 마치 자기 자신만 독점적으로 받은 것처럼 떠벌리는 것은 성경적인 예언이라고 보기 어렵다.

3. 예언이나 방언을 통해서 주어지는 어떤 영적인 세계의 지식 같은 경우, ...(중략)....복수 은사자들을 통해서 방언통변의 형식으로 검증 또는 확증되는 것이 중요하다.(지렁이의 기도, pp.160-161)

홍혜선 씨의 예언에 대한 김요한 목사의 비판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수준 이하의 유치한 말장난에 불과해서, 정말 이 사람이 총신에서 신학을 수학한 목사가 맞는가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그의 수준이하의 비판 내용 전체를 다 비판하려면 책 한 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아쉽지만 앞에 언급한 세 가지 측면에서만 간단하게 비판하려고 한다.

그는 ‘성경의 예언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특정한 시기나 장소나 시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 피한다’는 성경의 보편적 사실을 근거로, 홍혜선 씨의 예언을 ‘어떤 ‘타임 테이블’ 혹은 ‘스케줄’을 제시하면서 예언을 남발하는 것은 성경적 예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또 ‘그의 백성에게 미래를 알려주실 때에는 항상 복수의 은사자들에게 함께 알려주신다’는 엉터리 기준(왜냐하면 하나님은 백성의 장래에 관한 계시를 주실 때 비교적 자주 복수 선지자들을 사용하셨으나, ‘항상’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으로 홍혜선 씨 혼자 한 한국 전쟁에 대한 예언은 거짓이라고 비판한다(당시 홍혜선 씨가 한국 전쟁에 관한 예언을 했을 때, 홍혜선 씨 말고도 정신 나간 어떤 사람이 그녀와 유사한 예언을 했었다).

그러나 김요한 목사가 제시한 성경적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인지한 김요한 목사도 ‘가급적 그렇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혜선 씨의 예언은 얼마든지 ‘가급적 그렇다’에 적용되지 않는 범위에 있는 진짜 예언일 가능성도 있다(물론 홍혜선 씨의 예언은 미친 소리,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거짓 영의 속성대로,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가급적’을, 마치 절대 기준인 것처럼 슬쩍 내세워서 홍혜선 씨의 예언을 비판한다. 따라서 홍혜선 씨의 예언에 대한 김요한 목사의 비판들은 하나같이 그럴듯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김요한 목사가 예언이 아니라고 비판한 ‘가급적’ 범위 밖에 있는 예언들은 성경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하나 든다면, 애굽의 바로 왕이 이상한 꿈을 꾸고,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함으로써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사건(창41장)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바로 왕에게 꿈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비록 이방인인 바로 왕이 꾼 꿈이지만, 그럼에도 그 꿈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요셉의 바로 왕의 꿈 해몽도 하나님의 계시, 즉 예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해몽한 하나님의 계시가, 홍혜선 씨의 예언처럼 김요한 목사가 제시한 예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셉의 꿈 해몽은 여지없이 거짓 예언이 되고 만다.

요셉이 해몽한 하나님의 계시(예언)에는 칠년 풍년, 칠년 흉년이라는 타임 테이블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또 이 계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수 은사자(김요한 목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자를 ‘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은사자’라고 표현한 것도 그가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는 성경의 표현을 무시하고, 임의로 ‘은사자’라는 표현을 썼으며, 또 이 표현을 통해 지금도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로 하나님이 계시하고 있다는 거짓된 암시를 함으로써, 종결된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들이 아닌 바로 왕 한 사람의 꿈에 의해서, 요셉 한 사람의 꿈 해몽을 통해서만 주어졌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가 홍혜선 씨의 예언을 성경적이 아니라고 비판한 것은 성경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나온 ‘코미디’에 불과하다. 더 더욱 우스운 것은 자신이 친 점에서도, 시간을 제시하는 타임 테이블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김요한 목사가 점친 예언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장인이 오늘 안 죽는다고 하시네. 일주일 시간 여유를 주시고 중간에 한 번 깨어나게 하실 거니까, 그때 온 가족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시네”(지렁이의 기도, p.191)

