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출귀몰 ‘전우치(田禹治, 14??년 ~ 15??년)’가 있었지만 조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많은 도전자들은 혁명을 하기도 했고, 반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에서 드러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 Calamus Gladio Fortior 영,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우리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 했다. 문(文)을 숭상하여 무(武)를 천시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권력은 항상 무력(武力)에 근거했다. 그럼에도 무력은 시대를 아프게 했을 뿐 회복을 제공하지 못했다. 간혹 무력독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간존중이 결여된 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칼(刀)을 근거로 한 통치에는 칼잡이를 잡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 제102회 총회기 제3차 총회실행위원회 회의에서 “총신비상사태와 관련한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를 작성해서 발표했다(17-33쪽).지난 4월 20일 총회관에서 열린 실행위원회 회의자료에 수록된 보고서의 작성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선교신학, 실천신학 교수 7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글을 비평하려고 글을 보는 순간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것은 첫 어휘가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라는 문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첫째, “총신비상사태와 관련한 정이철의 신
필자는 이전에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 그는 누구일까?”라는 글을 에 기고했다. 그 글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은 댓글이 나올 정도로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번 기회에 정이철 목사가 휘두르면서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는 신학의 칼의 성격을 정리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인터넷 매체인 을 사람들은 ‘신학과 이단비평 전문사이트’라고 한다. 이 사이트는 2014년 10월 1일, 그러니까 약 4년 전에 드라마틱하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오해일수도 있고, 공격일수도 있다. 아무튼 정이철 목사의 기사와 보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정이철’ 자신뿐인 것 같다.필자는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 그는 누구일
정이철, 미국 앤아버반석장로교회 목사이고 신학신문 대표이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에서 소개되는 정보에 의하면 전남 여수 출신이고, 1967년생이라고 한다. 필자가 69년생이고 86학번이므로 정이철은 그 보다 조금 빠를 것 같다. 지금도 여수에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에 방문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가 어떻게 정이철 목사와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사실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어떻게 정이철과 연결되었을까? 정이철을 안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정이철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빨대’, ‘총’ 등 상상하기 어려운 어휘를 구사하면서 사람들에 충격과 패닉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일단 그
총신대학교가 학부와 신대원 모두 개강을 하였으나 일부 비대위 학생들이 아직도 본관을 점거하고 있고, 전산시스템이 점거된 상황이다. 정보화시대에 전산실 점거는 사실상 테러 수준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종교사학의 내부문제라서 경찰이나 정부가 강제진압을 하지 않고 있으니, 자칫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가 증폭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총신대학교 교직원과 교수들은 총신대학교 불법 점검에 대해서는 어떤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용역이
김세윤 박사(LA 풀러신학교 교수)의 신학 내용에 대해서 뜻있는 목사들이 모여서 비평적 연구와 독서를 진행했다. 이미 몇 사람이 협업으로 (CLC, 2017)를 출판하기도 했다. 김세윤 교수의 신학보다 톰 라이트 신학이 훨씬 유명한 것이 지금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신학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김세윤 신학을 이해 못하고, 톰 라이트의 신학이 유행한다면, 결국 유행을 따르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톰 라이트의 신학보다 더 유행하는 신학이 등장한다면 결국 그곳으로 갈 것이다.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를 “유보적 칭의”라고 제시한 것은 최덕성 박사(브니엘 신학교 총장)이다. 김세윤 교수는 그 정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
정이철 목사님은 순수한 복음의 정수로 한국 교회의 올바른 방향을 선도하고 있다. 박영돈 교수님은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서 정평난 신학자이다. 두 위인이 격돌하는 상황에서 나의 모습은 고래 싸움에 새우 같다.박영돈 교수의 명성과 많은 지지자들의 '좋아요' 응원이 정이철 목사를 압도하는 것 같아 한 편의 글로 무게를 맞추어보려고 한다. 정이철 목사님의 행동을 ‘순수한 의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의 한국 교회를 위한 올바른 가르침을 사모하는 마음의 행동은 박영돈 교수님께는 당돌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페이스북에 박영돈 교수님께서 짧은 글로 견해를 피력하셨다. 이에 대해서 박영돈 교수님을 간략하게 비평하며 균형을 시도하고자 한다.
