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1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읽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책의 전체 6장을 모두 정독하고, 각각 서평을 쓰려고 한다. 저자의 약점과 한계를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여 얻을 수 있는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발전시키고자 함이다. 오늘은 이 책의 1장 ‘뒤틀린 성령의 음성’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겠다. 
 

성령 운동, 성령 사역자

먼저 이 책의 제목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성령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왜곡하는 사람들로 인해 성령 하나님이 오도되는 현실을 말하고 싶어 이런 제목을 잡으신 것 같다. 그러나 이 제목 자체가 주는 나쁜 메시지가 염려된다. 지금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칭 성령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성령과는 무관한 거짓 성령의 사람들, 즉 미혹의 영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거짓 영에게 미혹된 사람들을 '미숙한 성령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는지 조금 우려된다.  

이 책의 부제 “한국 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는 더욱 못 마땅하다. 한국 교회와 고려신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의 성령 하나님에 대한 책이 이렇게 소개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성령운동'이라는 말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 제사의 효력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 즉 성령을 모시고 사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능력과 거짓 방언 등을 동반하는 추가적이고 무한반복적인 거짓 성령세례 사상이 등장하면서 생긴 말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신자에게 성령은 단 한번 영속적으로 임하신다. 두 번, 세 번, 네 번 ... 반복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성령이 반복적으로 임하신다는 주장은 성령을 가장하는 악한 영의 방문을 환영하게 만드는 거짓 성령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성령운동이란 결국 성령이 더 오게하고, 성령이 더 올 때 동반된다는 거짓 방언 등을 일으키게 만드는 운동이다.

초창기에는 성령운동하는 방법으로 1)성령을 간절히 사모함, 2)성령세례를 위한 금식, 3)성령세례를 위한 회개, 4)성령세례 받기 위한 꾸준한 기도 ... 등 비교적 유순하고 종교적인 내용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을 이미 더 많이 받은 사람으로부터의 영적인 영향이나 물리적인 안수기도 등을 통해 성령이 더 많은 은사들과 치유 등을 몰고 들어온다는 거짓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성령운동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거짓 성령 사상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자는 성령운동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아야 한다. 

“바울의 이런 태도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주님의 말씀과 부한된 자세이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성령 사역자의 모습이다.”(25 페이지)

이 책에서 박영돈 교수는 ‘성령 사역자’라는 말도 사용했다. 성령 사역자라는 말도 바른믿음을 추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더욱 써서는 안되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성령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성령이 일하시는 방식과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령의 일하심의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게 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15)

성령이 일으키시는 초자연적 이적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목적으로 일어난다. 성령이 성령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없다. 성령은 자기의 비젼과 나라를 꿈꾸시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지상에 임하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리”(행 3:20)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 5: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문론 이런 사실을 박영돈 교수가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이러한 진리가 설명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이러한 진리가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바르게 전달되게 하려면 ‘성령 운동’, ‘성령 사역자’라는 용어도 쓰지 말았어야 했다. 대신 ‘말씀전파’, ‘말씀의 사역자’, ‘그리스도의 일꾼’ ... 등의 용어를 쓰셨어야 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이 없는 것처럼 일하시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드러내고 증거하여 하나님 백성을 생산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사역자라는 말은 말씀과 그리스도가 아닌 성령의 사역 그 자체에 관심과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바울, 바나바, 스데반, 베드로 ... 등 사도행전의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성령 사역자 이미지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위대한 사람들과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에는 성령세례 또는 기름부음을 일으키기 위해 안수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 사역자라고 이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의 조직신학을 대표하는 교수가 성령운동, 성령 사역자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더욱 안될 일이다. 


박영돈 교수의 헷갈리는 예언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는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31 페이지)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 외에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32 페이지)

박영돈 교수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예언에 대해 매우 원칙적으로 설명하였다. 요즘 자신에게 하나님이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주장하면서 '이사 갈 곳', '태중의 아이', '환자의 생명의 기한' 등에 대해 말하여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지렁이의 기도>의 저자 김요한 목사(새물결 플러스 대표)의 실상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도 한 눈에 보게 만드는 예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영돈 교수가 조금 전에 설명한 예언(계시)에 대한 지극히 옳은 내용을 스스로 파괴하는 말도 곧 이어서 한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이 그를 치유하기 위해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있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100% 주님의 말씀인지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치 않는 것을 직통 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종하고 기만하는 것이다.”(34 페이지)

앞에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을 읽고 전하는 경우에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특별하게 직통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즉흥적인 느낌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오도하고 있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지금 직접 말씀하시는 예언이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박영돈 교수는 읽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확실치 않는 것을 직통 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종하고 기만하는 것이다.”(34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이 말은 확실한 하나님의 직통의 예언이 있다는 뉘앙스이다. 그럴리는 없겠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신구약 66권으로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인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36 페이지)

신약의 예언의 은사에 대해 박영돈 교수는 잘 설명하였다. 신약의 예언자(선지자)들도 특별한 때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특별계시를 받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신약의 선지자들이 전했던 예언은 이미 주어진 특별계시를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돕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 가르치는 말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구약과 연계하여 더 빨리 파악한 선지자들이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예언의 은사이다.

