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중엽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였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문제는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에 있다. 그들의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복음주의자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들이 고의적으로 그들을 포용할 때에도 그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잘
성경의 창조 계시, 그 독특성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과 구별되는 성경의 특별한 점은 성경이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는 유일무이한 계시라는 점이다. 이 창세기 창조 해석은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 “창조”는 인간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눈뜨기 전부터 인류에게 내려진 창조주의 계시였기 때문이다. 즉 이 계시의 특징은 세상에 태어난 아기들이 언어라는 약속을 배우며 전혀 모르던 세상의 구조를 깨우치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의 영역에 주신 초월 계시였다. 창조주는 결코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아니다. 진리는
질문>그 동안 목사님이 연구하여 바른믿음에 올리신 그들을 보니, 누군가는 이미 지적했어야 했을 내용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난 수 백 년 동안 청교도 운동에 대해 모두가 칭송만하고 아무도 목사님과 같은 비판을 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보십시오. 청교도 신앙으로 하나님 믿으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저는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설명하겠습니다.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었다는 내용은 없습니
믿음과 도덕에 관한 진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어느 쪽이 최종 권위를 갖고 결정하느냐에 대해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은 과격한 차이와 대조를 갖는다.로마교회는 어머니 교회로서 교회가 정경을 확정하였으므로 교회가 성경을 지배해야 바른 권위가 행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바르게 행사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바른 해석을 하므로 공회의의 결정들이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이에서 나아가 교황이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를 행사한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므로 교회가 구원진리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듯이,
도올은 신학자인가?그렇다면 도올은 신학자일까? 분명 유사 신학 도서나 성경 강해서를 쏟아냈으니 신학자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신학의 맛(한신대 중퇴)을 보았으며 이미 청년 시절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의 정통 과정을 끝까지 이수한 적은 없으며 교회 교역자로 봉사한 경험은 없다. 그런데 왜 계속 교회는 그의 신앙과 신학에 일정한 관심을 갖고 우려를 표명하는 것일까? 신학자가 아님에도 이미 그는 신학의 딜레탕트를 넘어선 사람이다.기독교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정통 신학자는 아니기에 신학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부
오늘날 복음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은사운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것이다.은사운동과 천주교회 포용의 예들오늘날 복음주의는 은사운동에 대해 포용적이다. 아니, 포용적인 정도가 아니고 많은 은사주의자들을 포함한다. 1993년, 카리스마지는 오순절파가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회원교회들의 약 51%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보고서는 약 80%라고 한다. 또 미국복음주의자협회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자신이 복음주의 운동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또
질문>정이철 목사님, 인천 그리스도 보혈교회 스데반 황목사님 아시지요? 그 분은 목사님이 청교도 사상에 이단성이 있다는 연구를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공교회의 신앙과 청교도 신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보세요. 답변>공교회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편교회의 의미로 공교회를 말하고, 어떤 사람은 역사적 공의회를 주도했던 초대교회 당시의 보편교회를 공교회로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적인 차원이라는 의미로 공교회라는 말을 사용
질문 1>“삶과 죽음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서철원 박사 해설>“내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것은 주 예수께서 그의 피로 나를 사셔서 나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죄와 죽음 아래 팔린 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과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내가 범한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조상들의 반역이 내게 전가되어 나는 반역자의 후손이 되었다. 반역자의 후손은 반역자와 동일한 운명과 벌을 받게 되어 있다”(34)“주 예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더 이상
발트의 성경관 비판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지만 또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전체로서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18세기부터 신학계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성경에 내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것을 신학의 업무로 삼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는 계속 축소되어 산상수훈으로까지 한정되었다.20세기에 이르러 칼 발트 (Karl Barth)는 전통적 자유주의자들
신약과 구약은 함께 읽어야 한다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둘은 하나의 책 곧 교회의 책이다. 구약이 교회의 책으로 수납된 것은 전체로 그리스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그 전체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가르치고 있다. 전혀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는 부분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록되었고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다. 다 그리스도 출현의 준비이다.신약은 구약에서 기원하였다. 신약이 구약과 무관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신약의 부분들도 구약의 빛에서 읽고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의 뿌리가 구약이므로 구약과
