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예수'는 구약 성경의 여호와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는 구약의 여호와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어느 목사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더 정확하게 보면, 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 이와 같이 A=B 이고 B=C 이므로 A=C 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해석은 어떤 조직신학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주장이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호와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직분의 명칭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고 파송하신 메시야인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여호와가 될 수 있는
(다음은 서철원 박사님의 최근 작품 「교의신학전집」 4,5권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서 박사님은 기존의 개혁신학자들이 만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의의 전가 교리가 성경과 종교개혁 신앙에 비추어 볼때 매우 부당하고, 로마교회의 도덕적 칭의론을 개신교 용도로 각색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개혁신학의 역사적 흐름과 주된 내용을 한 눈에 조망하며 거침없이 그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걸출한 한국인 신학자의 심원함을 접하고 싶은 신학도들이 필히 소장하고 일독하기를 권한다. 정이철 목사)"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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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의 한 독자에 의해 코르넬리스 프롱크 교수의 율법 이해가 바울의 율법 이해와 완전히 상충되고, 심하게 말하여 바울에 의해 프롱크 교수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있다고 제기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으므로 급히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 성경의 율법에 관한 모든 말씀들을 살펴보았다.과연 기독교의 율법에는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게하는 기능이 본래 있었는지 각자가 살펴보기 바란다. 1. 아브라함“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2,3)아브라함 때에는 아직 율법이 없었으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무슨 행위로 의롭다함
(정이철 목사는 프롱크 교수님을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분의 작품을 매우 즐겨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의 내용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 독자가 강하게 어필하시면서 이 글을 올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바울의 성경의 글에 의하면 그런 것인지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의 한 독자와 전화 통화를 가졌다. 그 분은 최근의 율법에 대한 논쟁을 처음부터 관심있게 보았다고 하였다. 기회를 삼아서 성경과 다른 책들을 보면서 많이 공부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3:21절에 의하면 율법에서 의가 나온다는 사상은 명백한 이단사상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앞에서 필요한 의를 얻을 수 있으면, 왜 예수님이 피를 흘렸겠습니까? 구약의 최대의 복음계시 사건인 유
이혼은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마 5:32; 마19:4-6). 그러나 요즈음 이러한 또는 저러한 이유로 이혼을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려고 상황 윤리를 따지고 있고, 세상은 이혼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그러나 이것은 세상풍조와 사회법을 하나님의 법, 즉 성경 말씀 위에 두려고 하는 악한 시도 입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삼각관계 속에서 누구도 변개치 못할 세 가지 규례를 설정 하셨습니다. 1)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인 안식일 제도, 2)남자와 여자의 관계인 결혼 제도, 그리고 3)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인 노동제도입니다.결혼의 근본은 하나님의 언약(규례)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
칭의 이해(구원 탈락 가능성)에 대해서 2016년부터, 그리고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2017년부터는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는 칭의 이해에 관해서는 직접 토론에 참가하였고 CLC를 통하여 을 출판했다. 그리고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관객으로 참여하고 있다. 나중에 이것도 저술로 묶는다면 또 하나의 좋은 신학담론을 한국 교회가 소유하게 될 것이다.‘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담론은 짧은 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걸쳐서 누적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칭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칼빈의 말처럼 칭의 이해는 신학에서 경첩(hinge) 역할을 하고 있다. 문짝이 경첩과 연결되지 않으면 제 구실하지 못할 것이니, 루터의 말처럼 칭
변승우 씨(목사)를 한기총이라는 곳이 회원으로 영입하였다. 변승우 씨가 더 이상 이단 시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목적으로 그 일을 했을지라도 사실 그 효과는 나타날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한기총이라는 곳이 그런 어이없는 일을 함으로서 한국교회가 혼란에 빠질 뿐이다. 변승우 씨를 영입하는데 앞장선 사람이 전광훈 목사라고 한다. 나는 그 당사자 변승우 씨를 더욱 더 이해할 수가 없다. 왜 한국교회의 울타리 속으로 굳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일까? 변승우 씨는 그 출발과 성공의 과정이 적 그리스도 적이었다. 변승우와 그 무리들의 규모의 확장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피를 발판으로 삼았다고 과언이 아니다.다음의 영상들은 변승우 씨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던 무렵에 미국 뉴저지에
(다음은 서철원 박사님의 (그리스도론)의 pp.166-167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한국인으로서 세계 교회의 역사적 개혁신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신학자가 평생 동안 가르치고 연구하며 다듬어 낸 기독교의 진리를 번역이 필요없는 우리 말로 접하는 기쁨을 맛보기 원하는 신학도들이 반드시 소장하고 일독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정이철 목사) 첫 인류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므로 곧 하나님의 섬을 거부하므로 죄인이 되어 생존권을 박탈당하여 죽게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지킴 곧 순종히므로
(다음은 존 파이퍼의 글 "The Sufficiency of Christ's Obedience in His Life and Death"를 정이철 목사가 번약한 내용이다. 존 파이퍼도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의를 얻고 전가했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충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이전의 예수의 생애의 모든 순종과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존 파이퍼에게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구분되는 별도의 예수의 율법준수의 의의 획득과 전가 교리를 믿는 흔적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 존 파이퍼의 원글이 아래에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롬 5:19; 고후 5:21; 롬 4:6, 11; 10:3)가 만들어졌다