김요한 목사는 사람의 목숨을 놓고 점을 치면서 ‘일주일의 시간 여유’라는 타임 테이블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타임 테이블이 있는 홍혜선 씨의 전쟁 예언이 거짓이라고 비판한 김요한 목사의 행위는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어리석은 짓이며, “홍혜선 씨가 점친 것은 불륜이고, 내가 점친 것은 로맨스야!”라고 외치는 억지 코미디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차라리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홍혜선 씨의 엉터리 전쟁 예언이 김요한 목사의 아들, 딸 알아맞히는 조잡한 예언보다 하나님께서 조금은 덜 분노하실 예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김요한 목사가 비판한 3, 4번의 예언 기준은 더욱 가관이며 적반하장이다. 특히 3번의 예언 기준은 그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아닌 다른 거짓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김요한 목사는 예언과 같은 영적인 세계의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거짓 영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할 때 “복수 은사자들을 통해서 방언통변의 형식으로 검증 또는 확증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변한다.(지렁이의 기도, p.161) 이것이 바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김요한 목사에게는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라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 알고 있는, 절대적인 기준인 성경이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그의 머리에 있는 탁월한 성경 지식 말고, 심령 속에 있어야 하는 성경이 그에게 없다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가 그에게 없다는 반증이다).

김요한 목사가 내세운 “복수 은사자들을 통해서 방언통변의 형식으로 검증 또는 확증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검증 방법은 사단의 전용 수법이다. 두 세 사람에 같은 꿈을 꾸게 하고, 같은 예언을 하게하고, 비슷한 방언 통역을 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사단의 속삭임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게 하는 속임수는 사단의 전매특허이다. 그럼에도 성령이 없는 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두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말을 하면, 김요한 목사처럼 ‘신기하다’고 감탄하면서, 명백한 사단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의심 없이 성령의 역사로 믿어버린다.

그러면 어떤 영적인 메시지를 분별함에 있어서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또 너무나도 자주 김요한 목사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이라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자신에게 속삭이는 거짓 영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김요한 목사에게,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상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을 보라! 김요한 목사에게는 자신의 이해와 경험이 하나님의 계시 판단의 기준이 될지언정 성경은 결코 그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당시 나는 그 내용(홍혜선의 전쟁 예언)을 접하고서 역시 이 환상의 내용이 거짓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영적인 경험이라고 부르는 예언이나 환상이나 방언 같은 세계와 그 세계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이해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지렁이의 기도, p.160)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김요한 목사의 또 다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비판을 하나 더 살펴보자. 김요한 목사는 그의 첫 저술인 [상식이 통하는 목사]에서 송구영신 예배 때, 일부 몰지각한 교회에서 행해지는 ‘말씀 뽑기’를 비판한다.(상식이 통하는 목사, pp.59~64)

“~더욱이 이런 풍습은 세속 사회에서 행해지는 올해의 운세 혹은 오늘의 운세와 같은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판단하는 바이다. 물론 나도 송구영신예배에서 뽑은 성구가 희한할 정도로 이듬해에 자신의 삶의 내력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식의 간증(?)들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상식이 통하는 목사, p.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해석학의 기본 원리들을 무시한 채, 또 성서의 문맥을 도외시한 채, 그냥 어느 날 갑자가 카드 회사에서 제공한 성구 하나를 받아들고 그것이 이듬해 일 년 동안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철석같이 강변하는 태도란 얼마나 미숙하고 억지스러운 태도인가.”(상식이 통하는 목사, p.62)

그러나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전후문맥도 없이, 성경적인 것은 더 더욱 아닌, 오히려 ‘오늘의 운세’처럼, 또 뻔한 점쟁이들처럼, ‘이번에는 딸이다. 다음에는 아들 낳겠다’(지렁이의 기도, pp.97-99)는 등의 김요한 목사의 예언(卜)보다는 그래도 ‘말씀 뽑기’는 성경 구절인데 김요한 목사의 점보다는 차라리 ‘말씀 뽑기’가 조금은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여기서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야!”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과 구원의 삶을 위해, 기록으로 남겨주신 유일한 계시인 성경을 파괴하는 점치는 행위는, 홍혜선 씨가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한 불륜이고 김요한 목사가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한 불륜이다.
 

