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요한 지렁이 잡기 1

들어가며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한국교회가 보여준 가장 치욕적인 민낯은, JTBC 방송의 메인 뉴스 시간에 연속적으로 보도되었던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 부자 세습 사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야말로 한국교회의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 다른 타락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앞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부자세습이 교회마다 줄을 이을 것이며 이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실족하게 될 것이다. 벌써 명성교회 안에서는 피를 토하며 실족하는 영혼들이 양산되고 있다.

어쩌다 한국교회는, 김일성이나 할 수 있는 치졸한 부자세습의 짓을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자행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자세습이 처음 있었을 때, 한국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자세습의 책임은 누가 뭐래도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가 한국 교회의 부자세습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김 목사 이전에도 부자세습은 있었다. 대구서문교회가 1995년에, 그리고 1997년에는 인천주안교회가 아들에게 세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서울 역삼동이라는 요지에 있는, 그리고 1997년 당시 신도 수 4만 명의 대형교회라는 상징성, 또 김창인 목사의 한국 기독교계에 대한 영향력과 위치 등으로 인해 충현교회의 부자세습은 다른 교회들의 부자세습과는 그 차원을 달리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충현교회의 부자세습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교회 원로목사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시작한 것을 보면 자명해진다. 특히 감리교의 3형제 목사로 유명했던 교회들의 부자세습은 김창인 목사의 치명적인 영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001년에 김선도 목사(광림교회)는 자신의 아들 김정석 목사에게 교회를 세습시켰고, 당시 교인 수 약 12만 명으로 감리교 교단의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2008년에 아들 김정민 목사에게 금란교회를 물려줬다. 뒤이어서 김국도 목사(임마누엘교회)도 2009년에 아들 김정국 목사에게 자신의 교회를 세습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교회들이 부자 세습을 감행했고, 급기야 한국 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가 부자세습 범죄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만약 지금부터 20여 년 전 김창인 목사가 부자세습을 감행했을 때, 지금처럼 <바른믿음>의 정이철 목사 같은 이가 있어서 부자세습의 문제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나팔을 부는 자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지금처럼 되었을까? 물론 인간의 사악한 욕심이 빚어내는 부자세습의 바벨탑을 궁극적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부자세습이 손바닥 뒤집듯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물론 힘없는 몇몇 사람들의 비판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힘 있는 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바른믿음>과 같은 나팔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무나도 손쉽게 한국교회는 부자세습의 바벨탑을 이 지경까지 쌓을 수 있었다.

아, 그때 우리 조국교회에도 ‘안디옥 사건’에서의 바울처럼 왜곡된 진리를 향해 나팔을 부는 자가 있었더라면 . . . .
 

‘안디옥 사건’이 주는 교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바나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뭐라고 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모든 사도들, 특히 유대인 사도의 대표자이며, 얼마 전까지도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 명실상부한 초대교회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역 초기에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부정적인 생각 속에서도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을 가장 잘 이해해 주었던 자가 바로 베드로가 아니었던가?

바울에게 바나바는 또 어떤 인물인가? 바울이 회심 후 무명으로 변두리에서 제대로 된 주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까지 바울에게 내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바울의 신원을 보증해 줌으로써 바울의 선교를 가능케 한 사람도 바로 바나바였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들을, 그것도 공개적으로 책망하며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왜 그랬을까? 바울은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베드로에게 권면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베드로의 실수를 발판삼아 그의 권위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베드로보다 더 우위의 목회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일까?

그것은 베드로의 외식의 영적 심각성과 함께 그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저지른 안디옥에서의 외식은 복음의 진리를 파괴하는 범죄 행위였다. 베드로의 외식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짓이었으며, 한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는 무서운 짓이었다. 바울이 11절에서 베드로의 외식을 가리킨 “책망 받을 일”의 헬라어 원문은 “kategnwsme,noj”(카테그노스메노스)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일’이라는 의미인데,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즉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을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심각한 범죄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짓을 한 베드로의 가공할 영향력(권력)에 있다. 13절을 보면 남은 유대인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누구보다도 복음 위에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할 바나바마저도 외식하는 자리에 동참했을 정도로 베드로에게는 가공할만한 권력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바울은 이런 행동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만약 바울이 자신에 미칠 유, 불리를 따져서 베드로에게 대놓고 책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바울은 베드로를 추종했던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그렇게 심하게 방해와 핍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이방인 선교 사역은 훨씬 더 편했을 것이며, 어쩌면 로마에 죄수로 끌려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랬다면 목이 잘리는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초대교회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에 율법이 섞여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물론이고,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초대 교회 전체가 한 동안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존재하다가 결국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베드로의 위선을 지적하며 공개적으로 나팔을 불었다. 그로 인해 바울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지만, 복음은 바르게 지켜졌고 그로 인해 교회는 더욱 복음 위에 든든히 서 있게 되었다.

