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 음성듣기를 매우 강력하게 예수전도단 대표 문희곤 목사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야 한다. 그 설교가 옳고 그른지, 그 글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다. 우리도 베뢰아인들처럼 성경을 상고해 보자.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요한복음 10:27을 근거 구절로 보여준다.당신은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는가? 간접적으로 듣고 믿는 것과 직접 듣고 믿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당연히 직접 듣는 쪽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일부 사람만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 음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특권이라는 진리를 받
3. 칭의론앞에서 웨슬리와 존 길의 추종자인 허베이의 논쟁에서와 같이 허베이는 칭의 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존 길의 칭의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존 길은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칭의는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이로써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깨끗이 하며, 정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해서 그들을 의로운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받아주시며, 의를 전가하신다.”1)존 길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70번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서 존 길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그가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 대해서 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존 길에 있어서
김성로의 에 대한 고찰1)김성로는 교육 교재를 제작하면서 한마음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땅 끝까지 증거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김성로는 십자가가 아닌 부활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김성로는 복음과 성령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삶의 변화’는 영과 육, 두 가지 영역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양육 교재이기 때문에 영적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교재 전반에서 삶의 변화는 주인 위치 변경, 죄와 싸워 이김이 전부이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란 표현은 매우 어설픈 표현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이고, 복음으로 부활을
김성로 목사의 저서『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1), 동행하라(2)』에 대한 총평 김성로의 두 권의 교재는 “복음시리즈”로 세우고,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1)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다. 김성로의 교육 시리즈가 ‘복음’과 ‘부활’이 주요 가치인 것을 알 수 있다. 복음과 부활을 동의어로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는 않지만, 복음의 핵심을 부활로 파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복음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복음에서 부활만을 떼어서 복음 전체라고 말할 수 없다. 부활을 강조하고 복음의 다른 항목들을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파괴하는 교묘한 행동이다. 복음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인데, 선으로 선을 이기는 방식은 없다.“
1. 들어가는 말목사가 사상(思想)이 있을까? 일반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목회한다. 그런데 목사가 유명하면 그 목사에게는 사상이 있다고 보아야 하고, 사상은 검증이 필요하다. 목사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목사는 사상 검증과 인증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목회가 보장되어야 한다지만, 보편 교회 원리를 이해한다면 사상 검증의 필요성을 거부할 수 없다.한국 교회의 부정적 특징은 ‘권징’이 사라진 것이다. 권징이 사라진 대표적인 현상은 ‘강단금지’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모든 교단은 ‘강단교류 허용과 금지 단체’를 규정하고 있다. 총회에서 이단, 위험단체, 참여금지 등을 규정하면, 그 단체에 소속한 사역자에게 강단을 허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장로교 합동 총회는 통합, 기장 등과 강
예수전도단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문희곤 목사의『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를 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예수전도단 사람들이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나는 예수전도단의 묵상과 중보기도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하여 그대로 순종했는데, 결과가 정반대로 흘러간 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의문부호가 뗘오르기 시작했다 ...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성경적이고 체계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문희곤 목사)문희곤 목사의 경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온 사례 즉, 이런 저런 시행착오 후 점점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발견되는 모습,
웨슬리가 이렇게 칼빈주의에 대해서 공격적인 이유는 그 당시 과도한 칼빈주의의 성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 당시의 웨슬리와 논쟁적 위치에 있었던 과도한 칼빈주의자는 존 길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웨슬리가 그토록 칼빈주의를 혐오하게 하였던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1. 선택, 유기, 견인 교리웨슬리가 그토록 칼빈주의에 대해서 공격하였던 것은 선택의 교리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 웨슬리는 휫필드와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존길이라 할 수 있다. 존 길은 선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삶에 대한 예정인 선택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고, 불변의 뜻이다
3. 성화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이나 혹은 루터주의자들 모두 믿음의 실천에 있어서 특히 성결과 선행이 미약함을 비판하였다. 웨슬리는 루터주의자와 칼빈주의자들이 너무 믿음을 확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웨슬리는 우리를 위해 주어진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그 남용이 심각하며, 따라서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그리고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가? 당신은 새로운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에게서 몸 전체의 죄가 파괴되었는가? 당신은 의심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는가? 더욱이 웨슬리는 전가된 칭의에 대해서 제임스 허베이 (James Hervey)와 논쟁하는데 (제임스는 존 길을 추종
이단(異端), ‘다를 이(異)’, ‘바르다, 끝 단(端)’이다. 그래서 혹자는 ‘끝이 다른 것’으로 규정해서,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매우 바람직하지 않는 정의이다. 이단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알파와 오메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시작이 같으면 끝이 같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믿는다(롬 8:39).이단(異端, heresy)은 정통(正統, the Orthodoxy)이 세워짐으로 확립된 개념이다. 정통은 구원을 무력하게 하는 공격에 대항해서 형성된 변호적인 체계이다. 변호와 믿음 고백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하는 것이 정답이다. 정통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동일한 본체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측 목사이다. 1999년도에 안수를 받은 20세기 목사이다. 세기가 바뀌었지만 아직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1992년, 1999년 등은 밀레니엄 광풍이 불기도 했었다. 1999년 12월 31일의 태양과 2000년 1월 1일의 태양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이단 집회, 이단적 집회, 이단으로 단죄될 가능성이 있는 집회, 위험성이 있는 집회... 공통점이 있는데, 그곳은 ‘열정과 열광’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절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씀했고, 신학생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당황했고 불만이었고 기분 나빴다. 목사 20여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쩔 수 없이 사는’ 혹은 ‘돈만 위하는 목사를 많이 보셨나보다’ 이렇게