질문>노우호 목사님의 율법 이해는 어떻습니까? 정 목사님께서 다음의 영상을 들어보시고 말해 주십시오.답변>운전하면서 대략 들어보았습니다. 일일이 녹취할 시간과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참 이 상황이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전에 노우호 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설교도 하고 강의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으면서 비판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기 쉬운 일이 아니고, 너무 쉽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중요하지만, 인간미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미가 너무 없으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verbun Dei)이므로 그 전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listincte) 한다. 따라서 성경은 자명성 (perspicuitas)을 가져 모든 독자들에게 그 전하고자 하는 뜻을 명료하고 (clare) 확실하게 (ceric)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맥 가운데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은 자기 해석자이프로 (Scripture interpres sui ipsius est), 성경이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 (auctoritas finalis)이다성경의 중심과 목표는 예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말 2:15 전반절)성경에는 수천 군데 난해 구절이 있습니다.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한영만 지으셨다" ... 이 부분을 해석해 보겠는데, 제가 구약학자는 아닌 조직신학자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1. 이 말라기 구절(15)에 대해 딘탄(R.C. Dentan)은 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라 했습니다. 그만큼 이 구절에 대해 학자마다 해석이 다양합니다.2. 우리 성경은 KJV번역을 따랐는데, 거기다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는 증상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에 응집력과 일관성 있는 교리가 없다. 확실성을 가진 진리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축복, 은혜, 위로, 평안, 윤리, 은사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복음, 예수 진리를 담은 메시지나 세상의 문화와 세계관과 비전으로부터 구별되는 신앙의 명백한 서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가 교리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다. 공적인 신앙고백문서들은 골동품처럼 취급당하고 있다.한국교회 안에는 교파와 교파 사이에 신앙고백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가고 있
바른믿음의 독자 한 분이 (고) 박윤선 박사님의 책 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언급이 있다며, 다음의 내용을 보내주셨다.“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됨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의를 성립시킨 그의 순종은 피동적인 것(Passive obedience)과 능동적인 것(active obedience)이 있다고 한다. 피동적인 것은 그가 우리의 벌을 대신하여 죽으심이요(갈2:21), 능동적인 것은 우리 대신 그가 율법을 완전히 복종하심이다(롬5:29; 갈4:4-5). 이 두 가지는 신자가 그리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복음주의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개신교회를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 대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가르쳐왔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교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1940년대에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
그리스도의 구원 후에는 새로운 계시가 진행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아 필요한 진리가 다 성경에 담겨져 있다. 즉 모든 성경계시의 목표가 다 실현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계시가 진행되거나 새로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본질적 완전성은 영원한 구원 얻음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보존의 완전성은 성경이 파괴나 허위화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게 보존되었으므로, 어떤 한 책이나 한 부분이 성경 외의 다른 것에 의해 보충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을 섬김과
성령은 결코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아니다. 진리와 계시는 결코 부정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창조 계시에 대한 해석도 결코 19세기에 나타난 자연과학이라는 내재적 학문으로 수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해석 방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변덕스럽거나 미숙한 분으로 인간을 오도하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 틈새가 있다.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계시 해석에 있어 교회 역사의 성령 충만한 중심 인물들을 통해 이미 초대 교회때부터 바른 성경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즉 초대 신학자들은 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
성경은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고유한 특성들을 가진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므로 신적 권위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갖는 권위와 특성을 가리켜 성경의 신성성(神性性)이라고 한다.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무조건적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다. 인간의 이성이 성경계시에 종속하고 순종해서 그대로 수납해야 한다. 또 성경은 진리의 유일 원천으로서 완전하고 명료하므로 모든 진리를 성경에서 도출한다. 그것은 믿음의 진리뿐 아니라 모든 지식이 성경에서 곧 하나님의 계시에서 와야 하고 또 그 계시에 의해 판단 받아야
질문>목사님, 질문드립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에게는 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상식처럼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에게 본성으로 주어진 내적 죄성은 어떻게 유전되게 되었을지 궁금함을 느낌니다. 죄성을 하나님께서 심겨 두신 것인지 사단에 의해 심겨진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고견을 부탁드립니다.답변>먼저 아담에게 죄가 침투하여 더려워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언약 파기)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도 소용없는 영원한 저주를 선고하셨습니다.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