본 글은 고경태 박사가 2012년 “한국장로교회 100년,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개최된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각 교단 신학지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논의 고찰을 통한 한국장로교회 100년의 성령 이해 고찰”에서 고신 부분만 발췌한 것이다. 2. 1951년 이후 고신 측의 성령 이해1)고신은 1938년 27회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투옥된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가 해방 후 출옥하여 세운 고려신학교(1946년 설립)에서 시작된다. 고려신학교 지위 문제로 1951년 5월 25일에 분리했다.2)허순길 박사는 고신신학을 “한국장로교사의 맥락에서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으로 정의했다.3) 고신 측의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은『개혁신학과 교회』
김성로의 에 대한 고찰1)김성로는 교육 교재를 제작하면서 한마음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땅 끝까지 증거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김성로는 십자가가 아닌 부활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김성로는 복음과 성령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제시했다(복음시리즈1권, 2쪽). ‘삶의 변화’는 영과 육, 두 가지 영역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양육 교재이기 때문에 영적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교재 전반에서 삶의 변화는 주인 위치 변경, 죄와 싸워 이김이 전부이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란 표현은 매우 어설픈 표현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이고, 복음으로 부활을
김성로 목사의 저서『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1), 동행하라(2)』에 대한 총평 김성로의 두 권의 교재는 “복음시리즈”로 세우고,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1)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한다. 김성로의 교육 시리즈가 ‘복음’과 ‘부활’이 주요 가치인 것을 알 수 있다. 복음과 부활을 동의어로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는 않지만, 복음의 핵심을 부활로 파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복음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복음에서 부활만을 떼어서 복음 전체라고 말할 수 없다. 부활을 강조하고 복음의 다른 항목들을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파괴하는 교묘한 행동이다. 복음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인데, 선으로 선을 이기는 방식은 없다.“
1. 들어가는 말목사가 사상(思想)이 있을까? 일반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목회한다. 그런데 목사가 유명하면 그 목사에게는 사상이 있다고 보아야 하고, 사상은 검증이 필요하다. 목사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목사는 사상 검증과 인증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목회가 보장되어야 한다지만, 보편 교회 원리를 이해한다면 사상 검증의 필요성을 거부할 수 없다.한국 교회의 부정적 특징은 ‘권징’이 사라진 것이다. 권징이 사라진 대표적인 현상은 ‘강단금지’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모든 교단은 ‘강단교류 허용과 금지 단체’를 규정하고 있다. 총회에서 이단, 위험단체, 참여금지 등을 규정하면, 그 단체에 소속한 사역자에게 강단을 허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장로교 합동 총회는 통합, 기장 등과 강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예배당 정문에 게시한 반박문은 이신칭의에 관한 선언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청이 실시하는 부당성에 관해서 95개 조항을 공포한 것이다. 그 부당성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로마서 1:16-17을 근거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이었다. 루터는 실존적으로 죄 사함을 시도한 위인이다. 그는 수많은 고행에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인식했다. 당시의 모든 방법, 성지 순례, 고행 등등을 동원했지만 죄가 사라지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게 죄와 사투를 벌리는 신실한 수사가 로마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고행방식(충족설)’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확신하면서, 로마 교황청의 가르침이 부당함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단(異端), ‘다를 이(異)’, ‘바르다, 끝 단(端)’이다. 그래서 혹자는 ‘끝이 다른 것’으로 규정해서,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매우 바람직하지 않는 정의이다. 이단은 처음과 끝이 다르다. 알파와 오메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시작이 같으면 끝이 같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믿는다(롬 8:39).이단(異端, heresy)은 정통(正統, the Orthodoxy)이 세워짐으로 확립된 개념이다. 정통은 구원을 무력하게 하는 공격에 대항해서 형성된 변호적인 체계이다. 변호와 믿음 고백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하는 것이 정답이다. 정통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동일한 본체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 측 목사이다. 1999년도에 안수를 받은 20세기 목사이다. 세기가 바뀌었지만 아직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1992년, 1999년 등은 밀레니엄 광풍이 불기도 했었다. 1999년 12월 31일의 태양과 2000년 1월 1일의 태양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이단 집회, 이단적 집회, 이단으로 단죄될 가능성이 있는 집회, 위험성이 있는 집회... 공통점이 있는데, 그곳은 ‘열정과 열광’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절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씀했고, 신학생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당황했고 불만이었고 기분 나빴다. 목사 20여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쩔 수 없이 사는’ 혹은 ‘돈만 위하는 목사를 많이 보셨나보다’ 이렇게