1. 선택(유기),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최종적 견인웨슬리는 칼빈주의자(calvinist)를 만나서 그와 상담한 사례들을 싣고 있다.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칼빈주의자가 웨슬리를 찾아왔다. 그는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리를 웨슬리에게 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뿐만 아니라 대부분 같은 견해를 가진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실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그래서 웨슬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였는데, 그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선택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십니다’라고 그들이 대답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웨슬리는 선택과 유기 교리가 사람들로 실망을 주는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권세를 이양하고 사십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6-11). 이 사건 이후로 이제 그 누구도 사도들과 같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부활 후 사십일 동안 경험한 일들을 그 누구도 다시 경험하지 못한다.이제는 간접적으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다. 스데반이 환상 중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것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러한 일은 매우 독특한 경우였고, 다른 사도들의 직접적 경험과는 다르다.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알고 있었으며, 직접 들은 것을 증언할 수 있었으며, 죽었다가 완전히 육체로 부활하시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언할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해서 꾸준하게 논의하는데, 논의하면 할수록 합의점에 아닌 미궁(迷宮)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왜 많은 연구자들이 ‘칭의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데, 미궁에 들어가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라는 동일한 책제목으로 몇 종류가 출판된 상태이다(최갑종, 새물결플러스, 2016; 가이 워터스,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2011). 이와 관련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주제는 훨씬 더 많은 출판물과 연구논문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이 증대하는지 원인을 밝히면서 해소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1. 칭의 카오스(Justification Chaos)‘칭의’를 논하면서
‘설교’는 통상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하는 말하는 행위”로 한다. 그러나 다양한 어휘가 있다. ‘말씀강론’, ‘말씀선포’, ‘복음선포’, ‘복음강론’, 등이다. 영어로는 sermon, preaching을 사용한다. ‘설교학’은 ‘homiletics’이다.‘설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설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도들은 다양한 이론을 발표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목사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오래 동안 반복된 자기 행위에서 설교에 대해서 자기 정립을 할 수 있다. 목사 리더십의 근원은 설교에 있다. 물론 설교와 인격은 분리되지 않는다.‘설교’란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다. ‘설교하는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인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큰 토론이 일어났다. 이방인들도 유대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들에게 큰 멍에를 씌우려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굳이 할례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적인 연설이 큰 효과를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연설한 야고보에 의해 대세를 결정되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하면서 그 일이 지금 성취된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들어주었다.그러나 배려심이 많은 야고보는 단칼에 유대주의자들을 내리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몇몇 행위들, 즉, 우상에게 바진 고기를 먹는 것과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인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는 일의 하나로, 종교개혁 시기 개혁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폐하였다고 강조하고 칼뱅과 청교도들은 사순절 등 특별한 절기를 지키지 않고 매일매일 십자가의 빛에서 살아가야 함을 강조했다고 해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일을 언급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장 칼뱅은 그의 주저 ‘기독교 강요’에서 천주교에서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사순절을 지키라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인간의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칼뱅은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
칼빈파는 교회를 ‘거룩의 정도(精度)’로 구분한다. ‘보다 부패하지 않는 교회’, ‘더 부패한 교회’로 구분하여 ‘한 교회’의 명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칼빈파는 부패를 이유로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더 부패한 교회가 정죄하고 박리(剝離)시킬 때는 주의 말씀대로 가차없이 그 집단에서 퇴출되는 기쁨과 영예를 선택한다.필자는 트렌트 회의에서 이신칭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아나떼마’(annathema, 저주)를 기쁘고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정죄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일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허용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도침례까지 시행한 한국교회 모습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 다시 재발하지 않기 위해
한국 장로교회(합동)에는 수 년전 총회에서 ‘천주교’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의 프로그램 ‘사순절’ 기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의 사순절을 사모하고 맹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에서 천주교에 ‘동일한 방언’ 현상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평가하듯이, 동일한 사순절을 지키면 동일한 수준이 될 것이다. 합동 교단은 총회 결의로 사순절를 행하지 않도록 규정했다.왜 사순절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순절은 무엇인가? ‘사순절(四旬節)’, ‘Lent’는 본래 Anglo Saxon어로 ‘spring(봄)’이란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이 3일이지만, 시간은 40시간이
16세기 ‘종교개혁(改革, reformed)’ 뒤, 17-18세기에 ‘부흥(復興, revival)’이 일어났다. 부흥(復興)은 종교개혁이 약화될 때 종교개혁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약화된 것은 계몽철학(이성주의), 신비주의(이성주의), 식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발흥하면서 발생했다.부흥은 종교개혁을 반복하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바른신학 운동인데(가르침의 회복), 부흥 시대에는 열정과 세계선교(탈교회주의)를 추구했다. 생명을 건 헌신과 뜨거운 기도를 추구했고, 교회가 아닌 선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 부흥에서 헌신과 열기를 뜨겁게 올려야했고,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영혼을 구령하는 것을 목표한 것처럼 나타났다. 부흥은 외적인 가치는
‘사도’는 교회에서 유일한 직분이다. 예수께서 직접 세운 특별임시 직분(the extraordinary offic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성경에 근거한 '사도'는' 계시 담지자(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고 '교회 설립의 원형'이다. 교회 설립의 방식과 내용(복음, 바른 교훈)을 사도가 결정했다.사도 요한이 소천된 뒤에 사도의 후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Post-Apostolic, 100-200)’라고 부른다. 성경에 등장한 마가, 실라, 디도, 디모데 등은 계시 담지자이기도 하고, 사도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96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문서가 있지만, 성경이 아닌 속사도 문헌으로 구분한다.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