신약의 예언자들은 기본적으로 교사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은 자기 믿음의 분수에 맞게 예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믿음의 분수에 맞게 예언하라는 것은 자신이 잘 아는 것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신약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계시였다면, 그들에게도 자주 성령의 감동으로 음성, 환상, 꿈 등이 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바울은 예언자들이 성령이 주신 것을 가감하지 무조건 전하라고 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하신 내용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6 페이지)

박영돈 교수는 앞에서 자신이 설명했던 정통신학의 예언 신학을 무너뜨리고 있다. 앞에서는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아니고 오류있는 인간의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주신 직통계시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예언자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신약의 예언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에서 했던 신약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라는 내용도 하나님이 주신 직통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장의 오류를 뜻하는 말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박영돈 교수의 예언 신학은 처음부터 그릇되게 형성된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설명하는 예언 사상은 정확하게 현대의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 운동에서 설명되는 예언 사상이다. 현대의 예언운동가들도 성경 수준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종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낮은 수준의 예언, 상대적인 예언, 개인적인 예언, 인간의 오류가 내포된 예언은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방언,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를 통해 이러한 예언이 지금도 주어진다고 한다.

박영돈 교수의 예언 사상도 동일하다. 닫힌 예언관이 아니고 열린 예언관이다. 고려신학교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교의 교수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열린 예언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예언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박영돈 교수도 동일한 예언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 14:29).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검증해 보고 잘 분별하여 참과 거짓을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령 말씀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36 페이지)

“성령이 떠오르게 하신 인상과 메시지는 인간이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여 잘못 전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36 페이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이 그를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 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장치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박영돈 교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34 페이지)

이렇게 말함으로 박영돈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예언자들과 은사주의 예언자들의 수준으로 자기의 신학을 완전하게 일치시켰다. 앞에서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예언자의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것을 오류있는 인간이 잘못 해석하여 틀린 예언을 남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너무 유치한 주장이다. 하나님이 만일 현대의 어떤 예언자(?)의 마음에 특별한 느낌, 환상, 이미지를 부어주신다면 동시에 반드시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그것을 숙제로 남기면서 “네가 깨달아 보아라!”고 하시지 않는다.

구약을 보면 선지자들에게 먼저 환상을 보이신 후 그것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마게도냐 사람 환상을 본 후 성령께서 자신을 마게도냐로 보내시는 것을 깨닫고 그곳으로 향했다(행 16:10). 발람의 나귀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뭔가를 주시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이 평생 동안 태우고 다닌 주인에게 온전하게 예언하였다. 

박영돈 교수처럼 유치하게 예언에 대해 가르치는 학자들은 한결 같이 고전 14:29절을 내세우면서 예언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분별하라’라는 단어는 사람의 말의 내용을 판단하라는 뜻의 단어가 아니다. 사람의 외적인 특징을 구별하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의 의미로, 야고보서에서 부자 신자와 가난한 신자 사이의 구별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성숙성을 가진 한 사람을 찾아내라는 의미로 쓰였다. 

팔머 로벗슨은 더 놀라운 것을 이야기했다. 권위있는 대부분의 신약성경 사본들 속에 고전 14:29절의 ‘분별하라’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자신이 확인했다고 했다. 그는 ‘분별하라’는 단어는 후대의 성경 번역자들이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 추가한 단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웨인 그루뎀이나, 박영돈 교수처럼 ‘분별하라’는 단어에 집중하면서 “현대의 예언은 인간의 오류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의 진위를 성경에 비추어서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예언 이론이 자동적으로 허물어진다고 했다.

박영돈 교수의 글에 보통 1%의 오류 및 독이 있어서 독자들에게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이전에 말하였는데, 이 책의 1장의 내용에서는 그 이상의 문제를 보았다. 예언에 대하여 독자들의 신앙을 오도하는 치명적인 위험성이 내포되었다고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자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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