종교개혁 완성자 존 칼빈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의의 획득과 전가 사상이 있었을까? 칼빈이 에서 율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설자인 사도 바울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바울과 칼빈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하였다.1) 바울과 칼빈에게서 아담이 창조될 때부터 율법이 주어졌고,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받았으며, 훗날 시내산에서 그 율법이 모세를 통해 기록되어졌다는 사상을 찾을 수 없다. 바울과 칼빈은 율법이 인류가 죄 아래 떨어지고 난 후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을 가지시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중세 암흑기 동안 로마가톨릭은 바벨론에서 탄생한 로마교의 가르침을 뒤섞어 넣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해했다.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이라고 판결받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받아 죽어간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자신이 양심적으로 믿는 신앙 때문에, 로마교회가 강요하는 가르침과 우상숭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서를 높이 쳐들고 죄를 대항해 피로써 항거한 5천만 명의 그리스도인 남녀가 로마교황권에 의해 살상되었다."-J.M. Carroll, The Trail of Blood"로마교회는 일찌기 인간 가운데 존재했었던 어떤 제도보다도 더 많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역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
예수님이 단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셨다는 것만 강조하면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범죄에 대해 저주하시고 진노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완전히 흠이 없고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어야만 했습니다.특히 율법도 잘 지켜야만 했습니다. 율법의 사형선고 하에 있는 잃어버린 자기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 자신도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율법의 요구를 따르셔야만 했습니다.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눅 2:21)를 받으시는 등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귀하신 일생은 시작부터 율법을 준수하시는 삶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하셨다면, 마치 구약시대의 제물로 드려지는 황소에게 피부병이 있으면 온전
(다음은 서철원 박사의 (인간론)의 pp.168-17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정통 개혁신학을 배우고, 전혀 이질감 없이 한국인의 신앙 정서에 맞게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개혁신학의 진수를 맛보기 원하는 독자들이 반드시 구입하여 일독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정이철 목사) 언약신학은 개혁신학에만 있다언약사상은 개혁신학에만 있다. 그러나 언약의 설정과 전개가 개혁신학에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비추어서 언약체결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언약을 구원 혹은 영생 얻음을 위해서 체결했다는 면에서만 보았다. 영생을 위해서 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처음 창조가 불완전하여 보충이 필요
성경에서 언약은 창세기 6:18에서 노아와 맺은 언약에 최초로 등장한다. 개혁파는 창세기 1장에서 무죄 상태인 아담에게 주신 명령을 언약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노아 언약이 새로운 생활 체계를 이루는 구조이다.아담 언약은 첫 언약이고 실패한 언약이다. 실패한 이유는 아담의 범죄이다. 이 때 죄의 개념을 확립할 수 있다. 죄는 언약을 깨드리는 것인데, 언약을 깨는 것은 반역이다. 범법은 언약이 유지되지만 반역은 언약을 깨는 것이다. 그래서 반역을 범하면 반역자는 그 땅에서 살 수 없이 3족을 멸하는 것이 왕권의 위계이다.첫 상태에서 죄는 정녕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창 2:17). 아담은 반역했고 하나님은 반역한 아담을 즉결 처분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후손으로 회복 방안을 선언하셨다(창 3:15
아담이 행위언약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신학적 주장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1)아담은 영생이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다.2)아담은 영생의 상태로 진입가기 위해 선악과로 대표되는 율법들을 준수해야 했다.3)(성경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으나) 영생으로 진입하기 위해 아담이 지켜야 했던 율법은 훗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과 율법들이다.4)아담이 율법준수에 실패하여 영원한 죽음에 처해졌다.5)구원자 예수(제2의 아담)는 아담의 자리에 들어가 모든 율법들을 지켜서 자신과 죄인들을 위한 의를 획득하였다.6)예수께서 율법을 지켜 얻은 의(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하여 죄인들에게 칭의가 주어졌다.7)또한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수동적 순종의 의)으로 죄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에 대한 우리의 태도1)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우리의 성품이 형성되고 행위가 조절되고 바로 잡아질 수 있어야 한다.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사단(악한자)의 어떤 시험(유혹)이 있을 때에라도즉각적으로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주장 하지 않을 때에는 내 육신의 정욕과 죄악이 나를 유혹하고 지배해 버린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악과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실행, 책
정이철 목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노승수 목사가 토론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오류들을 주장하였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다.1)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적 순종을 했다.2)그리스도가 자기의 속죄를 스스로 이루었다.3)종교개혁의 핵심은 능동적 순종의 의이다.4)예수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통해서도 죄책이 다 제거되지 않고 오직 교회에 허락한 은혜의 수단을 실천하여 이루는 성화를 통해 죄책이 제거된다.5)원죄와 오염이 부모를 매개로 자식에게 전달(죄의 혈통유전설)된다.여기에 대해 노승수 목사는 “노승수 ‘정이철 씨는 협잡과 음해를 멈추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하여 반박하였다. 안타깝게도 노 목사가 계속 미숙한 신학적인 주장을
성경을 믿는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아는 것은 종종 어려운 문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자체나 심지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 조차도 너무 모호하고, 심지어 오도되기도 한다. ‘정통주의’는 수염 난 사제들을 연상시킨다. ‘보수주의’는 종교적인 확신보다 정치적인 입장 혹은 괴팍한 고집불통(a temperamental stodginess)처럼 들린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과거에만 해도 어떤 매우 위대한 기독교 학자들에게 적용되던 것이, 오늘날에는 반지성주의를 연상시키는 비난이 되어 버렸다.나는 성경을 믿는 모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설명하는 최고의 용어가 ‘복음주의’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단어 또한 역사를 통해 다소 모호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방언(方言)’은 표준어로 사투리, 즉 지방어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여러 의미로 신학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단수형(글롯사)과 복수형(글롯사이)으로 등장한다. 이창모 목사는 복수형이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로 이해했다. 방언은 1세기 예루살렘과 고린도에서 발생했는데,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이창모 목사는 고전 14:14-15절에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린도전서 이후로 방언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창모 목사는 몬타누스파들이 방언했다는 견해를, 몬타누스의 추종자인 프르스길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키벨레(Cyblele) 신전에서 이상한 노래로 흥분시키는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