김요한 목사를 조종하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조국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라고 주께 질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조국의 회복이라는 민족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의문에 답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요한 목사의 영은 복 중 자녀의 성별에 대한 김요한 목사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주셨다. 성별을 아는 것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정보도 아니고, 고작해야 유아용품을 마련하는데 약간 도움이 될 정도(유아용품은 아이를 낳고 난 뒤에 마련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인데,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아서, 또 실정법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성별을 말해주지 않았는데, 김요한 목사의 영은 친절하게도 그것을 말해주었으니 그 영은 할 일도 없는 참 한가한 영인가 보다.

“아들이다. 됐냐? 뭐, 그런 것 갖고 하루 종일 화를 내고 그러느냐?” 참으로 우습게도 내가 처음 들었던 성령의 음성은 “아들이다. 됐냐?”였다.(지렁이의 기도, p.32)

“아들이다. 됐냐?”는 김요한 목사가 스스로 실토한대로 우스운 성령의 실없는 소리다. 왜냐하면 복중의 아이의 성별을 맞추는 문제는, 서울역 앞에 있는 노숙자들(노숙자들의 인격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노숙자님들께 양해를 구한다) 10명에게 물어 보면, 5명은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그 우스운 음성에 신기해하며, “아,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구나” 하고 감격한다.(지렁이의 기도, p.33)

아무튼 김요한 목사가 말한 대로 자신에게 우습게 말한 그 영은, 적어도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자들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영은 결코 아님이 분명하다. 김요한 목사에게 우스운 짓거리를 말한 영은, 성령으로 위장하여 김요한 목사에게 “엎드리자마자 진동이 온몸을 쥐어짜듯 뒤흔들어댄, 지진이 난 것처럼 몸이 요동치며, 손을 내저으며, 감당치 못할 은혜 앞에서 몸 전체가 바닥에 내동댕이처진 상태에서 데굴데굴 구름, 온몸을 감싸는 불길에 뜨거워서 견디지 못함, 방언으로 외치기 시작함”(지렁이의 기도, p.33)의 매혹적인 체험을 하게 한 사단임에 틀림이 없다.

또 김요한 목사는 2015년 11월에 이사를 준비 중인 <새물결아카데미>에서 “일터신학”을 강의하는 L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순간 성령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너희 가정은 서울로 올라와야 길이 열리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활동의 폭이나 길이 막힐 수밖에 없으므로 성남을 떠나 봉담으로 이사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라”(지렁이의 기도, p.117)

이런 속삭임은 특정 지역이나 장소에 제한을 받는 귀신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하나님께서 L목사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면 어떻고, 먼 곳이면 어떠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 도성보다는 변두리 갈릴리 마을에서 일하시기를 더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에게 속삭인 영은, 장소와 상관없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서울에서 먼 곳에서는 L목사의 길을 열어줄 수 없는, 귀신들을 부리는 사단임에 틀림없다. 물론 김요한 목사의 말을 듣고 신림동으로 이사 온 L목사도 김요한 목사와 다를 바 없는 오십보백보의 불쌍한 영혼이다. 신림동에서 전세 얻은 돈 2억 3천 만 원으로 봉담에서 집을 샀으면, 어쩌면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글을 마치며

김요한 목사는 [지렁이의 기도]에서 자신이 점친 예언들 사이사이에 성경에 대한 탁월한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 사이사이에 집어넣은 거짓 영이 속삭인 목소리를 성령의 목소리로 위장하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녹아있는 점치는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씩 성경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결국 다른 사단의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엉터리 성경 해석과 아전인수 격인 적용으로 일관된다. 이렇게 그의 삶의 이야기가 성경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이 그의 심령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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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