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논단 > 정이철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 개념은 무의미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2.14  05:46:19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우리의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이미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는지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칭의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연구하기 위해 페이스 북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토론과 의견을 요청했다. 순식간에 50 여개의 댓글 토론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 의미있는 의견들을 모아 기사로 작성하였다.
 

   

정이철 목사>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게 만드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합니다. ‘율법의 마침’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많은 분들과 토론하고 싶습니다. ‘율법의 마침’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여하신 모든 율법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표하여 다 지키고 준수하였다는 뜻인가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 흠없이 사시다가 우리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여하신 모든 율법의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 주셨다는 뜻인가요?

 

   

Jooho Choi 님>
정이철 목사님, 이미 살펴보셨겠지만, 다른 분들도 보시라고 고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옮겨 드립니다.

“여기서 율법의 마침이란 말은 원어로 율법의 끝이라는 뜻이다. 율법 밖에서 의를 얻는 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오셨으니,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던 율법의 사명은 끝났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로서 우리의 속죄자가 되실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다. 그가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박윤선 박사님의 로마서 10장 4절 주석)

정이철 목사가 (고) 박형룡 박사의 가르침에서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달라고 요청하자, Jooho Choi 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아주셨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영생의 공로를 세울 목적으로 아담이 완전상태에 가졌던 언약 관계에 들어 가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구성하나니 그가 영생 획득을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의 언약적 방면을 준수하심에 행하신 모든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히 2:10-18, 5:8-10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묘사함에 눈부시는 표현으로 하였다.”(고, 박형룡 박사님 <기독론> p.351)

 

   

김대운 목사>
저 역시 '율법의 마침'은 율법의 기능이 마쳤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지키면 온갖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과 지키지 않으면 저주와 무시무시한 형벌이 주어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류는 모두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와 무서운 형벌을 피하려면 어떻게든 율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기에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의지하며 이 율법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만들기 위하여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메시아의 출현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적으로 더 개혁되어야 할 부분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오류와 모순들을 적극적으로 교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한 부분도 상당수의 신학들이 칼빈을 따라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들도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적어 놓았습니다. 찰스하지도 상징적 해석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이런 상징적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최대한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그의 조직신학에서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상징적 해석은 성경 자체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부분만 수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주석이나 성경해석에서 상당부분 영적 해석한 흔적들이 발견됩니다. 이 부분들은 후세대들이 교정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이해도 교정이 필요한 듯 보입니다. 너무 스콜라적인 구분을 한 것 같습니다. 칼빈이 워낙 위대한 인물이라 감히 거기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투레틴도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서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으로 구분하였고, 신앙고백서들이 이를 그대로 따릅니다.

신앙고백서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분들은 이 부분에 반기를 드는 것에 대해서 개혁주의에 신학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교정을 시도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 깊이가 여기서 한 번 더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에드워드가 과거의 개혁주의자들의 성경해석에 교정을 시도함으로 더 성경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부분은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총신의 강웅산 교수님의 논문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의 전가의 교리"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에드워즈도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눌 때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으로 구분하지만, 그는 이 구분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미를 소위 개혁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적극적 그리고 소극적 순종이라는 구분을 반기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구분은 성경도 익숙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순종은 좀 더 쉬워 보이고 다른 순종은 좀 더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그것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며, 이것을 더욱이 ‘능동적-수동적이라는 전혀 반대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그의 강조는 오히려 ‘속죄를 이룬 것만이 아니라 영생을 사신’것이며, 우리를 ‘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구원’인 것이다. 결국 흔히 수동적 순종으로 여겼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순종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며 더 나아가 그 사건 속에서 능동이니, 수동이니 식의 의미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순종의 삶의 최고의 표현으로써 성부가 보시기에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행동에는 우수한 의와 초월적인 도덕적 선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속죄의 값(ransom)을 지불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오시는 것이 그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 기능적 특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기계적인 복종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성자의 기능적 특성은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동등을 전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부가 성자에게 그의 영광에 어긋나는 굴욕을 요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성자가 성부에게 구속사역상 종속의 관계에 놓이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어떠한 동의가 전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언약신학에서 말하는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이 언약에서 성자는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순종하였기에, 그 자체가 성부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그의 기쁨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며, 고로 의가 된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분까지도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의 의미에 포함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아버지의 훼손되었던 존귀와 영광을 회복하며,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던 의가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즈의 칭의의 개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곧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의견들을 볼 때, 우리에게 칭의를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가 적극적 순종하셨다는 관점 안에서 1차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것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시었고, 특히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극치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죄를 속하심'이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사신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에드워즈는 흠없는 순종의 삶을 사셨고,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자들에게 속죄와 칭의가 주어진다고 보았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고,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시어 얻으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전통적인 신학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토론이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에게 의가 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시었다는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며 흠없고 의로운 삶을 사시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자에게 속죄와 칭의의 은혜가 단번에 주어진다."  

정이철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바른믿음
최근 3개월 동안의 중요 기사 10
후원방법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USA)
대표(발행,편집):정이철(734 678 7133, cantoncrc@gmail.com)  |  편집자문: 정태윤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이철
Copyright © 2018 바른믿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