오늘 날 한국교회에도 바울과 같은 나팔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바른믿음>의 정이철 목사 같은 이가 불어대는 나팔은 너무나도 귀중하다. 그 동안 <바른믿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리는 나팔을 얼마나 많이 불어댔는가? 그러므로 <바른믿음>은 겪지 않아도 되는 기막힌 모함과 수모를 얼마나 많이 당해 왔는가?

이번에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김요한 목사를 향해 <바른믿음>은 나팔을 불었다.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그랬듯이 정이철 목사도 무명이랄 수 있는 시절에 김요한 목사의 배려로 <새물결플러스>에서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책을 출판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 상당한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전보다 더 심한 곤욕과 수모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김요한 목사는 베드로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상당한 저변과 권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김요한 목사는 공개적으로 비판 받아야 한다.

김요한 목사의 책을 폈을 때, 책을 읽기도 전에 필자를 놀라게 한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명한 자들의 추천사였다. 그동안 필자도 제법 많은 책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추천사를 쓴 사람이 32명이나 되는 책은 예전에 본 적이 없었다.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추천하는 이가 많다는 것은 그 책의 탁월함과는 별 상관이 없다. 추천하는 이가 전혀 없어도 탁월한 책들이 있는가 하면, 추천하는 이가 [지렁이의 기도]처럼 많아도 질이 형편없는 책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은 추천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책의 저자가 그만큼의 막강한 권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추천사를 쓴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출판계 종사자 4명, 언론과 방송계 2명, 저서가 있는 자 19명, 이들 중에 김요한 목사의 <새물결플러스>에서 책을 낸 적이 있는 자가 7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교회를 대표(?)할만한, 나름대로 상당한 명성과 힘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이들 중에는 필자와 반대편에 있는 방언 전도사 김동수 교수도 있고, 필자와 같은 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장로교단(합동) 소속의 송태근 목사, 이찬수 목사도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김요한 목사는 의식해야 할 더 큰 권력이다. 이 막강한 김요한 목사의 권력이 자신의 책을 추천하는 자를 32명이나 만들어 낸 것이다(아마도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더 많은 추천사와 외국의 유명한 자들의 추천사까지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추천자들 중에 특히 필자가 이해할 수 없는 추천자들이 있었다. 바로 필자가 속해 있는 장로교단(합동)의 송태근 목사와 이찬수 목사 등이다(이들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비판할 것이다). 과연 이들은 [지렁이의 기도]를 끝까지 제대로 읽기는 한 것일까? 만약 제대로 읽었다면 [지렁이의 기도]가 어떤 용한 점쟁이의 간증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했을 텐데, 그런 것을 알고도 추천사를 써 준 것일까? 장로교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한 목사라면, 추천사는커녕 끝까지 읽기도 어려운 책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성껏 추천사를 써서 헌정했다. 이것은 베드로의 외식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바나바까지 영향을 받아 외식에 동참했던 것처럼, 실로 가공할 권력의 영향력을 지닌 김요한 목사의 용한 점빨에 이들도 함께 빨려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김요한 목사의 묘한 신비주의는 공개적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김요한 목사의 점빨에 취한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더욱 소름끼치게 걱정스러운 것은 김요한 목사의 젊은이에 대한 빗나간 비전이다. 책에서 밝힌 대로, 그는 방언 통변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10대가 사회정의에 눈이 열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세대로 변모될 것이라고?”(지렁이의 기도, p.127)의 계시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나는 개인적으로 2013년에 각종 방언통변과 예언 및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수십 번 반복해서 확증하신대로, 장차 이 나라의 젊은 세대들 가운데 남북의 화해와 연합을 위해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지렁이의 기도, p.276)는 확신으로, 2015년에 시작한 “새물결 아카데미”를 통해 자신의 확신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교회의 수많은 소년들과 젊은이들을 붉은 용이 만들어 놓은 사지로 몰아 갈 것이다. 그래서 김요한 목사는 공개적으로 책망 받아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앞으로 필자도 <바른믿음>과 함께 [지렁이의 기도]를 중심으로, 김요한 목사의 성령을 빙자한 빗나간 점쟁이 놀음을 신랄하게 비판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요한 목사는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바울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음’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그를 향해 나팔을 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갈2:14)

위 본문의 “바르게 행함”(ovrqopodou/sin/오르도포두신)에서 오늘 날 의료분야 중 “정형외과”의 명칭 “orthopedics”이 유래되었다. 이 단어의 반대 의미는 “절뚝거림, 잘못된 길로 나아감”이다. 만약 바울이 베드로와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의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나팔을 불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더라면, 아마도 안디옥 교회와 나아가서 모든 초대교회들은 영적으로 뼈가 어긋나서, 절뚝거리며 잘못된 길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동일하게 김요한 목사의 성령을 빙자한 빗나간 점쟁이 놀음도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한국교회는 특히 김요한 목사의 권력 아래 있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절뚝거리며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믿음>은 김요한 목사의 [지렁이의 기도]가 실상은 [붉은 용의 주문]임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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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