종종 신문과 책에서 ‘렉티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본다. 성독(聖讀), 거룩한 독서, 영적 독서, 묵상 등으로 번역한다. 고영민은 큐티(QT)와 렉티오 디비나를 구분했다. 규티는 ‘관찰-해석-적용’의 3단계의 과정으로 삶의 적용을 강조하고, ‘렉티오 디비나’는 ‘읽기(lectio)-묵상(meditatio)-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 4단계 과정에서 자발적 기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말씀기도’라고 정의하며, 성경과 교회 역사에 뿌리는 둔 기도 방법이라고 긍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대해서 꾸준하게 논의하는데, 논의하면 할수록 합의점에 아닌 미궁(迷宮)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왜 많은 연구자들이 ‘칭의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데, 미궁에 들어가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라는 동일한 책제목으로 몇 종류가 출판된 상태이다(최갑종, 새물결플러스, 2016; 가이 워터스,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2011). 이와 관련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주제는 훨씬 더 많은 출판물과 연구논문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혼란이 증대하는지 원인을 밝히면서 해소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1. 칭의 카오스(Justification Chaos)‘칭의’를 논하면서
‘설교’는 통상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하는 말하는 행위”로 한다. 그러나 다양한 어휘가 있다. ‘말씀강론’, ‘말씀선포’, ‘복음선포’, ‘복음강론’, 등이다. 영어로는 sermon, preaching을 사용한다. ‘설교학’은 ‘homiletics’이다.‘설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설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도들은 다양한 이론을 발표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목사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오래 동안 반복된 자기 행위에서 설교에 대해서 자기 정립을 할 수 있다. 목사 리더십의 근원은 설교에 있다. 물론 설교와 인격은 분리되지 않는다.‘설교’란 “목사가 주일에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다. ‘설교하는
칼빈파는 교회를 ‘거룩의 정도(精度)’로 구분한다. ‘보다 부패하지 않는 교회’, ‘더 부패한 교회’로 구분하여 ‘한 교회’의 명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칼빈파는 부패를 이유로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더 부패한 교회가 정죄하고 박리(剝離)시킬 때는 주의 말씀대로 가차없이 그 집단에서 퇴출되는 기쁨과 영예를 선택한다.필자는 트렌트 회의에서 이신칭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아나떼마’(annathema, 저주)를 기쁘고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정죄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일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허용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도침례까지 시행한 한국교회 모습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 다시 재발하지 않기 위해
한국 장로교회(합동)에는 수 년전 총회에서 ‘천주교’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의 프로그램 ‘사순절’ 기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의 사순절을 사모하고 맹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에서 천주교에 ‘동일한 방언’ 현상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평가하듯이, 동일한 사순절을 지키면 동일한 수준이 될 것이다. 합동 교단은 총회 결의로 사순절를 행하지 않도록 규정했다.왜 사순절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순절은 무엇인가? ‘사순절(四旬節)’, ‘Lent’는 본래 Anglo Saxon어로 ‘spring(봄)’이란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이 3일이지만, 시간은 40시간이
16세기 ‘종교개혁(改革, reformed)’ 뒤, 17-18세기에 ‘부흥(復興, revival)’이 일어났다. 부흥(復興)은 종교개혁이 약화될 때 종교개혁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약화된 것은 계몽철학(이성주의), 신비주의(이성주의), 식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발흥하면서 발생했다.부흥은 종교개혁을 반복하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바른신학 운동인데(가르침의 회복), 부흥 시대에는 열정과 세계선교(탈교회주의)를 추구했다. 생명을 건 헌신과 뜨거운 기도를 추구했고, 교회가 아닌 선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 부흥에서 헌신과 열기를 뜨겁게 올려야했고,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영혼을 구령하는 것을 목표한 것처럼 나타났다. 부흥은 외적인 가치는